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사전 준비
“전속 용병이 되는 거야 원래라면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나의 도움이 있다면 어렵지 않을 거야.”
필립은 창문을 닫고 서랍들 열어 서류 한 장을 찾기 시작했다.
“여깄다.”
그가 책상 위로 올린 서류는 용병 전속 계약서.
“내가 알기엔 어느 정도의 용병 등급을 넘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아, 용병 길드에서 시험을 치러서 등급을 책정 받는 건데 최소 B급 이상이야.”
용병 업계에서 마법사야 원체 보기 드문 직업이다 보니 조금만 열심히 해도 높은 등급을 책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용병 시험에서 굳이 힘을 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턱걸이로 B급을 맞아 버리면 유물을 찾으러 갈 때 다른 이들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신분증도 필요했고, 최소 A급은 받는다.’
용병 등급은 최하가 F급에서부터 최상위인 S급까지 다양한데 데카드는 A급을 목표로 했다.
또 용병이 되는 순간 길드에서 발급해주는 용병증이 앞으로 데카드의 신분증이 될 텐데 그곳에 낮은 등급이 적혀 있으면 마수왕 체면이 안 선다.
“그런데 너야 괜찮다고 쳐도 옆에 있는 아가씨는 좀 힘들지 않겠냐?”
거대한 괴력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는 마나도 없었으며 검을 잘 다룰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너는 엘리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그, 그 정돈 아니에요.”
불쑥 들어온 칭찬에 엘리스의 귀가 마를 날 없이 붉어졌다.
“이 아가씨가?”
필립은 그래도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치도 없고 참으로 멍청한 친구의 안목에 데카드는 아까 유치장에서 본 마법 같은 일을 떠올렸다.
“엘리스, 이 수갑 한번 풀어볼래?”
털컥-
데카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양 손목을 옥죄고 있던 수갑이 힘을 잃고 떨어졌다.
“…….”
마법사가 마법 같은 일을 발견했을 때 짓는 표정은 데카드나 필립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자물쇠 따기로는 어렵지 않나? 용병 시험은 무력을 주로 검사하니까.”
자물쇠 따기로 지금 엘리스가 머리카락을 이용해 봉마 수갑을 푼 것과 비교하는 것이 얼토당토않기는 해도 필립의 말이 맞았다.
“엘리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면 너는 까무러칠 거다.”
범죄의 현장이나 범죄자들을 매일 같이 만나는 집행관도 갈까마귀 암살단의 소속원들은 만나기가 아주 드물었다.
심지어 암살단에서 한 무리의 조장까지 했었던 엘리스는 사람들이 활보하고 다니는 대낮의 상점가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사람 한 명을 암살하고 빠져나올 수 있다.
“이 아가씨가 어떤 사람이었는데?”
“그건 프라이버시지.”
본인이 말하지 않는 이상 데카드가 이곳저곳 떠벌리고 다닐 이유가 없다.
“그럼 용병증 받고 온다.”
“천천히 해도 돼,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아, 그리고 이거 가지고 가라.”
필립이 준 것은 뭔지 안 봐도 알 것 같은 종이 한 장이었고 이것이 데카드와 엘리스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고맙다.”
데카드는 필립이 준 종이를 받아들고 1층으로 다시 내려갔다.
“어어, 왔냐? 그럼 다시 심문을…….”
“이거나 받아.”
종이를 던져주고 데카드는 다시 집행부 정문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혐의없음……?”
종이에는 데카드가 지금 가지고 있는 범죄 의혹들이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문장과 함께 집행부장인 필립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로서 깨끗한 시민이 된 데카드는 집행부 건물을 나왔다.
“도시에서 돈 냄새가 나는 곳은 아마 이곳 뿐 일 거야.”
건물 밖에서 숨 한 번 들이마셨을 뿐인데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연한 돈 냄새가 공기 중에 있었다.
