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탈출구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쏟아지는 날.
누군가의 무덤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한 여자.
옷은 장례식을 온 것처럼 전부 까만색의 정장이고 검은 코트까지 어깨에 걸친 채 붉은색의 긴 머리는 뒤로 묶어 내렸다.
우산은 쓰고 있지 않았지만, 비들은 전부 그녀를 빗겨나가며 땅에 떨어졌다.
[데카드 아르마다]
비석에는 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정작 무덤은 텅 비어 있었다.
“총장님 이제…….”
“쉿……!!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누군가를 같이 있던 사람이 쥐죽은 듯한 목소리로 말렸다.
“아니 이제 회의 가실 시간이라 슬슬 움직여야 해서…….”
남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젊어 보이는 사람이 뒷머리를 긁으며 다시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너……! 평소 트리스 님의 대한 소문은 들어봤지?”
“그럼요. 마법사라면 어떻게 모르겠어요.”
1학년, 2학년, 3학년을 전부 1등으로 통과하고 마탑 졸업생의 신분으로 마탑의 총장 자리에까지 올라선 역사의 기록될 세기의 마법사다.
“전 학년을 1등만 하셨다면서요, 크으…… 그런 분을 상사로 모시게 될 줄은…….”
“그거 말고……! 멍청아!”
트리스의 관한 얘기라면 학생 시절 성적에 관한 것도 유명한 얘기지만 사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모습이 훨씬 더 유명하다.
“듣고 놀라지 마라, 데카드라는 집행관과 나갔던 미궁 조사 전까지는 엄청 해맑게 웃고 다니셨데……!”
“에이…… 그건 그냥 루머 아니었어요?”
선배의 말을 단순 루머라 치부할 정도로 지금 트리스의 표정은 정말 얼음장이 사람으로 환생한 듯했다.
“거짓말! 아니라니까……!”
이 답답한 후배 때문에 순간 높아질 뻔한 목소리에 자신이 더 놀라며 급히 트리스를 쳐다보았지만, 다행히 반응이 없었다.
“저 묘비의 주인이 트리스 님이 죽을 뻔한 걸 목숨 바쳐 구해 냈다잖아……! 그걸 감사해하고 슬퍼하고 계시는데 네까짓 게 지금 그걸 방해해……!”그제서야 남자가 양쪽을 돌아보자 모든 선배들의 눈빛이 자신에게 가만히 있으라며 레이저를 쏘고 있었다.
“너는 일을 잘해서 말해주는 거야, 저번에 들어온 막내놈이 너랑 똑같은 짓을 했다가 그대로.”
선배로 보이는 남자가 검지로 묘지의 땅 아래를 가리켰다.
“묻혔어.”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자신의 뒤에서 무슨 소동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트리스는 10년 전 그때를 회상하며 자신의 목에 걸린 선배의 마지막 유품과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금방 돌아올거라면서 너무 오래 걸리네요.”
3학년이 지나고 수만분의 1의 경쟁률을 뚫어 총장의 자리에까지 올라 기다려도 데카드는 오지 않았다.
데카드가 죽은 홈커밍 데이 때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난 지금, 그 어디에서도 데카드의 살아있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목걸이는 잘 가지고 있어요.”
그날 이후로 단 한 순간도 뺀 적 없는 목걸이를 손으로 꽈악 쥐자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그의 마나가 느껴졌다.
품에서 꺼낸 담배를 입에 물고 손가락으로 불을 붙여 깊게 들이마셨다.
“하아…….”
매캐한 연기가 빗방울들을 뚫고 위로 점점 올라가다 사라져갔다.
주황색의 눈동자가 묘비에 적힌 이름을 단 한자도 빠짐없이 읽어 내려가며 깊은 한숨과 함께 마지막 담배 연기가 나온다.
“가자.”
묘비에서 등을 돌리고 부하들에게 간 트리스의 눈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려갔다.
‘설마 지금 우시는 건가……? 설마. 그냥 빗물이겠지.’
모두 트리스의 눈으로 시선이 집중되며 한 가지의 의문을 품었지만 곧바로 삭제했다.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인물이 눈물을 흘릴 리가 없지 않은가.
‘선배, 어디선가 제가 모르는 곳에서 잘 살고 계시겠죠?’
* * *
“주인님.”
