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집으로 가는 길
“이거 어떡한다…….”
자신이 살던 세상에서 10년 후라고는 하나 돈이 필요없는 시대는 절대 아닐 것이다.
아무리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해도 돈이 최고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데카드는 자신했다.
“여기가 어딘지 부터 알아야겠어.”
살던 나라와 같은 곳이라는 건 확인 됐으니 이제 정확한 지명과 위치를 알아야 했다.
마침 바깥에서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빗자루로 쓸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저기 실례합니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좀 알 수 있을까요?”
“아니, 그것도 모르고 왔소?”
짹짹이가 남자의 깔보는 듯한 태도에 주먹을 내지르려던 걸 데카드가 겨우 막으며 질문을 계속했다.
“가까운 도시는 어딨는지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흐음…… 일단 여기는 모타운이고 제일 가까운 도시는 걸어서 이틀 거리에 프로피가 있소.”
“감사합니다.”
원하는 대답을 다 얻고 짹짹이는 아직도 화가 난다는 듯 멀어지면서도 그 남자를 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한 세계의 왕에게 너무 무례한 것 아닙니까.”
짹짹이는 자신이야 얼굴을 곤죽으로 만드는 것에서 끝내도 다른 4마리의 마수가 봤다면 저 남자는 평생을 고통 속에 뒹굴었을 것이다.
“그곳은 마수계야, 지금 여기는 인간계고. 나는 마법사 중에 흔하디흔한 1서클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 그렇게 힘을 막 쓰고 다니면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자신의 주인이 무시를 당하고 저자세로 들어가는 것에 짹짹이는 무척이나 맘에 안 들었지만, 그것조차 주인의 뜻이라면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이제 프로피로 갈 계획만 짜자!”
이런 산동네에서는 무언가 더 있어 보이지 않았고 프로피란 도시로 가야 진전이 될 것 같았다.
지금 데카드는 하루빨리 더 많은 사람과 더 넓은 세상을 맛보고 싶었기에 지금 이 마을은 너무나 좁았다.
“저기 물과 음식이 있으니 가져가면 되겠습니다.”
짹짹이가 식료품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돈이 있어야 가져갈 수 있는 거야.”
“인간세계는 불편한 것투성이군요.”
“큭큭, 그런 게 없지 않아 있긴 하지.”
데카드와 짹짹이는 마을을 벗어나는 길목으로 왔다.
마차가 지나다닐 수 있게 크게 나 있는 길은 나무와 울창한 숲을 가로질러 프로피로 향해 있었고 데카드에게는 우물을 넘어 바다로 빠져나가는 길이다.
“이틀 정도 걸린다 했으니까…….”
남자가 말하길 프로피까지는 걸어서 2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고 가는 건 힘이 많이 드는 일이었고 도시에 도착할 때쯤에는 거지꼴과 다름이 없을 거다.
“적어도 물은 있어야 하는데.”
사람이 밥은 먹지 않고 거르더라도 물은 주기적으로 먹어줘야 신체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물물 교환을 해야 하나?”
다행히 모타운은 규모가 작더라도 여러 상점들이 활성화가 된 상태였다.
아까 짹짹이가 발견한 식료품점도 있으니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내민다면 물이나 음식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내가 지금 뭐가 있지?”
물물 교환을 하려면 일단 데카드도 무언갈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전투용 로브의 주머니들을 전부 뒤져봐도 나오는 것은 쓸모없는 지갑밖에 없었다.
“나름 명품이긴 한데…….”
이 지갑은 데카드가 마법부에서 집행부로 처음 들어가고 받은 월급으로 큰 맘 먹고 산 명품지갑이었다.
안쪽이 무려 공간 마법 처리가 되어 있어 더 많은 카드와 현금을 담는 게 가능한 마법 지갑이다.
하지만 이것도 10년 전 물건이라 여러 군데가 헤지고 낡았어도 상표 값이라는 건 엄연히 존재했다.
물과 보리빵 정도는 충분히 구할 수 있으리라.
“주인님이 입고 계신 로브를 팔면 안 됩니까?”
“이거?”
로브라기보단 오히려 코트같이 데카드를 감싸고 있는 이 옷은 마법 방어용 술식들과 질긴 검방용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어 고작 물하고 바꾸기에는 아까운 물건이다.
“나중에 신분을 증명할 때 필요할 수 있으니까 남겨두자.”
