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혁명
숲의 나무들 사이사이로 전해지는 따뜻한 햇빛은 마수계에서의 자연과 비슷하다.
하지만 나무들이 정제해 내는 맑은 공기는 마수계에서 맛볼 수 없는 인간계의 특권이다.
공기 중 마나의 밀도가 높은 마수계는 마법을 수련하고 마나를 쌓기에 최적의 장소지만 식물들과 나무들이 내는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아 무언가 이질감이 들었다.
“숨을 듬뿍 들이쉬어 봐! 짹짹아!”
인간계로 귀환한 두 번째 날인 오늘도 데카드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게 반가웠다.
옛날에는 그저 일상이라 치부하던 이런 냄새들조차 감사하고 조금이라도 옆에 있는 짹짹이에게 이 기분을 공감시키고 싶었다.
“그냥 똑같은 냄새밖에 안 납니다.”
“이게 안 느껴진다고?”
이 풍부한 자연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단 말인가.
“좋아 좋아.”
마수계에서도 산 중턱에 있는 동굴 속에 살았고 지금도 다를 바 없이 산속을 거닐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쪽 세계에서나 지금이나 똑같이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 같지만, 당사자인 데카드는 점점 고향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 중이었다.
데카드가 1000년 동안 쌓였던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있을 때 짹짹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주인님께서 원하시던 인간계의 귀환을 성공적으로 이뤄내신 건 알겠는데 마수왕이 아닌 주인님은 어떻게 살아가실 겁니까?”
짹짹이의 질문 한번에 모든 것이 행복할 것만 같았던 감정이 무너지고 현실의 파도가 데카드를 덮쳤다.
“으음…… 일단 복직을 해야 하지 않을까?”
데카드는 마탑을 졸업하고 전 세계에 마법사들을 통제하며 온갖 마법과 관련된 일들을 전부 취급하는 마법부에 들어갔었다.
마법사라면 꿈에 그리는 직장을 데카드는 얻었었고 그 안에서도 흑마법사 소탕과 몬스터 소탕, 미궁 조사와 토벌을 담당하는 집행부에 배정받았다.
듣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봉급을 받으며 세상에 문젯거리가 되는 미궁과 흑마법사를 청소하는 게 데카드가 하는 일이었다.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실적을 쌓아 승진도 멀지 않았고 참으로 탄탄대로였던 인생이었다.
“집행부로 말입니까?”
데카드가 가끔씩 해주었던 인간세계 이야기는 집행부에 관한 얘기도 포함돼 있었기에 짹짹이는 데카드의 전직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렇지.”
데카드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알고 나면 복직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 몬스터라는 것들은 어떱니까?”
“어휴, 말도 마라.”
전에 데카드가 집행관이었던 시절 맡게 된 임무 중에는 고블린 무리 소탕이 있었다.
이런 야산에 가장 많이 사는 고블린들은 초록색 피부에 긴 코와 귀를 가졌으며 성인 남성의 무릎까지 오는 키에 기본적으로 무리생활을 하고 산속의 함정이나 잠복을 해 지나가는 사람을 덮친다.
“잡초같이 밟아도 밟아도 계속 자라나는 놈들이야.”
마수들을 이용해 빠르게 소탕을 끝내고 집행부로 복귀했을 때 똑같은 지역, 똑같은 산에 고블린들이 번식했다는 정보를 받고 같은 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던 그 기분은 참으로 개 같았다.
“아예 그 뿌리까지 말려주지 않으면 답이 없어.”
고블린들을 미행하며 움집을 짓고 살아가는 그들을 발견해서 몰살시키고 나서야 그 산은 몬스터들로부터 해방됐다.
“잠깐 한눈팔면 그새를 못 참고 한 무리가 더 늘어나 있다니까.”
“피곤한 놈들이군요.”
“엄청 피곤하지.”
그 일이 있는 이후부터 고블린 관련 임무는 슬슬 피할 정도였다.
“차라리 센 놈 한 마리 깔끔하게 잡는 게 백배는 나아.”
둘은 다시 말을 멈추고 조금씩 쉬어도 가며 하루 반나절을 걷기만 했다.
