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추적>
턱-
벌레같이 꼬물거리며 전진하던 종이를 레오가 손가락으로 쿡 눌렀다.
종이가 직접 닿아있는 손가락을 중심으로 역겨움과 불쾌함이 올라왔지만, 참아냈다.
마수계에는 종이라는 게 없어 원래 종이들이 움직일 수 있는지에 대한 사실은 잘 모르겠지만 이건 나의 주인이 가져온 물건이다.
잘 보관하고 또 지켜야 했다.
레오는 투명한 유리컵을 가져와 그 안의 종이를 가두고 책상 위의 컵을 엎었다.
“욕실이 되게 좋네.”
“저는 마수왕님이 더 좋았어요! 헤헷!”
욕실 바깥으로 같이 나온 데카드와 요르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었다.
“응? 종이를 왜 컵 안에 넣어놨어?”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에 띈 건 책상위에 엎어져 있는 유리컵과 그 안에 있는 종이였다.
“레오가 한 일입니다.”
짹짹이가 보고 있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레오가?”
데카드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반응 없이 책만 보고 있는 레오의 옆으로 가 앉았다.
“종이는 왜 저렇게 둔 거야?”
레오는 책을 덮고 일어나 컵을 들어 올려 종이를 풀어주었다.
스르륵-
그러자 종이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데카드도 움직이는 종이에게 다가갔다.
“이게 움직여서 막았다는 거지?”
끄덕끄덕-
바로 맞췄다는 듯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고 데카드는 종이를 손에 올렸다.
그럼에도 종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 전진해갔다.
“혹시…….”
이번에는 데카드가 제자리에서 방향을 바꿔 가봐도 종이는 계속 한 곳으로 움직이려 했다.
“어딘가로 이끌리고 있어.”
뭐가 이 종이를 끌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도 무언가 강한 인력이 종이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렇게 멀진 않은 것 같은데.”
종이가 살아있는 것처럼 어딘가로 움직이는 건 데카드도 처음 보는 것이라 정확한 거리를 알아낼 순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루비아 안에 있다는 사실은 특정할 수 있었다.
“서쪽.”
종이는 계속 서쪽으로 움직이려 했고 서쪽에 있는 것들을 떠올려보면 오늘 폭발이 일어나고 이 종이를 주웠던 C구역이 서쪽에 있었다.
“짹짹아.”
“네, 주인님.”
데카드는 다시 종이를 컵 안에 넣어두며 말했다.
“까마귀들로 오늘 내가 순찰 돌았던 구역을 감시해줄래?”
“뭘 찾으시려는 겁니까?”
“딱히 뭔 이유는 없고 그냥 감이야, 뭔가가 있을 것 같은.”
“알겠습니다.”
짹짹이는 창문을 열고 팔을 뻗었다.
푸드덕-
그와 동시에 팔에서 까마귀들이 솟아나더니 날갯짓을 하며 데카드가 말한 C구역으로 날아갔다.
저 까마귀들은 짹짹이의 분신 같은 것으로 모든 감각 공유가 가능하다.
그들이 느끼는 모든 것은 짹짹이에게 전달될 것이고 수상한 것이 있다면 곧바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 * *
“오늘치 업무 파일이야.”
이제는 레이첼의 도움 없이 엘리스와 데카드 모두 직접 집행관에게 파일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데카드는 업무 파일을 열어보고 오늘 할 일을 대충 읽은 다음에 덮어버렸다.
“그럼 좀 이따 봐요.”
“그래.”
엘리스가 오늘 할 일을 위해 건물을 나가고 데카드는 맨 위층에 있을 친구를 바라보았다.
“미안한데 필립, 오늘은 할 일이 생겼다.”
[여전히 종이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움직이는 종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내는 게 자신의 업무다.
앞으로 평생을 살아갈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딱 봐도 냄새가 구린 짓을 꾸미는 걸 데카드는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까마귀들은?’
[수상한 건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티이라! 그놈들 보면 때려준다!]
[이 고오른이 허리를 접어버리지요!]
마수들도 이런 불쾌한 기운을 내는 것들이 모여 있다는 말에 전부 투지를 활활 불태웠다.
“안내해봐라, 기분 나쁜 종이야.”
처음 주웠을 때는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어도 지금 자신의 손 위에서 꼬물거리는 종이는 확실히 기분나빴다.
데카드는 건물을 나와 종이가 가려는 방향을 그대로 따라갔다.
종이는 단 한 번의 방향도 틀지 않고 끊임없이 서쪽으로 움직였다.
