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모쏠의 연애
유물이 담긴 주머니가 필립의 책상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이게 그 상부에서 닦달하던 유물인가?”
필립이 들고 있던 서류와 펜을 내려놓고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 하자 데카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웬만하면 안 건드는 게 좋을걸?”
“왜?”
데카드는 필립에게 마차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었다.
유물이 자신에게 뿜어낸 요사스러운 빛.
그로 인해 자신의 정신력이 바닥나고 하마터면 이것의 노예가 될 뻔했던 일.
“크흠…….”
그 설명을 들은 필립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뺐다.
“네가 그 정도로 힘들어했으면 다른 사람들은 피할 수가 없겠어.”
필립은 데카드와 같이 흑마법사나 몬스터 소탕을 나설 때 수없이 많은 저주와 정신계 마법이 데카드에게 걸리는 것을 보았다.
물론 저주에 걸리는 건데 위험한 일이 분명 맞았지만, 필립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집행관 신입 때는 저주에 대해 이론만 알지, 당해본 적도 걸린 사람을 본 적도 없어 맞으면서 싸웠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자 흑마법사들이 저주를 걸 만한 요소를 차단해서 아예 저주가 몸의 침입을 못하도록 만들었다.
설령 걸리더라도 데카드의 정신력은 저주의 고통이 전투에까지 미치지 못하게 막아주었다.
동기와 직장 동료로서 그 기이스럽고도 놀라운 일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필립은 데카드의 정신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그런 데카드가 자신도 벗어나는 데 실패할 뻔했다고 하니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견디기 힘들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 주머니 보낼 때 네가 편지 같은 걸 써줘.”
집행부장이 하는 충고인데 엿 바꿔 먹지는 않을거고 머리 좋은 마법부가 알아서 유물을 잘 보관할 것이다.
“알았어.”
곧 유물을 가지러 오기 위해 마법부의 인물이 이곳까지 올 테니 그동안의 시간은 친구와 밀린 담소를 나누는 것으로 보내야겠다.
“그래서 형수님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아리안?”
필립은 서류 작업으로 바쁘게 움직이던 두 손도 멈추고 그때를 회상하는 듯 헤벌쭉 웃었다.
“다 늙어가지고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빨리 얘기나 해봐.”
“다 늙었다니! 너 나랑 동갑이야!”
데카드가 나이를 걸고넘어지자 필립이 유난히 울컥하며 성을 냈다.
“알았으니까 빨리빨리.”
필립은 한숨을 쉬며 어느정도 진정을 하고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와 아리안이 처음 만나건 내가 집행관 임무로 한 마을에 갔을 때였어.”
항상 투닥투닥하며 싸우고 다녔지만 그래도 마음 한 편으로 항상 의지하던 데카드의 실종 사건 이후 필립은 항상 무언가 우울하고 인생의 재미가 없었다.
기계처럼 집행부로 나와 오늘의 업무를 해치우고 집에 돌아가던 일상을 반복하던 도중 하이론 집행부장이 출장 업무를 주었었다.
명목상으로는 오크 무리의 소탕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공기 좋고 물 좋은데 가서 마음을 정리하고 기분 전환을 하고 오라는 뜻.
필립은 하이론의 배려의 감사 하며 그날 당장 임무를 받은 마을로 떠났다.
“사실 우리 수준에서 오크는 별 위협이 안 되잖아? 그래서 빨리 끝내고 좀 놀고먹다가 집행부에 들어갈 생각이었지.”
필립은 기차를 타고 마을의 도착해 곧장 오크들이 무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산채를 부숴버렸다.
“이제 미션은 클리어했으니까 1주일 정도는 이곳에서 놀고먹으면서 마음을 좀 비우려고 했어.”
마을의 골칫덩이였던 오크를 오자마자 하루도 안돼서 무찔러준 필립에게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그를 대접해주었다.
“그 마을에서 제공해준 숙소가 있었는데, 그곳 주인이.”
