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뜻하지 않은 재회
왜 날 구했냐니.
그럼 그냥 거기서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는 뜻인가?
만약 풀려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남자들에 노리개 신세나 되었을 거다.
‘감사인사가 먼저 아닌가?’
하지만 정작 데카드에게 엘프 마법사는 차가운 청안으로 노려볼 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슬레이를 나갈때까지 동맹을 맺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구해 줬다.”
“정말 그게 다인가?”
그럼 뭐가 더 필요할까.
내가 널 구해 줬으니 이제는 내 노예다라는 대사라도 기대하는 건가?
“뭐 돈이라도 주게? 그럼 감사히 받지.”
데카드가 자신을 구해 줬으니 돈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 엘프 마법사가 착각하고 있다면 굳이 그 착각을 깰 필요 없다.
“흐음…….”
엘프 마법사는 청안을 치켜뜨며 데카드의 흑안을 계속 바라보았다.
‘종족이 사기긴 하네.’
이 여자가 자신에게서 뭘 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청안은 깨끗한 호수처럼 자신을 투영했다.
“믿도록 하지.”
엘프 마법사는 악수를 위해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페일이다.”
방금 그 눈 바라보기에서 뭔 변화가 있었는지 적대적이고 경계하던 페일에 태도가 조금 누그러뜨려 졌다.
“데카드야.”
데카드도 오른손을 내밀었고 둘에 손이 마주 잡히며 악수했다.
“그런데 어떻게 나인 줄 알았지?”
에어 스왈로우가 내뿜는 기운을 기억했다고는 하나 데카드가 먼저 마나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너의 옷. 그 마수와 같은 향이 나더군.”
페일이 짹짹이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그거 하나 가지고?”
짹짹이가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지배자급 마수로서 다른 마법사가 알아볼 수 없게 최대한 마나를 갈무리하고 숨기는 중이었는데 페일은 단번에 알아챘다.
‘과연 엘프는 엘프인 건가.’
인간보다 더 오랫동안 마나를 다뤄온 이들은 훨씬 더 마나라는 것에 친숙하고 능숙했다.
“처음에 무례는 용서해라. 나의 인간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그런 것이니.”
“선입견?”
페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이유가 있는 듯하지만 말해주지 않았다.
‘생길 만도 하지.’
그래도 충분히 이해는 갔다.
인간들에게 잡히고 한순간에 노예로 전락할 뻔했는데 증오심이 생기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그럼 이 도박장에는 왜 온 거야?”
오자마자 급류로 이곳을 쓸어 버린 걸 보면 도박을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나를 노예 상인에게 팔아넘긴 놈들이 이 도박장에 주인이다.”
페일은 복수를 위해 썩은 쥐의 자금줄을 잘라 버린 것이다.
슬레이에서도 손꼽힐 만큼 커다란 도박장이라고는 하나 그들에 돈줄은 이것 하나가 끝이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화풀이에 불과한 짓이었지만 썩은 쥐에 보스는 많이 화가 날 것이다.
“그…… 두 분 얘기 중에 죄송하지만, 저쪽을 봐주시겠습니까?”
로바드가 둘에 말이 끝나는 사이를 간신히 끼어들어 몸을 웅크린 채로 넓은 대로를 가리켰다.
푸히힝-!
대로에는 4마리에 말들이 끄는 마차, 5대가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로 100명은 돼 보이는 검은 정장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트위스트 도박장이 부서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하게 달려오는 것이리라.
“물러난다.”
페일은 조금 전 마법으로 제법 힘이 빠졌는지 곧장 얼굴을 가리기 위한 후드를 덮어쓴 후 도박장에 담벼락을 넘어 다른 골목길로 넘어갔다.
“동감이야.”
데카드도 페일을 따라 한 번에 담벼락을 넘어 골목길로 들어왔다.
“저, 저도!”
로바드도 낑낑거리며 담벼락을 넘으니 이제 트위스트 도박장에는 수장당한 사람과 기절한 사람 말고는 멀쩡히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이 없게 됐다.
* * *
로바드가 무거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골목길로 들어왔을 때 썩은 쥐도 도박장에 도착했다.
마차에 타고 있던 간부들은 다 깨진 유리창과 아직도 물이 흘러나오는 도박장 안을 보았다.
