056 엘리스가 해준 저녁
‘슬슬 할 때가 됐어.’
산맥에서 만난 흑마법사들은 모두 데카드가 무난하게 이길 수 있는 정도였지만 그들 무리의 대장은 그렇게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요행이나 잡기술로 어떻게 해볼 만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데카드는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1주일 동안 4서클로의 돌입을 시도하기로 했다.
[주인님을 도와줄 만한 마법사가 있습니까?]
슬레이에서는 3서클로 갈 때 페일이 뒤에서 보조를 해줬지만, 이곳에서는 딱히 부탁할 사람이 없다.
굳이 꼽자면 필립과 산맥에서 친해진 집행관 두 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항상 업무에 시달리느라 바쁜 그들에게 퇴근 후에도 이런 노동을 시키는 건 미안한 일이다.
서클을 올린다는 건 보통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보조해 주는 사람조차 큰 피로와 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이 분필을 샀지.’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을 도와줄 안정화 마법진들을 그리기 위해 데카드가 준비한 물건이다.
이것이 있으면 완전히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마법진의 완성도에 따라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다.
한편 데카드가 분필을 사고 여관으로 가고 있을 때 엘리스는 식료품점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으음…….”
암살자로 태어나고 길러지면서 요리라면 숲속에서 노숙할 때 야생 동물들을 잡아서 해본 적밖에 없었어도 그때 자신의 요리는 호평을 받았었다.
“좀 많나?”
오늘 만들 요리를 생각하며 재료를 담다 보니 벌써 장바구니가 가득이었다.
둘이서 먹을 건데 이렇게 많아도 되나 싶더라도 데카드가 얼마나 먹을지 모르니 엘리스는 일단 담기로 했다.
다행히 여관 안에는 기본적인 조리 도구가 있어 냄비나 칼 같은 건 사지 않아도 되었고, 식재료들을 전부 산 엘리스는 여관으로 움직였다.
“얼른 가자.”
배가 고플 데카드를 위해 조금이라도 빨리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어 엘리스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뒷골목으로 슥슥 움직이다 보니 데카드보다 빠르게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고 자신의 방까지 굉장히 짧은 시간에 주파했다.
“냄비를 꺼내고.”
식탁에 재료들을 쏟아낸 엘리스는 그대로 조리 기구들을 하나둘 꺼내 놓았다.
“이제 해보자.”
오늘 데카드에게 해줄 엘리스의 요리는 바로 토마토 파스타였다.
수많은 음식 중에서 굳이 이 음식을 고른 이유는 자신이 먹은 음식들 중 이게 가장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을지는 자신도 의문이었다.
“데카드가 좋아해야 할 텐데.”
암살단에 있었을 적에 한 선배가 잠입을 위해 필요한 거라며 파스타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암살자가 뭔 파스타냐며 배우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그 선배가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고 결국 배우고 말았다.
그런 후에 선배가 만든 파스타를 한입 먹어보았는데 밀 빵과 물에만 길러진 자신에게는 가히 천상의 맛이었다.
“고마워요, 선배.”
이 자리에는 없고 어쩌면 벌써 이 세상을 떴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야 엘리스는 그 선배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언제 데카드가 올지 모르니 그가 올 때쯤에는 적어도 조리의 반 정도가 끝나 있어야 한다.
엘리스는 얼른 냄비에 물을 넣고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올 때까지 끓여서 딱딱한 면들을 물에 촤라락 풀었다.
암살의 손기술을 이용해 면을 냄비에 원형으로 푸는 모습은 거의 일류 셰프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야채를 썰자.”
면이 푹 익을 동안 엘리스는 도마를 가져오고 칼 대신 자신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엘리스는 흐르는 물에 단검을 잘 씻은 후 버섯이나 베이컨 등등 함께 먹으면 그 풍미가 더욱 살아나는 것들을 먹기 좋게 썰어 넣었다.
단검이 도마 위에서 춤을 출수록 재료들은 보기 좋게 잘려 나가거나 손질이 됐고 어느새 면도 거의 다 익었다.
엘리스는 익은 면을 다른 곳에 담았고 토마토소스를 들이부어 면에 소스가 잘 배도록 팬을 흔들었다.
