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귀찮은 업무들
데카드에게 친근한 듯 접근한 엘리스한테 진한 살기를 내뿜은 요르의 눈은 뱀의 그것처럼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친구야 친구. 오랜만에 봤는데 이렇게 화낼 거야?”
데카드가 뒤를 파고들어 두 팔로 허리를 감싸 안자 요르는 여름날의 아이스크림과 같은 표정으로 녹아내렸다.
“하 절대 아낼게요…….”
그저 이 순간이 조금이라도 더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요르는 오랜만에 느끼는 데카드의 체온에 몸을 파묻으며 풀린 혀로 말했다.
“짹짹이, 마수왕님은 잘 보좌해 드렸겠지?”
“마수계에서 나가기 전에 말했을 터, 원래도 내가 보좌해 드렸으니 다름 없을 거라고.”
고오른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내자 짹짹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여기가 인간계! 티이라! 처음 와 본다!”
이들을 소환할만한 인간 소환사는 필수적으로 9서클의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설령 9서클까지 인간이 도달한다 하더라도 그게 마수 소환사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4마리의 지배자급 마수들은 마수계가 생겨난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간계 구경은 단 한 번도 못해본 것이다.
“엄청 좋지 않아?”
데카드는 짹짹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인간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방의 창문을 모두 활짝 열었다.
“와아!”
분명 밤인데도 환한 대낮같이 밝은 바깥에 티이라가 탄성을 내지르며 창문으로 달려갔고 짹짹이를 제외한 나머지 마수들도 창문으로 다가갔다.
“여기가 마수왕님의 고향.”
마치 하늘에 떠있는 별들이 바닥으로 내려온 듯 온 거리가 눈 부셨다.
고오른은 매일 풀냄새나 물냄새를 맡다가 코를 자극하는 여러 가지 냄새에 신기한 듯 계속 킁킁거렸다.
“이곳도 넓다!”
마수계도 높은 곳에서 보면 광활한 산이나 드넓은 바다가 매력적이지만 인간계도 만만치 않게 넓은 곳이다.
“…….”
평소 무뚝뚝한 레오도 퍽 마음에 드는지 인간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름답지?”
처음 보는 세계를 하나라도 놓칠라 열심히 관찰하는 마수들의 뒤에 데카드가 다가왔다.
“왜 마수왕님이 계속 돌아가고 싶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고오른의 말에 다른 마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고향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돌아가고 싶어지리라.
“주인님, 밤이 늦었으니 이제 그만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
마수들과 함께 있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를 지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같이 자자!”
마수계에서는 심심치 않게 모두들 모여 바닥에 이부자리를 펴고 잤었다.
하지만 지금은 1인실에 침대도 당연히 1인용이라 6명이 눕기에는 부족했다.
“침대를 옆으로 밀고…… 위에 있던 이불을 밑에 깔면…….”
바닥에 한기를 그럭저럭 밑에 있는 이불이 막아줄 테니 6명이 잘만한 공간이 생겨났다.
“오랜만에 하는 마수왕님과의 동침……!”
요르가 꼬물거리며 데카드의 옆으로 왔고 오른쪽에는 언제 왔는지 레오가 꼭 붙어 있었다.
“평화롭네.”
갑자기 사람들이 확 늘어서 정신없고 시끄러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편안함이 느껴졌다.
“안녕히 주무세요 마수왕님.”
“마수왕님! 잘 자라!”
“안녕히 주무십쇼!”
“…….”
“편안한 밤 보내시길.”
마수들의 밤 인사를 들으며 데카드는 그 어느 때보다 기분 좋게 잠 들었다.
* * *
“데카드님,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아침 일찍 일어나 집행부로 가는 길.
평소와 다르게 싱글벙글 웃는 데카드를 보고 엘리스가 물었다.
“그래?”
“네, 아까 만날 때부터 항상 웃으시더라고요.”
엘리스가 본 데카드는 자주 웃는 편이 아니었는데 유난히 오늘따라 즐거워 보였다.
[마수왕님에게 말 걸지 마! 암컷!]
요르는 엘리스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데카드의 안에서 이를 갈았다.
요르 말고도 나머지 마수들 또한 데카드의 안에 있었는데 마나로 이루어진 육체이기에 주인인 데카드에게 들어올 수 있었다.