돈이면 거의 다 되는 곳이라 그런가 공기 중 냄새부터가 특별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이 진정한 주인님의 고향이군요.]
데카드가 루비아의 시내를 걸으면서 짹짹이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건물을 보게 되었다.
뒤에서 졸졸 데카드를 쫓아오는 엘리스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 처음 보는지 방금 막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그렇게 신기해?”
그 모습이 귀여워 엘리스에게 묻자 그녀는 퍼뜩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저, 저도 모르게 도주 경로를 보고 있었어요…….”
“……그렇구나.”
이런 자들에게 쫓기는 암살 대상이 데카드는 쓸데없이 불쌍해졌다.
“일단 용병 길드 전에 은행을 먼저 가자.”
루비아 은행.
루비아에 들어오고 나가는 돈은 모두 이곳을 거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돈들이 오고 가는 거대 은행이다.
보관하고 있는 돈들도 막대하기에 이름 좀 날렸다 하는 도둑들의 목표가 되기도 하지만 그들 모두 끝은 좋지 않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막대한 양의 백금화를 하나하나 현금으로 낼 수는 없기에 체크카드를 만들어두어야 편리할 것이다.
은행의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자 공기 중 돈 냄새의 원인은 이곳이었다는 게 단숨에 밝혀졌다.
진한 돈 냄새를 뚫고 번호표를 뽑자 수많은 은행 직원들이 자리 잡은 루비아 은행에서 금방 데카드의 차례가 왔다.
엘리스는 또다시 은행 건물을 두리번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갔고 데카드는 의자에 앉았다.
“어떤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체크카드 두 개를 만들려고요.”
하나는 데카드 자신이 쓰고 또 다른 하나는 엘리스에게 주기 위함이었다.
“알겠습니다 손님, 그러면 따로 계좌가 있으십니까?”
“새로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쓰던 체크카드는 정지당했고 이왕 새로 만드는 거 계좌도 새로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계좌는 저희가 발급해 드릴 거고 비밀번호를 여기 앞에 적어주십쇼.”
“마나로 하겠습니다.”
“그럼 이 기계에 엄지손가락을 올려주시고 마나를 흘려주세요.”
마법사들은 개인마다 전부 다 다른 마나를 이용해 이것을 계좌의 비밀번호로 쓴다.
데카드의 마나가 기계를 통해 흘러가고 이제 비밀번호의 설정도 끝났으니 직원은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 작성해주시는 동안 원금을 주시면 제가 계좌에 넣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머니 안에 든 동전 한 개만 카드에 넣어주시고 나머지는 전부 다른 카드에 넣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데카드는 백금화가 들은 아공간 주머니를 건넸고 은행 직원은 그것을 받아들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크큭, 아마 놀라서 쓰러질 거다.”
은행 직원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색깔의 돈을 보았겠지만 저렇게 찬란히 빛나는 백금화는 거의 본적이 없을 테니까.
“히익……!!”
데카드의 예상대로 곧장 저 멀리서 누군가 헛바람을 폐로 가득 집어넣은 소리가 들렸다.
서류를 다 작성했을 때 쯤 은행 직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체크 카드 두 개를 내밀었다.
“한 개는 엘리스 거야.”
“가, 감사합니다.”
남에게 선물을 받아본 경험이 전무한 엘리스는 자신의 손에 들린 직사각형 카드를 손에 꼬옥 쥐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저희 은행에게 맡겨주신 분들에게는 사은품이 있는데 받으시겠습니까?”
“어떤 사은품인데요?”
은행 직원은 책상에서 잘 포장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지갑인데 방수처리도 되어있고 아주 좋은 겁니다. 또 이렇게 두 분이시니 두 개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원래 쓰던 지갑을 모타운에서 팔아버려 지갑이 필요했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포장을 뜯어 엘리스에게도 주었고 데카드는 자신의 체크 카드를 잘 보관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제 자리를 일어나려는 순간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 한 명이 데카드에게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노인이 건네는 악수를 받아들이자 그는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루비아 은행의 은행장인 리카르도 데인이라고 합니다.”