“설마 형수님?”
필립이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자 데카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형수님이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었어?”
“뭘 그렇게 놀라냐. 그럴 수도 있지.”
집행부장이 일개 평민과 결혼한다는 사실에 데카드는 놀란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예전에 나랑 임무 갈 때마다 어디 공작가 영애랑 결혼하고 싶다고 노래를…….”
“쉿! 누가 듣겠어!”
거의 책상을 밟고 뛰어넘듯이 데카드에게 온 필립은 그의 끝을 모르고 날뛰려 하는 입을 틀어막았다.
“말 안 할 테니까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됐는데?”
들을수록 흥미진진해지는 필립의 연애 스토리에 데카드는 아예 자리를 잡고 책상 위에 올려진 다과를 뜯으며 완벽한 경청 모드에 들어갔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딱히 별다른 감흥이 없었어.”
아리안은 다른 외지인들에게 방을 내어주는 일을 하고 있었고 필립 또한 그런 손님들 중 한 명이었다.
처음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빗자루로 바닥의 먼지를 쓸고 있었다.
“청소를 하면서 굉장히 밝게 인사를 해주더라, 어서 오세요! 하고.”
“평범하네.”
어느 여관에서나 들을 수 있는 친절한 직원의 인사였다.
“그렇지.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방 키를 받고 내 방으로 올라갔어.”
가장 넓은 방을 무료로 받은 필립은 그곳에서 짐을 풀고 한 일주일 정도 놀러 다닐 생각으로 마을의 명물을 전부 돌아봤다.
자연의 풍경을 즐기면서 우울했던 감정도 내려놓고 슬픔도 자신을 스쳐 가는 바람에 전부 날려버리기 위해서.
“내가 너한테 말한 적 있지? 내 이상형.”
“요리 잘하는 여자?”
“맞아.”
하루 온 종일을 밖에서 보내고 저녁때가 다 돼서야 돌아오면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저녁이 항상 준비돼 있었다.
“분명 차린 게 별로 없었는데 되게 맛있었어.”
작은 마을에서 스테이크를 구워주지는 않았고 산에서 자라는 야채와 나물을 중심으로 만든 저녁이었는데 참 맛있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아리안이 다가와서 묻더라고.”
저녁은 입에 맞으신 가요?
“그래서 나는 너무 맛있다고 입의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지.”
필립의 과도하다고 생각될 만큼의 칭찬에 아리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웠어.”
아리안은 조심스럽게 필립의 앞자리에 앉으며 다행이라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외지인분들께서 제 음식을 칭찬해주신 건 처음이에요.
자극적인 맛에만 길들여진 사람들이 비교적 심심한 맛이 강한 나물이나 그런 것에 만족하기란 쉽지 않았다.
필립은 그저 본인이 아재 입맛이라 그런 음식들도 맛있다고 생각하며 꿀떡꿀떡 입안으로 넘긴 것뿐이었다.
“그럼 요리 실력 때문에 사랑에 빠진 거야?”
“그건 아니지.”
단순히 요리를 취향에 맞게 잘한다고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로 생각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내가 그렇게 6일을 먹고 놀고 하며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 마을로 도적 떼들이 내려왔어.”
“상납금을 바치는 건가?”
“그런 것 같더라고.”
산과 가까이의 위치하고 주변에 커다란 도시가 없는 마을 같은 곳은 도적들의 지배를 받기도 한다.
항상 한 달의 한 번씩 상납금을 바치는 날에 필립이 마을에서 머물렀던 기간과 겹쳤던 것이다.
“그래도 나름 정들은 마을인데 저렇게 핍박받으면서 사는 게 보기가 안 좋았어.”
도적 대장 앞에서 마을 촌장이 무릎을 꿇고 마을 사람들은 집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아리안도 건물 안에서 손을 부들부들 떨며 도적들을 두려워했었다.
“도적들은 30~40명 정도 돼 보였어.”
숫자는 많다 하지만 어차피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들.