로브는 마탑을 졸업하게 될 때 학교에서 주는 선물이니 신분증이 없어도 나름대로 자신을 증명해줄 수 있는 수단이다.
지갑 안에 있는 것들은 전부 빼서 로브 안에 넣은 후 데카드는 식료품점에 문을 열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가게 주인의 인사와 함께 데카드는 빠르게 필요한 물품들을 골라냈다.
“물은 너 한 병 나 한 병이면 충분하고…… 빵도 똑같이 하면 되겠지.”
막상 전부 고르고 나니 지갑의 가격이 머릿속에 떠올라 쉽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주인님.”
“그래도 마법 지갑인데 몇 개만 더 고르자.”
이게 어떤 물건인데.
고작 물 두 병과 빵 두 개로 바꾸기에는 아무것도 안 먹은 배가 쓸리고 아파올 것만 같아 데카드는 상점 안쪽을 조금 더 돌아봤다.
“좋아. 이 정도면 완벽해.”
기존에 골라놨던 것에서 여행에 좋고 냉동 보관 없이 오래 먹을 수 있는 육포 두 봉지를 추가했다.
솔직히 지금 이 정도도 굉장히 배가 아프지만 이제 그만 지갑을 놓아줄 때다.
“이것들을 계산하고 싶은데요.”
“89동화 입니다.”
“값은 이걸로.”
데카드는 지갑을 모난 곳 없이 잘 쓸어내린 후 가게 주인 앞에 슬며시 내려놨다.
“요새 시대가 어느땐대 물물교환을 합니까?”
그러면서도 가게 주인은 돈 냄새를 맡았는지 지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게 마법 처리된 지갑인데 이거 하나 들고 다니면 여자들이 그냥! 아시죠?”
지갑의 흠집이나 그런 것들에게 최대한 눈이 가지 않도록 데카드는 침이 마르게 지갑을 포장하고 그 가치를 드높였다.
“흐음……. 말을 들어보니까 확실히 괜찮아 보이긴 하네요.”
“그렇죠! 역시 뭘 좀 아시는 분이시네! 이게 또 리미티드 에디션이라 어디 가서 구하지도 못해요!”
가정 방문 판매원처럼 또 끊임없이 이 지갑의 장점을 쏟아내니 가게 주인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거래하시죠.”
“선택 잘하셨어요!”
둘의 손이 마주 잡히고 데카드는 물, 보리빵, 육포를 얻었다.
가게를 나오자 짹짹이는 살짝 커진 눈으로 데카드를 따라왔다.
“오랜만에 흥정을 해봐서 살짝 무리했는데 잘돼서 다행이야.”
“주인님께서 이렇게 말을 잘하시는진 몰랐습니다.”
만약 지갑이 명품 지갑이 아니었더라도 데카드는 왠지 이 정도의 물건을 받아냈을 것 같다.
“마수계에서 이렇게 떠들 일이 어딨겠어.”
마수계에 있는 거라고는 광활한 자연과 그 속을 뛰어노는 마수들, 유일한 인간인 데카드가 전부다.
이 세계에서 가치 있는 것은 자신의 목숨과 영역, 먹이뿐이다.
그런 물건들과 흥정해줄 상대는 마수들 밖에 없었는데 그들의 흥정 방식은 세 가지.
결투, 피 튀기는 결투 그리고 목숨을 건 결투였다.
마수왕에 오르기 전까지는 데카드도 이런 흥정방식을 많이 애용했었다.
“이제 떠나…… 기엔 좀 애매하네.”
“그렇습니다.”
인간계에 떨어졌을 때는 분명 푸르렀던 하늘이 지금은 점점 태양을 기점 삼아 주황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한시간 후면 해가 지고 어두운 숲 속은 몬스터들의 주 무대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이 마을에서 주무실 생각이십니까?”
“별수 없잖아?”
조금이라도 빠르게 더 넓은 인간계를 보고 싶었지만,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볼 필요는 없었다.
1000년을 기다렸는데 하룻밤을 더 못 기다릴까.
마을 광장 근처에 2층짜리 여관이 보였다.
원래라면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가 가장 비싼 방을 결제하고 뜨거운 목욕물에 하루 피로를 풀었을 것이다.
“지금은 빈털터리니까.”
데카드는 가까운 광장 벤치로 와, 입고 있던 전투용 로브를 펄럭하고 벗어 그 위에 깔았다.
그러고는 팔걸이를 베개 삼아 그 위에 드러누우니 간단한 침대 완성이다.