까마귀 깃털을 흩뿌리며 별 하나 떠 있지 않은 어두운 밤 같은 머리와 보라색의 눈동자를 가친 미남자가 데카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주인님.”
한 번 더 부르고 나서야 데카드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기지개를 켰다.
“하아암…… 좋은 아침이야 짹짹아.”
“1000번째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대체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수계에 들어온 이후부터 몸의 노화가 멈추고 있었다.
다치기도 하고 상처가 아물면서 자연스러운 회복도 됐지만, 자연사는 되지 않았다.
“벌써 그렇게 됐나?”
또다시 나오려는 하품을 참고 동굴의 바깥으로 나오자 태양 빛과 함께 4명의 남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수왕이시여! 1000번째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래 그래.”
마수왕이란 호칭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동서남북을 지배하던 마수, 4마리를 복종시키고 자연스레 얻은 칭호다.
말 그대로 이 마수계의 왕.
그리고 오늘은 데카드가 마수계의 온 지 1000년이 되고 맞는 생일이다.
“여기! 제 선물을 받아 주세요!”
눈꽃같이 하얀 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르고 황금색의 눈과 그 안에 있는 눈동자는 사람처럼 동그란 것이 아닌 마치 뱀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다.
“고마워! 요르.”
요르가 준 하얀색의 무언가를 펼쳐보자 비늘로 만든 이불이었다.
“이거면 어떤 추위에서도 깨지 않고 낮잠을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오오! 좋은데?”
데카드가 곧 바로 이불을 펼쳐 몸에 둘러보자 분명 두께가 얇았는데 그 어떤 털보다도 따뜻했다.
“아아……! 마수왕께서 나를 덮고 있어……!”
요르는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과 카타르시스에 몸을 부르르 떨며 베베 꼬았다.
“누가 뱀 아니랄까 봐 엄청나게도 꼬아 대는군. 마수왕이시여! 제 선물도 받아 주십쇼!”
2M가 넘어 보이는 큰 키와 하나하나가 산들을 압축해서 넣어놓은 것 같이 그 단단함과 크기가 느껴지는 근육들.
적갈색의 짧은 머리는 시원해 보였고 양쪽 눈에서는 순수함이라는 것이 가득했다.
“고오른! 후우…… 너는 좀 걱정된다.”
매번 파격적인 선물로 데카드의 생일을 찾아왔던 고오른은 이미 그것들로 사고를 친 게 좀 많다.
대표적으로 몇 년 전인 983번째 생일 때 데카드는 고오른에게 자가용 산양을 선물 받았었다.
“야아! 이거 타도 되는 거야?”
“물론입니다! 마수왕이시여!”
“고마워! 고오른!”
그 크기가 보통의 말보다 조금 더 큰 산양은 안장 없이도 탑승감이 좋았다.
“제가 특별히 골라온 마수입니다! 저랑 아주 똑 닮은 게 맘에 드실 겁니다!”
“그럼 지금 타 보고 올게!”
데카드는 산양을 타고 마수계를 내달렸다.
앞을 막는 장애물이 어떤 것이든 고오른이 선물로 준 산양은 전부 점프를 하며 뛰어넘었고 중심도 머리에 난 커다란 두 뿔로 여유롭게 잡을 수 있었다.
“오오! 재밌는데!”
이때까지는 데카드도 고오른의 선물이 매우 맘에 들었다.
“어어! 저기 앞에 절벽!”
그러다 숲을 가로질러 바깥으로 나오자 바로 눈앞에 천길 낭떠러지가 보였고 왼쪽도 마찬가지였다.
“오른쪽으로 꺾어!”
“메에에!”
산양은 급하게 방향을 꺾고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돌진했다.
왼쪽으로.
“오른쪽!! 병신아아아아!!!”
콰아앙-!
의도치 않게 생일날 투신자살을 할 뻔했었다.
자기랑 아주 똑 닮았다는 말에서 지능까지 똑 닮았을 거라고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데카드는 고오른이 내민 선물을 받긴 받았다.
걱정된다고 선물을 거부하면 저 큰 덩치로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시무룩해하기 때문에 또 하루 종일 달래 줘야 한다.
“후우…….”
또 걱정되게시리 뭔지도 모르게 나뭇잎으로 꽁꽁 싸맨 선물은 마지막 나뭇잎을 벗겨 내자 그 자태를 드러냈다.
