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연습게임
“뭐……?”
지금 자신이 들은 소리가 정확한 게 맞을까.
혹시 서클을 올림으로써 나타난 후유증으로 환청을 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옆에 있는 짹짹이를 봐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약간의 경계가 담긴 눈빛을 페일에게 보낼 뿐이었다.
“탕도 넓은데 좁진 않을 거다.”
확실히 페일의 말대로 탕은 사람 10명이 들어가도 남을 만큼 커다랬다.
은신처는 1인용으로 만들었으면서 목욕탕은 왜 이리 크게 만든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두 명이 함께 쓰기에는 충분했다.
“그게 문제는 아니지 않나?”
탕이 넓고 좁고를 떠나서 완전히 모르는 사이라 할 수는 없어도 동료라는 것을 빼면 완벽한 타인인 데카드와 페일이 혼욕을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엘프들의 마을에서는 남녀가 가리지 않고 목욕탕에 들어간다.”
“아아, 그래?”
엘프들의 문화가 그렇고 그곳에서 나고 자란 페일이라면 혼자 평온한 얼굴인 게 그럴만하다.
“어차피 나는 너의 알몸을 다 보았으니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
로바드의 은신처에서 데카드가 2서클에 오르고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서 샤워를 마쳤을 때 그때도 뒤에 페일이 있었다.
의도치 않게 보여준 알몸이지만 페일이 알고 있는 것은 맞았다.
“그건 맞지.”
“그러니까 빨리하고 나가자.”
페일이 뒤로 돌아 묶어뒀던 푸른 머리칼을 풀어서 내리고 외투부터 하나둘 벗어가기 시작했다.
데카드도 로브의 단추를 풀어가고는 있었지만 몇 번째 단추를 푸는 건지도 모를 만큼 정신과 시선이 페일에게 집중돼 있었고 그녀는 이제 상의를 전부 열어젖히며 천천히 벗었다.
투명한 호수의 색깔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은 머리칼에 대비되는 하얀 살결은 겨울의 첫눈이 내린 것처럼 깨끗했다.
“너무 보지는 말아라.”
“크흠…….”
페일이 묙욕탕 구석에 비치된 옷걸이에 옷을 걸고 슬쩍 뒤돌면서 하는 일침에 데카드가 정신을 차리며 자신도 마저 옷을 벗어나갔다.
‘정신 차려야지.’
데카드는 신경 쓰지 않으리라 하고 힘겹게 몸을 돌려 페일을 등졌지만, 정신력이나 지금까지 쌓아온 세월에 상관없이 남자라면 계속 눈이 뒤로 가는 걸 멈출 수 없다.
하지만 데카드 자신은 1000년 동안 수만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얻은 강철 같은 정신력으로 참아내었고 걸려 있는 수건을 허리에 두른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탈의를 마쳤다.
“후우…….”
“물이 조금 차갑군.”
당연히 자신처럼 수건을 둘렀겠지라는 생각에 데카드는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았고 그곳에는 당연한 듯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페일이 물 온도를 체크 중이었다.
“…….”
오늘따라 침묵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숨이 턱 막혀서 뭔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뒤돌아 있는 페일의 모습은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몸의 비율이 누가 짜준 것 마냥 완벽했고 육체의 단련도 쉬지 않는건지 등으로 조금씩 드러나는 근육들이 아름다웠다.
“본래 목욕탕이라면 물이 뜨거워야하거늘. 그렇지 않나?”
페일이 말을 하면서 살짝 앞으로 돌아 데카드를 바라봤다.
그러면서 드러난 그녀의 유방은 옷이 그 본래의 모습을 많이 감추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 그렇지.”
겨우 돌아간 뇌가 대답했고 페일은 손에 묻은 물을 털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불속성 마법을 쓸 줄 아는 게 없다. 그대가 해줄 수 있겠나?”
이제 완벽히 데카드쪽으로 몸을 돌린 페일에 데카드는 그곳으로 눈이 가는 것을 멈추려 시선을 내려도 더욱 위험한 것이 있어 다시 위쪽으로 올렸다.
“왜 그렇게 부끄러워 하는건지 모르겠군.”
페일이 스스럼없이 데카드의 코앞까지 걸어왔다.