“할 수 없이 노숙을 해야지.”
“이렇게 밤을 보내실 겁니까?”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광장의 특성상 벌써 몇몇 사람들이 벤치에 누워 있는 데카드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지나갔다.
“조금 구석진 곳으로 가서 주무시는 게….”
인간세계를 잘 모르는 짹짹이의 눈에 이 광장은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거나 도망치기에 너무 뻥 뚫렸다.
“노숙을 할 때는 오히려 이런 개방된 곳이 안전해.”
옛날 돈이 없던 마탑 1학년생 시절에 선배가 교외임무에서 알려준 몇 가지 팁 중에는 노숙에 관한 것도 있었다.
“이렇게 개방된 곳에 있으면 혹시 누가 나에게 나쁜 마음을 먹고 오더라도 주변에 건물들과 시선이 많으니까 함부로 행동할 수 없어.”
자신을 지켜줄 집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벽 하나 없이 휑한 노숙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구석에 있는 게 더 위험하다.
“짹짹아, 그 이불 줄래?”
“여깄습니다.”
이전에 받은 요르의 비늘 이불.
가볍고 얇으면서 열을 차단하는 능력이 아주 훌륭했다.
“이거면 밖에서 자도 따뜻할 거야. 짹짹이 너는 어떡할래?”
“주인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아무리 데카드가 안전하다고 안심시켜도 짹짹이는 처음 보는 세계에서 자신의 주인님이 있는게 불안했다.
“그럼 내일 보…… 하암…… 자. 짹짹아.”
마수계에서 천 년 동안 낮잠이 취미이자 일상이 될 만큼 잤더니 이젠 눕기만 해도 하품이 나오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안녕히 주무십쇼.”
짹짹이는 인간의 모습에서 까마귀로 변하며 집 위 지붕에 앉아 광장을 바라보며 데카드를 지켰다.
산에서 울리는 귀뚜라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 데카드는 인간계 귀환 첫째 날을 이렇게 지냈다.
* * *
“어이 총각!”
“네……?”
요르의 이불을 발 끝부터 머리끝까지 덮고 잤더니 너무 따뜻해서 밤바람이 부는지도 모르고 잠에 빠졌었다.
이불을 내리자 내리쬐는 햇볕이 눈을 아프게 했다.
“젊은 총각이 일을 해야지! 벌써 이런 데 누우면 안 돼! 에잉! 쯧쯧쯧.”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희끗희끗한 흰머리를 한 노인이 벤치에서 부스스 한 머리로 일어나는 데카드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고 지나갔다.
“하암…….”
“일어나셨습니까.”
데카드가 누웠던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이불을 개고 있자 짹짹이가 날아와 이불을 회수하고 노인이 지나간 방향을 쳐다봤다.
“명령만 내려 주시면…….”
“괜찮아, 죽일 필요 없어.”
노인들의 참견이야 인간계의 시골에서는 흔한 일이다.
“으읏!”
딱딱한 벤치에서 밤을 보낸 탓에 굳어버린 몸을 풀자 관절이 우두둑하고 소리가 났다.
“이제 출발하자!”
지금 시간대는 해의 위치로 봐서 오전쯤일 것이다.
“부지런히 걸으면 금방 갈 거야!”
아침은 육포 봉지 하나를 뜯어 간단히 해결하고 절반 정도 남은 육포는 짹짹이에게 건넸다.
“저는 괜찮습니다.”
“너도 먹어. 인간계에 온 이상 배고픔을 느낄 거야.”
벌써 꼬르륵하고 울리기 시작한 짹짹이의 배는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두 손으로 받아든 육포 봉지는 안쪽에서 고기 냄새가 물씬 흘러나왔다.
처음 먹어보는 인간계의 음식.
붉은빛의 고기 조각이 입안으로 들어가고 하얀 이빨로 조금씩 씹어보기 시작했다.
“어때?”
몇 번을 계속 씹고 또 씹어보아도 입안에 있는 육포는 쪼개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분비된 침은 육포와 섞여 국물이 되서 삼켜졌고 비릿한 맛과 살짝 짭조름한 맛이 동시에 났다.
“질기군요.”
“크크큭, 그래도 나쁜 맛은 아니야.”
배고플 때는 육포 한 조각만큼 반가운 게 없다.
짧은 아침 식사가 끝나고 데카드와 짹짹이는 어제 봐둔 대로로 출발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