“크큭! 야 하일! 너 보스한테 된통 처맞겠는데? 크크큭!!”
금으로 빛나는 장신구들이 돋보이는 사내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하일을 향해 한껏 비웃어댔다.
하일은 도박장을 보고 부서질 듯 깨물던 어금니에 힘을 풀며 말했다.
“너도 웃을 일은 아닐 텐데 그릴즈. 우리 썩은 쥐가 그 정도에 손해를 감수하면서 얻은 엘프를 노예 시장에서 놓치지 않았는가.”
“…….”
그릴즈가 금반지를 만지작거리던 걸 멈추고 하일을 노려보았다.
“죽고 싶냐?”
“그만들 하지.”
두 명에 간부는 서로 번갯불이 튀기도록 노려보더니 다른 간부가 말려서야 그만두었다.
“어차피 도망친 엘프 노예가 복수하려고 도박장을 부순 것 아니겠나.”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는 건 범인이 혼자거나 적은 인원수였다는 건데, 혼자서 이 건물을 박살 낼 수 있으며 일반적인 폭파가 아니라 물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범인은 그 엘프 마법사뿐이다.
“엘프 노예고 뭐고 도박장이 무너지게 생겼어!”
하일은 노예를 잃어버린 그릴즈보다 더 심각한 자신의 상황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분노했다.
“오늘 보스하고의 저녁 만찬은 피 좀 튀기겠군.”
“…….”
이 트위스트 도박장은 썩은 쥐에 보스가 하일에게 관리하라고 내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도박장은 모두가 보다시피 엉망진창에 보수 작업을 하려면 돈이 엄청나게 깨질 것이고 안에서 죽어나간 호구 도박꾼들을 다시 모을 수도 없을뿐더러 안에서 그대로 수장당한 돈들은 사용 불가가 되어버렸다.
엘프를 잃은 그릴즈보다 하일이 낸 손해가 훨씬 커다란 것이다.
이 사실을 보스가 아는 순간 자신은 그의 애완 쥐들에 한 끼 저녁 식사가 될지도 모른다.
그 일을 피하려면 어떻게든 도박장을 이렇게 만든 범인을 찾아서 보스에게 대령해야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다.
“찾아라!! 의심 가는 새끼는 전부 내 앞에 가져와!!”
하일에 비명에 가까운 외침은 골목길을 타고 데카드, 페일, 로바드에게까지 전해졌다.
“화가 단단히 났나 본데?”
“잘됐군.”
페일은 시간이 없어서 아예 건물을 무너뜨리지 못한 게 후회가 되었는데 상대가 충분히 분노해하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당신도 수리공을 찾고 있었다니. 목적이 겹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마찬가지다.”
슬레이 주변, 인간들은 찾을 수 없도록 아주 깊은 산속에 있는 엘프들의 마을에 살던 페일은 물건 하나를 고치기 위해 나왔다가 붙잡히게 되었다.
“그 시계가 뭐길래?”
“가보다.”
페일이 잠깐 꺼내서 보여 준 회중시계는 딱 봐도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해 보였다.
“어우.”
로바드의 눈으로는 잠깐 본 것만으로도 어지러워지는 아주 섬세하고 미세한 문양이었다.
“이런 게 엘프 집안의 가보라고?”
누가 봐도 숲속에서만 살아가는 엘프들이 가보로 지니고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모른다. 대대로 내려온 가보였으니.하지만 가문은 물론이고 마을 누구도 고칠 줄 아는 분이 없으셨다.”
이렇게 어려운 구조를 다루려면 뛰어난 기술자가 필요한데 엘프 마을에 그런 기술자가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못 고치는 게 없다는 수리공이 슬레이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숲을 벗어났다가 썩은 쥐에게 잡혀버린 것이다.
“나도 그 수리공에게는 볼일이 있으니 같이 찾으면 되겠어.”
[힘이 모자라서 허무하게 죽을 일은 없겠군요.]
데카드 혼자로는 무력 쪽으로 부족한 감이 있었는데 건물 하나를 무너뜨릴 정도에 위력을 가진 마법사라면 든든하기 그지없다.
“벌써 어두워지네.”
오전 오후 내내 슬레이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태양은 점점 저물어가고 있었다.
“여기 근처에 제 은신처가 있습니다!”