“여기가 C구역인데.”
의심이 가는 곳으로 와도 종이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서쪽을 향했다.
[꽤나 오래 걸은 것 같은데 종이는 계속 앞으로 가는군요.]
루비아가 굉장히 넓은 도시라고는 하나 정말 서쪽 끝까지 갈 생각인지 종이는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 루비아 바깥까지 나가겠네.”
데카드가 잤던 여관에서 지금 걸어가고 있는 곳까지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이 종이를 끌어당기는 힘은 똑같이 작용했다.
어지간한 마공학 기계들도 이렇게 거리가 멀면 신호가 끊어지기 마련인데 이 힘은 그런 상식들을 넘어서고 있다.
그렇게 손에 있는 종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따라가고 있을 때 종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우우웅-
종이가 원래 가던 방향으로 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왜 이러지?”
[우웁! 마수왕님! 토할 것 같아요!]
[어제 먹었던 고기를 토할 순 없다! 불굴의 인내력으로 참으리라!]
[마수왕님! 속이 불편하다!]
[…….]
종이의 변화에 마수들의 낯빛이 급격하게 썩어가며 토라도 할 듯 우욱거리기 시작했다.
‘짹짹아, 어떻게 생각해?’
[매우 불안정해 보인단 건…… 으윽, 알겠습니다.]
짹짹이도 참을 수 없다는 듯 헛구역질을 하며 종이를 바라봤다.
피슈웅-!
그러던 중 갑자기 움직임을 딱 멈춘 종이는 데카드의 손을 박차고 떠올라 어딘가로 끌려가듯 날아갔다.
“이게 말이 돼?”
워낙 빠르게 도망치는 터라 마법을 쓸 타이밍도 없었다.
[이제야 속이 편안해지는군요!]
종이가 멀어지자 마수들은 이제야 괜찮아 지는 듯 안정을 되찾아갔다.
“아마 또 불편해질 거야.”
데카드는 종이가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잘 가던 종이가 갑자기 발작하며 하늘로 솟구친 건 아마도 종이를 부르는 어떤 힘이 근처에 있기 때문일 거다.
“얼마 안 남았어.”
슬슬 점심시간도 다가오는데 그 힘이 뭐든 빨리 부숴버리고 밥이나 먹어야겠다.
데카드는 일직선으로 날아간 종이에 비해 건물들을 비켜서 가야 했고 그러다 보니 확실히 어떤 건물인지 헷갈릴 뻔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저곳 같군요.]
마수들이 불쾌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곳을 찾으면 그곳이 종이가 움직인 방향일 테니까.
그래서 도착한 장소는 버려진 폐공장.
“짹짹아.”
[알겠습니다.]
낮이라 사용에 제약이 붙긴 했어도 어두운 폐공장 안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코트에서 흘러나오는 그림자가 데카드를 덮으며 존재감을 지워나갔다.
‘그림자 밟기.’
열려있는 창문으로 그림자 밟기를 사용해 거의 무음으로 공장의 안까지 들어온 데카드는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살폈다.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옛날에는 활발히 돌아갔던 기계들이 먼지가 쌓인 채로 덩그러니 놓인 공장이었다.
그래도 마수들이 계속 불쾌함을 느끼고 있으니 이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건 틀림없다.
공장 바닥으로 그림자를 이용해 소리 없이 내려왔고 데카드는 공장 안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세이칼처럼 지하에 무언갈 만들어 뒀을 거야.’
데카드는 그 지하에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찾고 있는 것이다.
‘페일이 썼던 방법을 써보자.’
슬레이에서 세이칼을 찾을 때 페일은 건물 곳곳을 물로 훑어 바닥이나 벽에 비밀 공간이 없는지 살폈었다.
“소환.”
카가각- 카가가-
아무래도 아쿠아 돌핀 한 마리로는 이 공장을 다 살필 수 없어 최소 두 마리로 훑어야 한다.
스르륵-
아쿠아 돌핀들이 데카드의 명령대로 사방에 물을 퍼뜨리며 어딘가 빈틈이 없는지 확인해 나갔다.
그렇게 공장의 절반을 물로 쓸고 있었을 때 돌핀이 신호를 보내왔다.
카각-
퍼져가던 물이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곳.
데카드는 그곳으로 가 어디 문을 달았을 만한 이음새가 없는지 만져보았다.
‘여기다.’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어도 손의 감각은 속일 수 없다.
아주 작은 경첩이 구석에 박혀 있는 것이 데카드에게 만져졌다.