그 순간 복도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가도 돼?”
“들어오세요!”
열려있는 문으로 데카드가 들어왔고 그는 들어오자마자 깊은 토마토 향과 야채들의 냄새가 자신의 코로 훅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거의 다 됐나 보네?”
“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엘리스는 방긋 웃으며 데카드를 바라본 후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방금 썰어 놓은 재료들도 전부 투하해 주고 다시 한번 적절하게 모두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자 파스타가 완성되었다.
“너무 많나……?”
할 때는 몰랐는데 막상 만들고 보니 커다랗던 냄비 위로 넘치게 파스타가 올라오고 있었다.
처분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그릇에 보기 좋게 파스타를 담은 엘리스는 포크와 함께 식탁위에 놓았다.
“다 됐어?”
“네!”
데카드는 침대에 앉아 있다가 식탁으로 가까이 오면서 엘리스 뒤에 있는 파스타를 보았다.
“어우, 엄청 많이 했네?”
“하다 보니까…… 헤헤.”
엘리스는 자신의 것도 그릇에 담고 식탁에 앉았다.
“으음…… 혹시 손님들을 조금 더 불러도 돼?”
“손님들이요?”
데카드와 자신의 주변이라고 해봤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없는데 따로 올 사람이 있나 하고 그녀는 의아해했다.
“얘들아, 나와 봐.”
코트로 변해 있던 짹짹이와 데카드 안에 있던 네 마리의 마수들이 모두 바깥으로 나오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눈 깜짝할 새에 푸른빛과 함께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나타나자 엘리스의 눈이 커졌고 그녀는 많이 놀란 듯 보였다.
“인사해. 얘네는 내 부하이자 친구이자 동료. 마수계의 지배자들이야.”
“……이분들이 그분들이군요.”
필립에게 마수계 얘기를 할 때 네 마리의 마수들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는데 엘리스는 그때를 기억하며 인사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스라고 해요. 데카드에게 목숨을 구원받아서 그의 여정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요르다.”
“이 몸은 고오른이시다!”
“티이라!”
“…….”
모두 저마다의 스타일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고 요르는 유난히 엘리스가 탐탁지 않은 듯 계속 팔짱을 끼고 노려보았다.
“그럼 파스타를 조금 더 담을게요.”
먹을 입이 확 늘자 이 파스타가 갑자기 부족해 보였다.
“내 방으로 갈까? 여기서 이렇게 먹기에는 좁으니까.”
“좋아요.”
파스타가 담긴 팬을 들고 데카드의 방으로 온 일곱 명은 대실에 오자 그나마 숨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여기다 올려.”
대실의 그릇들을 꺼내 파스타를 담았고 포크까지 마수들에게 쥐여주었다.
“이제 한 번 먹어볼까?”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마수들의 합창과 함께 일곱 명은 포크를 빠르게 움직였다.
면은 끊김 없이 탱글탱글하게 곧바로 쭈욱 올라왔고 그 사이사이 배어 있는 소스의 간 또한 훌륭했다.
중간마다 씹히는 여러 가지 부가 재료들은 그 맛과 더불어 향을 더욱 강하게 해줘 음식점이나 레스토랑보다 더 나은 맛을 보여주었다.
“엘리스는 나중에 요리해도 되겠는데?”
“헤헷…… 감사해요.”
엘리스는 데카드가 맛있어하자 그제야 자신도 한입을 먹어보았다.
“어때, 얘들아?”
마수들에게 물어보자 요르는 인정하기 싫은 듯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 열심히 파스타를 먹었다.
“맛있습니다!”
“응응! 맛있다! 엘리스!”
“…….”
음식이라면 거의 가리지 않고 좋아하긴 하지만 어쨌든 맛있다고 해주니 다행이었다.
“한 그릇 더 먹어도 돼?”
“그, 그럼요!”
엘리스는 얼른 파스타를 그릇에다가 가득 담아주었고 데카드는 다시 청소기가 흡입하듯 면을 빨아먹었다.