“인간의 문화에는 이런 게 없나?”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 남녀가 같이 목욕을 하는 경우는 결혼한 사이이거나 서로 매우 친한 막연한 사이였다.
“이렇게 모르는 사람끼리 하지는 않지.”
“그대와 내가 모르는 사람인가?”
이렇게 물어보시면 또 할 말이 없어진다.
“책으로 읽은 인간세계의 문화에서는 친한 남녀끼리 포옹을 한다고 들었다.”
“어디서 그런 걸 읽었어?”
포옥-
데카드는 인간계에 귀환한 이후로 가장 위험한 순간을 뽑으라면 주저 없이 지금을 뽑을 것이다.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로 몸이 얼어붙었고 그러면서도 몸의 감각들은 세포 하나하나 빠짐없이 품 안으로 들어온 페일을 느끼기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이렇게 하면 부끄러움도 많이 사라질 것이다.”
성대가 조금씩 진동할 정도로 낮은 소리였음에도 둘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귀에다 얘기하는 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포옹은 이렇게 자신의 팔로 상대를 가두는 것이라 읽었는데 어째 나만 팔이 움직이고 있구나.”
데카드는 전에 말했듯이 얼음 상태라 팔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대도 빨리 나처럼 팔을 움직여라.”
얼음 동상처럼 굳어있던 팔이 삐걱거리며 아주 살짝 페일의 살 위로 올라와 그녀를 안았다.
“흐음. 포옹이란건 이런 느낌이군. 서로의 체온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분이다.”
“엘프들은 이런 걸 안 해?”
품 안에 있는 페일이 그대로 데카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육체가 살결에 닿는 행위는 자손을 낳을 때 말고는 없다.”
“그, 그렇구나.”
페일의 시선이 데카드의 아래쪽으로 갔고 그러면서 페일의 머리냄새가 후각을 강타했다.
순간 이곳이 하수도가 아닌 자작나무 숲에 온 듯한 자연의 냄새가 가득했고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데카드의 육감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을 때 페일이 아래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으면서 한 마디를 내뱉었다.
“크구나.”
“주인님, 고간을 진정시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짹짹이가 끼어들며 하는 말에 데카드가 급하게 마탑의 교가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4절까지 애타게 불렀고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그대가 못 들은 것 같아 다시 말하지만 나는 불속성 마법을 쓸 줄 몰라 그대가 물을 덥혀주어야 한다.”
“알겠어.”
페일은 포옹을 하느라 걸어두었던 팔을 풀었고 데카드는 3서클로 올라서면서 더욱 늘어난 마나로 마수를 소환했다.
“소환.”
3서클에 오고 처음 하는 소환인 만큼 데카드는 3서클 마수를 소환했다.
카아아-
일반적인 너구리보다는 훨씬 더 크고 온몸에서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플레어 라쿤이 하수도로 소환됐다.
“여기 있는 물을 적당히 뜨겁게 해줘.”
카아-
플레어 라쿤은 짧은 두 다리를 물 안에 넣고 마나를 집중시켰다.
레드 폭스라면 이렇게 많은 수량을 전부 데우지는 못할 테지만 플레어 라쿤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보통 마수들을 소환하기 전에는 계약이라는 것을 거치지 않나?”
“그런 것도 알아?”
“마을에도 그대와 같은 마수 소환사가 있다.”
플레어 라쿤에게 느껴지는 마나는 분명 3서클에 육박하는데 데카드는 지금 막 3서클에 올랐고 계약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나만의 비밀스러운 방법이 있어.”
그사이 라쿤이 두 발을 물에서 빼자, 후끈한 증기가 훅 느껴졌다.
“마을에 있는 마수 소환사들을 보면 마수 소환이라는 게 굉장히 어렵구나 하고 느꼈는데 그대를 보면 이것보다 쉬운 게 없어 보인다.”
“그러냐?”
둘은 뜨끈한 목욕탕에 들어가 피로와 몸에 점철된 땀을 닦았다.
“내일 밤에 그 대저택으로 들어갈 건가.”
“그래야지.”
교체해야 할 부품을 구하기 위해 데카드는 바이퍼 보스 집 앞마당에 있는 텔레포트 기계로 몰래 잠입을 해야 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되겠나.”
데카드보다 무력적인 힘만 따지자면 페일이 더 강한 게 사실이어도 지금 필요한 건 은밀함과 은신능력이었다.