필립은 마나룸을 개방하고 문을 열어나가려던 순간 아리안이 그의 손을 턱하고 잡으며 막았다.
“‘아무리 오크를 토벌하셨더라도 저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요!’라고 했지. 내가 지금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해.”
와작 와작-
데카드는 과자를 계속 씹으며 이야기를 들었고 필립은 계속해서 그때의 이야기를 해나갔다.
“내가 그래도 집행관 짬이 있지 숫자 때문에 도적한테 쫄 수는 없었거든.”
필립은 아리안의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서게 하며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을 꺼냈다.
“‘국물이 식기 전까지 돌아오겠습니다.’라고.”
“……최악이야.”
나름 작업 멘트라고 던진 말 같은데 중간도 못 가는 최악의 멘트다.
“그냥 들어! 딴지걸지 말고!”
“알았어.”
필립은 문을 열고 도적떼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심장을 감은 서클이 회전하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심장의 고동도 강해져 갔다.
선두에서는 마을의 촌장이 돈주머니를 건네고 도적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것을 말에서 탄 채로 거칠게 뺏고 있었다.
도적들은 오늘 이 돈으로 먹고 놀 생각에 환호하고 마을 사람들은 겨우 벌어놓은 돈이 사라지자 절망의 한숨과 표정을 지었다.
푸확-!!
오늘 밤새도록 술판을 벌일 생각에 즐거워하던 도적 중 한 명의 웃음이 뚝 하고 끊겼다.
핏물이 사방에 튀기고 근처에 있던 산적들의 옷은 시뻘겋게 물들어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 광경을 본 도적 대장이 필립 쪽으로 말 머리를 돌리며 ‘네놈은 누구냐!’ 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손에 날카로운 바람을 손톱처럼 감았다.
“그때부터는 그냥 전부 죽이고 다녔어.”
마치 호랑이가 적에게 발톱을 휘두르는 것처럼 필립의 손이 허공을 스칠 때마다 질풍의 참격이 도적들을 휩쓸었다.
나름 고철을 두드려서 만든 갑옷을 입고 있다 해도 필립의 바람은 모든 것을 자르고 다녔다.
숫자의 우위가 무색하게 10분도 채 안 지나서 도적들의 수가 절반가량 줄어들었다.
산적 대장은 그렇게 부하들이 참살당하고 있는 틈을 타 눈앞에 보이는 아무 집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리고 집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의 비명이 들려 나왔는데 도적 대장은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 칼을 들이대며 인질로 잡았다.
“설마 그게?”
“아리안이었지.”
도적 대장이 아리안을 붙잡았을 때는 필립이 이미 도적들을 모두 정리하고 난 후였다.
“그때 아리안은 완전히 겁에 질려있었어.”
평생 칼이나 폭력에서 거리가 멀던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자신의 생사가 다른 사람에게 쥐어져 있다는 건 평범한 마을의 처녀가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때 마침 바람이 내 오른쪽에서 불더라.”
“아아, 그럼 쉬웠겠네.”
필립은 손가락을 까딱여서 불어오는 자연의 바람을 자신의 바람으로 만든 후 그대로 도적 대장의 목을 떨어뜨렸다.
툭- 투둑-
아리안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필립이 괜찮냐고 물으면서 다가오자 그녀는 그에게 와락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그 우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어.”
“……우는 모습에 반했다고?”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자신의 오랜 친구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놈이다.
똑똑-
“필립님, 저녁 준비가 끝났습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데카드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벌써 훌쩍 지나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업무도 대충 끝났고 저녁이나 먹자.”
열심히 떠들면서도 계속 업무에 빠져있던 필립이 굳은 허리의 관절을 뚜둑하고 피며 일어났다.
“오오, 집행부장이 주는 저녁은 어떤 걸지 기대가 되네?”
먹다 보니 바닥을 드러낸 과자들의 껍질은 책상 위에 올려놓고 데카드는 필립을 따라 방을 나왔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