그 뒤로 마수들까지 몇 번 리필을 받자 산처럼 쌓여있던 파스타들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엘리스는 잘 먹어준 데카드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다가도 자신의 뒤통수를 찌르르하게 울리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조금씩 고개를 돌려보자 뱀같이 세로로 쭉 찢어진 눈동자의 요르가 아까부터 엘리스를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 요르 님은 왜 저를 노려보시는 건가요?”
“애는 착한데 질투심이 좀 많아.”
데카드가 믿고 또 고마워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기에 요르가 지금 가만히 있는 것이지 만약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당장 한입에 삼켰을 것이다.
“질투심이요?”
“응.”
마수계에서야 인간의 모습을 한 여자는 티이라와 요르밖에 없었고 티이라는 그렇게까지 육체적인 접촉을 해오진 않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인간계는 인간 모습의 여자가 수없이 많았고 미녀 또한 수두룩했다.
인간계에 와서 요르의 질투심이 강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쳇.”
지금도 엘리스가 눈을 마주치려 하면 요르는 혀를 차며 피해 버렸다.
“너무 그러지 마, 요르. 엘리스하고도 친하게 지내주면 안 돼?”
데카드가 요르에게 다가가 흰 눈 같은 머리칼을 계속 쓰다듬어주자 그녀는 무장 해제되며 얼떨결에 동의하고 말았다.
“흐, 흥. 알겠어요.”
“그럼 이제 밥도 먹었겠다, 한번 해보자.”
주머니에 있던 분필의 포장을 뜯은 데카드는 대실의 바닥에다가 서슴없이 마법진을 그려 나갔다.
분필이 움직이는 경로대로 파란 빛줄기가 남았고 그것들이 마법진을 하나하나 만들어나갔다.
“뭘 하시려는 거예요?”
“더 커다란 힘을 얻으시려는 거다.”
그래도 이 중에서는 친절한 편에 속한 짹짹이가 엘리스에게 조금이나마 설명을 해주었다.
“이렇게였던 것 같은데.”
커다란 동그라미 세 개를 삼각형 모양이 되게 만들고 그 안에 룬어들을 그려 넣어주면 자신이 기억하는 안정화 마법진이 완성된다.
“좋아.”
데카드는 그 안으로 들어가며 상의를 전부 벗어 바닥으로 던졌다.
“또 땀에 젖으면 축축하니까.”
“크흡…….”
엘리스는 그 모습에 쏟아지는 코피를 급하게 휴지로 틀어막았고 망원경이라도 가져올 듯 평소보다 두세 배의 집중을 하며 데카드를 관찰했다.
평소 요르라면 그런 엘리스를 보고 이를 갈았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그녀도 데카드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시작한다.”
3서클 때보다 조금 더 오래 걸릴 테니 그 고통을 생각하면 두렵기도 했지만, 지금은 마법진과 정신력을 믿어야 했다.
한 개의 서클을 더 감기 위한 지반 공사가 시작됐다.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았어도 데카드에게는 몸 곳곳에서 천둥이 치는 듯 회로들과 기관들이 전부 부서져 나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당장에라도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고통에 찬 비명들은 속으로 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다.
“데카드는 괜찮은 건가요?”
“믿어라! 마수왕님!”
티이라는 정답이라곤 그것 하나뿐이라는 듯 신뢰의 눈빛으로 데카드를 바라보았다.
여기 있는 모든 마수가 그랬으며 1000년 동안 봐온 자신들의 왕이 이런 것에 굴복할 리 없다는 굳센 믿음의 눈빛이었다.
우우웅-
고통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점점 올라가고 있을 때 다행히 아까 그려둔 마법진이 빛을 내뿜으며 발동을 시작했다.
순전한 기억대로 그려 넣은 룬어들이라 잘못될 위험도 있었는데 마법진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마법진의 마나가 데카드에게 조금씩 스며들고, 누군가 보조해 주는 것보다는 효과가 덜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당연히 나았다.
“후우…….”
고통도 조금 잠잠해졌겠다, 데카드의 지반 공사는 박차를 가했고 40분이 조금 넘어갔을 때 드디어 마나가 심장에 도달했다.
벨트를 허리에 감듯 조심스럽게 심장을 마나가 묶어나갔고 자신의 꼬리를 문 순간 4서클이 완성됐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