“그건 안 돼. 짹짹이의 능력이 너까지 커버를 쳐주지 못하거든.”
그림자 밟기나 몸에 어둠을 두르는 것은 짹짹이의 주인이 아니라면 하지 못한다.
페일은 그래도 도와주지 못한다는 게 마음에 쓰이는지 편해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15분 정도 뜨거운 물에 몸을 씻어낸 후에 머리까지 잘 감고 나자 둘의 목욕은 끝이 났다.
“여기.”
“고맙다.”
데카드가 준 수건으로 페일은 몸과 머리에 물기들을 제거했다.
전과 같이 레드 폭스와 스카이 크레인으로 따뜻한 온풍을 즐기고 나자 몸은 뽀송뽀송해져서 윤기가 흘렀다.
“페일은 먼저 들어가 있어.”
“피곤할 텐데 쉬는 게 낫지 않겠나?”
어깨에 짹짹이를 걸친 채 맨홀 뚜껑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데카드를 보며 페일이 말했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 익숙해질 필요가 있거든.”
“무리하지 마라.”
페일이 데카드를 말릴 권한이나 권리는 없기에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데카드를 한 번 보고 은신처로 들어갔다.
후우웅-
맨홀 뚜껑에서 기어나와 슬레이로 나온 데카드는 밤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 차가움에 정신이 번쩍 들며 몸이 적당한 긴장 상태에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쉬운 것부터 해보자 짹짹아.”
[알겠습니다.]
“그림자 밟기.”
지금 시간은 밤.
빛이 없는 모든 곳이 그림자였으며 그 말의 뜻은 어디서든 그림자 밟기에 사용이 가능하다는 거다.
데카드가 시동어를 말함과 동시에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며 옥상으로 이동했다.
“좋아. 아직 감각이 죽진 않았어.”
바라본 곳으로 이동되는 그림자 밟기는 시야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면 엉뚱한 곳으로 이동 될 수 있기에 처음 짹짹이와 합을 맞출 때는 잔실수가 많았다.
“연습은 끝났고 이제 실전으로 넘어가자고.”
실전에는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루비아나 치안이 좋은 도시에서는 찾기 어렵지만, 이곳에서는 아주 쉽게 눈만 돌리면 찾을 수 있다.
“오늘은 많이 땄어?”
“말도 하지마. 본전도 못 뽑았어.”
마침 상대는 가슴팍에 썩은 쥐의 마크를 달고 있는 깡패들이었다.
‘가자, 짹짹아.’
[준비됐습니다.]
짹짹이가 어둠을 전개해 데카드의 전신을 덮어 가까이서가 아니라면 인식할 수 없도록 가려주었다.
‘그림자 밟기.’
순식간에 깡패 두 명의 배후로 온 데카드는 그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뒤꿈치를 들며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저 둘을 따라 걷기만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 걷고 있음에도 깡패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떠들기 바빴다.
“오늘 마지막으로 술이나 마시러 갈까?”
“좋지.”
“그래! 마시러 가자!”
깡패는 친구의 동의에 신나며 술집으로 가려 하자 옆에 있는 친구가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술집 가자며! 빨리 와!”
“나는 대답한 적 없는데…… 뒤에서 누가…….”
“뒤?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네가 아니면 누가 대답해?”
이 골목에는 줄곧 우리들 뿐이었는데 누가 있다는 말인가.
뒤에서 멈춰선 깡패가 갑자기 벌벌 떨기 시작하며 그보다 더 떨리는 손가락을 천천히 들고 앞쪽, 정확히는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깡패의 뒤쪽을 가리켰다.
“뒤, 뒤에 누가…….”
“뭔 소리야! 뒤에 누가 있…….”
퍼억-!
갑자기 턱에 가해진 엄청난 충격에 깡패는 기절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사, 살려주세요…….”
“…….”
이들의 반응을 보니 아직 실력이 죽지는 않았다.
데카드는 쓰러진 깡패의 가슴팍에 붙어있는 썩은 쥐의 마크를 떼서 품속에 넣은 뒤 그대로 까마귀의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갔다.
주르르-
바지에 오줌을 싼 깡패는 그대로 쓰러진 남자와 함께 기절하고 말았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