[이곳이 인간계! 이 고오른은 심장이 뛰는군요!]
[인간계 냄새! 향긋하다!]
[…….]
질투로 불타오르는 요르를 빼면 다른 마수들은 인간계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데카드가 보는 것, 듣는 것 등 모든 오감을 마수들 또한 느낄 수 있기에 그들은 생생한 인간계 체험이 가능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마수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가능하지만, 강에 내 논 아이 같아 설마 사고라도 칠까 안심이 되지 않았고.
마수들도 데카드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해 이 방법을 골랐다.
집행부에서 가까운 여관을 골랐기에 조금만 걸어도 건물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데카드는 엘리스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아마 집행관들이나 다른 전속 용병들이 시비를 많이 걸 거야.”
집행관들은 권력으로나 실력으로나 용병들이 자신들의 아래라고 생각하기에 의미 없는 시비를 걸고.
전속 용병들은 꼴에 선배라는 텃세를 부리며 얼굴도 눈에 띄게 아름다운 엘리스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최선의 방법은 무시하는 거야.”
뭐라 말하고 위협하던 집행관이라면 모를까 전속 용병들에게 엘리스가 상처 입지는 않을 것이다.
“알겠어요.”
엘리스는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덜컹-
집행부의 문고리를 열고 들어가자 오늘도 역시 책상 앞에 범죄자들을 앉히고 취조하는 집행관들이 있었다.
“너희구나? 새로 왔다는 전속 용병들이.”
데카드와 엘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옆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어떤 여자가 나왔다.
편안함과 실리를 챙긴 옷으로 봐서 같은 전속 용병 같았고 허리에는 검을 찬 채 풍기는 모습으로 보아 이 일을 한 지 오래된 것 같았다.
“맞습니다.”
데카드의 대답에 여자는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레이첼이라고 해. 오늘 너희에게 일을 가르쳐줄 사람이지.”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한 번씩 악수를 마치고 레이첼은 들고 있는 커피를 전부 들이켠 후, 컵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따라와라, 새싹들아.”
새싹?
1000년은 족히 넘게 살아온 데카드로선 심히 거슬리는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새싹이라니! 마수왕님의 물건은 세계수야! 이 암컷아!]
[……그런 뜻이 아니다, 요르.]
데카드의 안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나고 있을 때 레이첼과 데카드, 엘리스는 한 집행관 앞에 도착했다.
“집행관님, 오늘 할당량 받으러 왔습니다.”
“신입 애들 것도 주면 되는 거지?”
“그렇습니다.”
외관상의 나이로는 레이첼보다 이 집행관이 더 어려 보였음에도 집행관은 편하게 하대를 했다.
집행관은 파일 하나를 꺼내 레이첼을 쳐다도 보지 않고 한 손으로 줘도 레이첼은 공손하게 고개까지 숙이며 받았다.
파일을 받고 그 집행관에게서 멀어지자 레이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렇게 집행관들이 싸가지 없이 굴어도 절대 반발하거나 화내선 안 돼.”
보통 자신 앞에 있는 둘처럼 젊고 혈기 넘치는 용병들이 저런 모욕을 참지 못하고 대드는데 그런 이들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세월의 경험이 다르다고는 하나 마법사라는 건 그따위 격차는 손쉽게 좁혀버리고 용병들을 요리해버린다.
“알겠습니다.”
“네.”
“어쨌든 집행관들에게 일을 받으면 그게 오늘 하루 치 업무야.”
레이첼은 파일 안에 있는 종이들을 데카드와 엘리스에게 나눠주었다.
“어려운 업무는 없어. 상점가 경호나 순찰을 하거나 하는 정도지.”
집행관들의 주 업무라 할 수 있는 몬스터 소탕이나 흑마법사 소탕은 전속 용병들이 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고.
그들이 굳이 힘을 빼지 않아도 되는 잡업무들이 용병들의 소관이었다.
“흐음…….”
예전 데카드가 집행관 일을 할 때도 용병들에게 업무가 담긴 파일을 줘 본 적이 있었지만 어떤 업무인지는 딱히 관심 없어 펴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일의 수준이 좀 떨어지기는 했다.
업무를 보니 오전에 집행부 건물 청소를 하고 오후에는 순찰을 돌아야 했다.
[이런 잡일을 마수왕님께 시킨 겁니까? 한 세계의 왕에게 감히!]