“어우…… 다리 아파.”
마수계였으면 마수 하나 잡아서 날아가면 됐을 텐데 아쉽게 됐다.
“최대한 걸어도 밤을 피할 수는 없겠습니다.”
해가 저물어갈 시간인데 아직 도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기 전에도 염려했던 산속에서의 밤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불을 피우면 몬스터들이 겁을 먹고 근처에 까지는 오지 않을 거야.”
대로에서 야영을 하는 건 위험하니 적당한 야영지를 찾던 데카드는 괜찮은 평지를 발견했다.
“여기서 불을 피우자!”
다른 직업이었더라면 불을 피우는데 부싯돌을 이용하거나 나뭇가지를 다른 나무에 비벼 마찰을 이용해 불씨를 내는 방법 등, 힘들게 몸을 써야 하지만 마법사는 다르다.
자연을 이해하고 때로는 이용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불 정도야 간단하게 피울 수 있다.
바닥에 떨어진 통나무를 의자 삼아 앉은 데카드는 호기롭게 장작들을 쌓아놓고 준비를 마쳤다.
“아.”
그리고 외쳐진 데카드의 외마디.
“왜 그러십니까?”
명상 중에 깨달음을 얻은 부처처럼 데카드는 일체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짹짹이가 다가와 데카드의 상태를 살피려는 찰나 얼어붙어 있던 입술이 움직였다.
“나 불속성 쓸 줄 몰라.”
“네?”
사실 불속성을 비롯한 속성계열의 모든 마법을 쓸 줄 모른다.
“정말이십니까?”
“굳이 배울 필요가 없었어.”
불 피우는 것 정도야 1서클 마수인 레드 폭스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그냥 마수들에게 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데카드가 머리 써가면서 공부할 필요가 없었단 말이다.
“스읍…… 그렇다고 불을 안 피우기에는…….”
최소한의 보호막인 불마저 피우지 않는다면 오늘 밤은 몬스터들과 사생결단을 내야 했다.
“에이 모르겠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 온 데카드는 슥슥 바닥에다 무언가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뭘 하시려는 겁니까?”
“너희들이 인간계로 튀어나올 수 있게 해주는 문을 만들고 있는 거야.”
정말 오랜만에 그려보는 마법진이라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마수학의 초신성이라 불렸던 데카드다.
“원래 마나 분필로 그리면 더 잘 되긴 하는데…… 뭐 1서클 소환 마법진이 이 정도면 됐겠지.”
서클이 올라갈수록 소환하는 마수들의 급도 높아지고 그럴수록 소환 마법진은 복잡해져 나간다.
1서클 정도는 그 모양도 작고 수식도 필요한 게 많지 않아 나뭇가지로 대충 그려도 작동은 할 것이다..
엄지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소환사의 피까지 준비 완료다.
“상처는 왜 내십니까?”
“피라는 게 자신을 적은 양에서도 가장 많이 나타낼 수 있는 거고 나라는 마법사를 마수들에게 더 쉽고 강렬하게 알려주는 거지.”
데카드의 마나가 피를 낸 손에 담기고 이제 시전만 하면 마수 소환준비 완료다.
“소환!”
마수계에서는 그냥 지나가던 모든 게 마수라 소환도 1000년 만이다.
오랜만에 하는 소환은 설레기도 하고 어떤 마수가 부름에 응답할지 기대도 되었다.
“시간이 원래 이렇게 걸립니까?”
10초가량 손을 마법진 위에 올려두고 있었음에도 아직 무반응인 마법진을 짹짹이가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것도 다 계약 소환의 묘미야. 운이 안 좋으면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 시간에 어떤 마수가 나올까 생각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고.”
추억 돋는 1서클 계약 소환은 데카드의 마나가 거의 다 소모되었을 때까지도 반응이 없었다.
“마수왕 체면 다 떨어지네. 스읍…… 바라던 애가 있었는데.”
데카드가 불 피우기에 이어 두 번째 머쓱함이 찾아오려 할 때 마나 잔량 2%를 남겨두고 마법진이 발광했다.
화악-!
“오오!”