끼익-
지하로 가는 문이 열리고 얼마나 환기가 안 되고 있는 건지 습한 공기가 훅 올라왔다.
[불쾌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져요!]
[이곳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주인님이 먼저 들어가시기 전에 까마귀를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에 침입자를 대비한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 짹짹이가 까마귀를 이용하자는 의견을 냈다.
‘좋아.’
코트에서 작은 까마귀 한 마리가 나와 지하로 내려갔다.
짹짹이는 까마귀와 시야를 공유하며 안에 수상한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까마귀는 복도를 통과하며 잘 가나 싶더니 갑자기 픽하고 쓰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까마귀가 중간에서 사라진 걸 보니 항마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항마력이 소재가 아니라 결계 형식으로 돼 있나 보군.’
항마력의 힘을 지닌 광석을 응용하면 결계 형식으로 그 안에 들어온 자는 마법을 쓰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마법을 쓰지 못한다면 결계 안에서의 소환도 불가능하고 짹짹이를 이용한 은신 능력도 봉인 당해버린다.
마법이 아닌 개인의 무력을 사용해 뚫는 방법 또한 떠올랐지만, 가능성이 낮았다.
‘결계가 있는 곳까지만 가보자.’
계단을 내려가 까마귀가 쓰러졌던 곳까지 데카드는 아무런 방해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직접 눈으로 본 복도는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아 어두컴컴했고 일직선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여깁니다.]
‘느껴져.’
굳이 짹짹이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마법사로 살아온 지금까지의 인생이 더 앞으로 가면 위험하다고 알려주었다.
‘결계라고 하면 그걸 만드는 표식 같은 게 있을 텐데.’
하지만 바닥이나, 천장, 벽면을 눈 씻고 찾아보아도 표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흔적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데도 데카드는 오히려 미소 지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는 어느 집단하고 행동하는 수법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흑마법사들.’
악마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바쳐 금기된 마법이나 악마의 마법, 통칭 흑마법을 쓰는 자들로 전 세계의 국가들이 범죄자로 지정하고 뿌리 뽑으려 하는 존재들이다.
일반 마법사들이 결계를 만들려고 하면 아까 데카드가 찾으려고 했던 표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흑마법사는 표식이 필요 없어 편리하게 결계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새끼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데카드가 집행관이었을 때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한 나라의 수도, 심지어 집행부의 본부가 있는 루비아에 흑마법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니.
“쯧.”
데카드는 더 이상 앞으로 가지 않고 결계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마법을 시전했다.
“소환.”
찌지직-
일전에 나온 적 있던 나이트 벳들이 소환되자 벽면이나 천장에 숨어 매복을 지시했다.
[이대로 물러나시는 겁니까?]
‘굳이 내가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흑마법사들이야 당장 안면을 부수고 다진 고기로 만들어주고 싶지만, 지금 자신이 해치워서야 뒤처리가 난감했다.
‘집행관들이 알아서 할 거야.’
이런 건 힘 좋은 후배들에게 맡기면 알아서 잘 해놓을 것이다.
나름 대비도 해 놓았고.
[박쥐들은 왜 넣어두신 거예요?]
‘함정이지.’
만약 흑마법사들이 집행관을 피해 이곳으로 빠져나간다면 나이트 벳들이 기습 공격을 할 것이다.
만약의 경우이니 웬만하면 쓰이지 않는 게 가장 베스트다.
그대로 비밀 통로를 벗어나 공장 안으로 돌아온 데카드는 한 번 더 소환을 했다.
“소환.”
키긱-
강한 화력과 넓은 방사력을 가진 플레어 라쿤이 먼지투성이 기계 위로 소환됐다.
“여기다 불태워.”
혹시 안에 있을 흑마법사들과 본부에서 커피나 마시며 쉬고 있을 집행관들을 부르기 위해 데카드는 작은 신호를 주기로 했다.
라쿤의 꼬리가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것이 불타오르며 삽시간에 공장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펄럭-
다시 들어왔던 창문으로 짹짹이의 날개를 펼쳐 날아간 데카드는 공장이 허물어질 것 같이 타올라도 반응이 없는 비밀 입구를 보았다.
콰아앙-!
결국 공장의 한쪽 물건들이 쓰러져 입구를 막아버리고 나서야 데카드는 공장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화르르르-
공장은 기름을 부은 건초처럼 남김없이 타올랐다.
왠지 눈앞에서 흑마법사를 놓친 기분이 들어 데카드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있을 때 공장의 입구가 터져 나왔다.
콰아앙-!!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