안에 있던 고오른이 노발대발하며 콧김을 뿜었다.
옆에 있는 엘리스의 업무를 슬쩍 보니 오전, 오후 모두 레이첼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는 것으로 적혀있었다.
‘필립 이 새끼가.’
엘리스에게는 처음 온 것을 배려해 편하게 하루를 끝마칠 수 있도록 하고.
데카드에게는 청소나 순찰 같은 지루하고 귀찮은 일을 시켰다.
“순찰이라고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거기 쓰여 있는 구역을 퇴근 시간까지 뺑뺑이만 돌면 되니까.”
레이첼도 처음 온 용병에게 곧바로 순찰을 시키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곧바로 시작하도록 할까? 데카드는 적힌 대로 청소를 시작해주고 엘리스는 나를 따라와.”
레이첼이 자신의 업무를 보기 위해 어딘가로 걸어가고 엘리스도 그녀를 조금씩 따라가면서 뒤에 있는 데카드를 쳐다보았다.
“걱정 말고 갔다 와.”
데카드가 이렇게 말해주고 나서야 안심이 되는 듯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갔다.
“하아…… 청소라니.”
집행부의 건물은 지하까지 합쳐서 7층.
지하는 청소구역에 포함되지 않아 빼버린다 해도 5층 건물을 쓸고 닦게 생겼다.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티이라! 처음 해본다! 청소!]
[청소하면 또 이 고오른이 아니겠습니까!]
[…….]
‘말이라도 고맙다.’
힘들긴 하겠지만, 마수들이 있기에 외롭진 않을 것이다.
“얼른 시작하자.”
구석에 박혀있는 청소도구들을 전부 가져온 데카드는 10개나 되는 빗자루와 대걸레, 쓰레받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5층짜리 건물을 오전 안에 청소하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으나 데카드는 아니었다.
“소환사의 힘을 보여주지.”
마수 소환사는 혼자인 것처럼 보이나 혼자가 아니다.
아마 데카드처럼 이 격언이 어울리는 존재가 없을 것이다.
“소환!”
집행부 건물 안에서 10개의 마법진들이 꽃밭에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개화했다.
끼끽-!
영특하고 체력도 좋은 우드 몽키 10마리가 동시 소환됐다.
갑작스러운 마나의 변동에 집행관들의 시선이 전부 데카드에게로 꽂혔다.
하지만 데카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우드 몽키들에게 명령했다.
“절반은 빗자루로 먼지를 쓸고 나머지 절반은 물걸레로 빗자루가 지나간 부분을 닦아!”
끼끼끽-!! 우끼-!!
우드 몽키들이 전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저마다 청소도구들을 잡고 1층부터 청소를 시작했다.
“안정적이야.”
우드 몽키가 1서클의 기본적인 마수라지만 그래도 10마리가 계속해서 빼가는 마나의 양은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데카드는 평소 무리했을 때 느끼던 두통은커녕 어지럼증조차 없이 편안하기만 했다.
그 이유는 지배자급 마수들이 데카드에게 들어옴으로써 그들의 마나가 데카드의 마나가 된 것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마나룸이 데카드의 것을 포함해 5개로 늘어난 기분이었다.
“저 마수들 자네가 소환한 건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집행관이 이제 어디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쉬려 했던 데카드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그런데요?”
옷은 좋은 걸 입었다고는 하나 얼굴을 보아하니 집행부의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풋내기 집행관 같았다.
“신성한 집행부 안에서 저렇게 마수들을 풀어놓으면 어떡하나? 빨리 집어넣게.”
“조용하기만 한데요.”
집행부 1층을 열심히 쓸고 닦고 있는 우드 몽키들에게서 나는 소음이란 빗자루질 소리밖에 없었다.
“어디서 말대답이야? 집어넣으라고 했으면 집어넣어.”
딱 봐도 온지 얼마 안돼서 선배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만만해 보이는 용병 하나 잡아서 기분 풀이하러 온 놈이다.
집행관이라고는 하나 신입이라면 먹이사슬의 최하위.
집행부 건물 안에서 자신보다 아래 있는 이들은 용병들밖에 없으니 데카드에게 시비를 걸러 온 것이다.
그래서 데카드는 이 까마득한 후배가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최대한 또박또박 천천히 말해주었다.
“뒤지기 싫으면 꺼져.”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