“오오 그러냐? 신세 좀 지자.”
“물론입니다!”
로바드는 이렇게 또 필요성을 증명함으로써 목숨이 조금 더 연장되었다.
“페일은?”
“더러운 인간의 집에서 자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지.”
“하핫…….”
로바드는 멋쩍게 웃으며 은신처로 안내했다.
“이곳입니다.”
골목길을 몇 번 꺾어서 지나오고 썩은 쥐에 눈을 피하기 위해 큰길은 돌아가면서 외지고 주변에 건물이 적은 곳에 도착했다.
덜컥-
로바드가 품에 있는 열쇠로 문을 열자 안쪽에서부터 쉰내가 강하게 풍겨왔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페일은 도저히 참아줄 수 없다는 듯 냄새를 피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정말 이곳에서 주무실 생각이십니까?]
이런 곳에서 잤다간 건강했던 사람도 병들 것 같았다.
“냄새가 조금 나긴 하지만 계속 있다 보면 익숙해지실 겁…… 악!”
“청소 좀 하고 살아라.”
데카드가 로바드의 뒤통수를 치며 살짝 은신처에 안으로 고개를 넣어보았다.
쉰내는 더욱 심해지고 벽면에 곰팡이도 쓸어 있는 게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집이 아니다.
“10분 줄 테니까 여기 청소 끝내놔.”
넓지도 않은 집이라 5분으로 줄일까도 생각했지만 넉넉하게 그쯤 주기로 했다.
“시, 십 분이요?”
“시작.”
로바드는 허겁지겁 집으로 들어가 쓰레기란 쓰레기는 전부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냄새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만.”
인간보다 뛰어난 후각을 가진 엘프, 페일은 절대 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쓰레기와의 동침보단 낫잖아?”
창문도 조막만 한 로바드의 집은 문이라도 열어두지 않는 이상 환기가 불가능해 보였고 그렇게 되면 쉰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소환.”
얼굴만 한 마법진 안에서 페일을 구해 준 에어 스왈로우가 튀어나왔다.
찌르-!
“익숙한 얼굴이지?”
“날 구해 준 마수로군.”
스왈로우는 페일에 주변을 날아다니다가 데카드의 머리 위로 앉았다.
“스왈로우, 저 방안에 있는 냄새가 빠지게 바람을 불어넣어 줘.”
찌르르-
에어 스왈로우가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바람들이 점점 모여들며 선선한 산들바람이 계속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우 냄새.”
그럴수록 쉰내는 점점 바깥으로 빠져나왔고 페일과 데카드는 문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졌다.
환기가 빠르게 진행되고 로바드가 문밖으로 헐레벌떡 뛰어나오며 쓰레기 봉지를 양손에 가득 쥐고 집 밖으로 나왔다.
“허억…… 허억…… 끝냈습니다.”
“냄새는 이제 좀 참아줄 만하네.”
이제 1년간 청소 안 한 집에서 방금 청소했지만, 냄새가 나는 집으로 바뀌었다.
“하아…… 정말 어쩔 수 없는 건가.”
“어쩔 수 없어.”
그나마 믿을 만한 놈 집에서 자야지 썩은 쥐에 표적으로 찍힌 이상 여관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데카드와 페일이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바로 공기 순환이 안 되는 것 같았지만, 이 정도는 참아야 했다.
“그럼 저는 아무 데서나 잘 테니 두 분이 잘 곳을 고르시지요.”
로바드의 집은 거실 하나 방 하나가 있는 단출한 집이었다.
“방에서 자겠다.”
페일이 먼저 방을 차지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나는 거실에서 잘게.”
“알겠습니다! 저는 그럼 저녁 거리라도 만들고 있습죠!”
“또 약 타면 죽인다.”
로바드는 이마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누가 봐도 당황한 티가 팍팍 나는 얼굴로 대답했다.
“서, 설마 제가 그러겠습니까.”
“너니까 그러겠지, 짹짹아 잠깐만 제 감시하고 있어.”
깃털 코트가 분해되면서 다시 사람의 모습을 갖추어가더니 짹짹이가 나타났다.
“걱정 마십쇼.”
“뒷마당에 있을 테니까 저녁 다 되면 불러라.”
“알겠습니다!”
짹짹이와 로바드를 그렇게 잠시 내버려두고 데카드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