“데카드 입니다.”
“먼저 저희 은행에 이렇게나 많은 돈을 맡겨 주셨다는 거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직접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데카드가 겉모습으로는 이 노인보다 훨씬 어렸음에도 그는 데카드에게 극존칭을 썼다.
지금 데카드가 맡긴 돈의 액수를 보면 확실히 그럴만 하다.
“최고의 은행인데 당연하죠.”
“허헛, 칭찬에 이 늙은이가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럼 앞으로도 좋은 인연으로 저희 은행에 찾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데카드는 용건도 끝났고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 지어 자리를 떠났다.
“마음에 들어?”
아까서부터 자꾸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엘리스는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였다.
“누구한테 선물을 받아본 게 처음이라…….”
엘리스는 태어나고 걸음마를 떼던 순간부터 암살자로 교육받아왔으며 그 순간부터 곁에 있는 건 피와 시체였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는 고사하고 선의가 담긴 무언가를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엘리스는 지금 이 감정이 신기하고 이런 걸 느끼게 해준 데카드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그래?”
데카드는 용병 시험보다 더 중요한 게 방금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지금 그 옷 불편하지 않아?”
“조금 그렇긴 해요.”
암살자에게는 활동성이 높은 옷이 기본이었기에 까슬까슬한 긴 치마는 엘리스에게 불편했다.
“옷부터 바꾸자.”
이곳이 어디인가.
뭐든 살 수 있고 뭐든 팔 수 있는 루비아가 아니겠는가.
조금만 걸어가도 옷 가게는 넘치도록 있다.
하지만 너무 고급스러운 곳에 가면 엘리스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 옷가게에서는 암살자가 입는 옷보단 대부분 귀족들이 파티에서 입을 법한 드레스를 팔기 때문이다.
전투를 주로 하는 이들을 위한 옷 가게는 따로 존재하는 법.
데카드는 그중에서도 꽤나 괜찮은 곳을 알고 있다.
* * *
조금씩 되살아나는 기억으로 얼추 길을 찾아서 오자 데카드가 기억하던 옷 가게는 아직 안 망하고 건재했다.
“어서 오세요.”
이곳은 따로 대장간처럼 갑옷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질긴 가죽옷과 편리, 활동성을 강조한 전투용 옷들을 취급하는 곳이다.
“마음에 드는 거 골라봐.”
“제, 제 마음대로요?”
“그럼!”
언젠가 돈이 많이 생겼을 때 해보고 싶은 로망이 아니겠는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가격이 얼마든 쿨하게 질러버리는 것.
엘리스는 장난감 가게에 온 어린아이처럼 입을 헤 벌리며 옷들을 살펴보았지만, 그 눈은 예사롭지 않았다.
정말 자신에게 맞고 암살에 유용한 옷을 빠르게 고르고 있었다.
“저는 이렇게면 될 것 같아요.”
“아가씨가 보는 눈이 있구만.”
계산대에 있던 점원은 엘리스가 고른 옷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의는 검정색 가죽 타이즈에다가 신발은 밑창이 두꺼운 부츠를 신었고 상의는 검은색과 어두운 남색이 잘 조합된 옷이었다.
뒤에 있는 얼굴을 가려줄 후드까지 챙겨 입자 촌마을 처녀에서 정말 밤의 공포이자 사신이라는 갈까마귀 암살단으로 변신이 완료됐다.
“얼마에요?”
“원래 2골드인데 아가씨가 옷이 너무 잘 어울려서 1골드 80실버만 받을게.”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온 엘리스는 정말 그 옷이 맞춤인 것처럼 그 특유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고 계산을 끝마친 후 둘은 가게를 나왔다.
“흐음…… 뭔가 부족한데…….”
“네?”
암살자의 포스는 지금도 물론 어마무시했지만 어딘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아! 뭔지 알았어!”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