슬슬 포기하고 있었는데 계속 마나를 넣어주길 잘했다.
“좋아! 어떤 마수냐!”
빛이 점점 사라지면서 마법진 중앙에 무언가가 앉아 있었다.
우우-
붉은 털과 뾰족한 귀, 탐스러운 꼬리를 가진 여우 한 마리가 마법진 속에서 걸어나왔다.
“와아! 진짜 생각했던 마수가 나왔어!”
데카드가 기쁨과 쾌감에 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이 소환한 마수를 바라보았다.
우우우-
레드 폭스가 몸을 지탱하고 있던 발 중 하나를 들어 데카드의 앞에 들이밀었다.
“계약하자고?”
우우-!
마수계에 1000년을 살았어도 마수어는 잘 모르지만 그렇다라는 뜻으로 다가왔다.
“네가 내 인간계 귀환 이후 첫 마수야. 잘해보자!”
데카드의 손과 레드 폭스의 앞발이 맞부딪치며 그들은 서로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고 마나가 환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분명 쌍방합의에 계약이 이루어졌고 둘의 마나가 공명하면서 계약이 성사되어야 하는데 전혀 아무런 공명이 없었다.
“제가 주인님과 계약을 했었을 때처럼 그게 푸른 무언가가 일어나야 한다는 거군요.”
“그래. 근데 이거 왜 이러냐?”
우우!
후욱-!
레드 폭스에 몸이 갑자기 빛으로 산화하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역소환……? 아직 레드 폭스의 마나는 남아 있을 텐데.”
데카드는 말하면서 찾아오는 아랫배의 공허함에 자신의 마나가 다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지? 아까 분명 마나가 남아있었어!”
마나가 자신 스스로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주인님.”
“어?”
짹짹이가 무언가 감이 온 듯 자신의 마나를 데카드에게 넘겨 주었다.
“이 마나로 아까 그 레드 폭스를 소환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소환을 해, 계약을 못 했는데.”
“한번 해보십쇼.”
계약을 안 한 상태에서 특정 마수를 소환한다는 건 마수학의 천재라 불렸던 데카드 조차 듣도 보도 못한 방식이다.
“소환!”
그래도 1000년 인생에서 짹짹이말 듣고 후회한 건 없었기에 속는 셈 치고 아까 그 레드 폭스를 떠올리며 소환 마법을 시전했다.
화악-!
어두운 숲 주변으로 마법진이 전개되며 아까 그 레드 폭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데카드와 짹짹이를 바라봤다.
우우?
“설마……!”
마수계에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이것 말고는 지금 상황이 설명되지 않는다.
“야! 여우야! 너희 영역의 지배자가 누구야!”
영특한 레드 폭스는 발톱을 꺼내 흙바닥에다 무언가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고오른……?”
데카드가 거느린 4마리의 마수들은 모두 태어났을 때부터 지배자급으로 그 영역의 마수들을 통솔했었다.
레드 폭스가 그린 고오른은 동쪽의 지배자.
계약의 상하 관계를 따져보면 고오른이 최고 사장으로 있어도 그 위에 데카드가 마수왕으로 있어 동쪽의 모든 마수는 결국 데카드의 지배를 받는다는 가설이 세워졌다.
“동서남북, 모든 사 방향의 지배자는 내가 계약했으니까…….”
이론상 서클에 맞는 마수라면 그 어떤 마수라도 소환할 수 있게 된다.
“와아!! 이거 진짜!!”
이게 사실이라면 데카드의 존재 자체는 정말 마수학의 혁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계약이라는 단계도 건너 뛰어버리고 그냥 소환만 하면 오케이라니.
“으음…… 나는 그럼 우드 몽키를 소환하고 싶어!”
레드 폭스는 잠시 역소환 시키고 원숭이와 비슷한 울음소리, 기다란 팔, 말려 있는 꼬리, 연두색 몸집에 키는 최대 1M와 그 아래를 오간다.
“소환!”
데카드의 손이 번쩍 빛나면서 펼쳐지는 마법진 하나.
끼끽-!
우드 몽키가 갑자기 펼쳐진 인간계에 놀라며 화들짝 데카드와 거리를 벌렸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