“뿔피리……?”
“그렇습니다! 마수왕이시여! 저의 뿔을 조금 잘라내서 만든 뿔피리인데 그 소리가 아주 우렁찹니다!”
“그래? 한번 불어봐야겠네.”
아직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 뿔피리는 고오른이 ‘직접’ 만들었다고 하니 어떤 하자가 있을지 몰랐다.
고오른 말고 나머지 4명의 마수도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는 게 자기들도 걱정되나 보다.
“좋아.”
설마 부하놈이 불면 죽는 걸 선물로 줬겠어라는 생각에 데카드는 뿔피리를 힘껏 불어보았다.
우우웅-
그 기분 좋은 울림이 산을 타고 내려가면서 마수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야아…… 이거 좋은데?”
“감사합니다!”
고오른의 선물이 전해지고 이제 다음 차례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는 여자의 차례였다.
갈색으로 타오른 피부와 검은색의 머리, 샛노란 눈동자는 꼭 포식자의 그것이다.
겉으로 보여진 팔다리는 얇아 보이지만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근육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좋아 티이라! 너의 선물은 뭐야?”
“마수왕님! 여기 있다. 내 선물 받아주어라.”
다른 세 마리의 지배자들은 사람의 말을 알고 쓸 줄 알았는데 티이라는 할 줄을 몰라 근 200년 동안 열심히 가르치고 있지만, 아직 서툴렀다.
“좋아, 어디 볼까?”
이번에도 나뭇잎에 싸져 있는 선물은 조금 그 안에 있는 것을 건드려주자 뭐가 쑤욱 하고 빠져나왔다.
“이거 설마……?”
“이빨! 내 거다.”
티이라는 거대한 수각룡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수였다.
등에는 스페이드와 비슷한 모양의 갑판들이 꽂혀 있었고 그 커다란 입에 빼곡하게 나 있는 이빨들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턱에 힘을 줄 필요도 없이 썰려 나갔다.
티이라가 선물로 준 쌍단검은 그런 그녀의 이빨 중에서도 단단한 송곳니를 조금 잘라내서 만든 것으로 아주 예리해 보였다.
“고마워 티이라! 잘 쓸게.”
“기쁘다! 나는.”
이제 마지막 마수의 선물만이 남았다, 아직까지도 무릎 꿇은 것을 풀지 않으며 차마 쳐다도 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땅바닥으로 숙인 남자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줄래, 레오?”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데카드를 바라본 레오는 태양과도 같이 빛나는 황금색의 머리칼과 그와 같은 색인 눈동자를 가졌다.
“…….”
레오와 말을 섞은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과묵한 성격을 가졌고 처음에는 티이라와 같이 말을 못 하는 줄 알았다.
“선물이야?”
오늘도 말없이 무릎을 꿇은 채로 공손하게 양손을 내밀며 선물을 건넸다.
“우리 레오가 주는 건 뭘지 궁금하네?”
특별한 포장 없이 그가 건넨 것은 갈기 하나를 엮어서 만든 팔찌였다.
“이게 뭐야?”
“…….”
레오는 껴달라는 눈빛을 마구 보낼 뿐, 묵묵부답이었다.
“잘 들어가네.”
원재료가 갈기라 그런지 데카드의 손 크기에 구애받지 않고 쑤욱 늘어나며 손목으로 오자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고마워! 항상 차고 다닐게.”
끄덕 끄덕-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데카드는 드디어 때가 왔다는 듯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올해는 할 수 있을까.”
“될 거예요! 반드시!”
요르가 폴짝폴짝 뛰며 데카드를 응원했다.
“주인님께서 9서클에 오르신 지 800년이 지나고 이제는 그 힘에 통달하셨으니 가능하실 겁니다.”
짹짹이가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좋아…….”
지금 데카드가 하려는 것은 자면서도 고민하고 먹으면서도 고민하던 마수계로부터의 탈출방법.
몇백 년을 넘게 고민해봐도 이것 말고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흐읍!”
데카드가 두 손을 앞으로 강하게 뻗으며 심장을 감은 9개의 서클을 회전시켰다.
고오오-
마수계가 데카드의 마나에 전율하며 공간 자체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이것만으로는 모자라.’
매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공간을 부수려 했으나 9서클의 마나를 전부 쏟아부어도 이 마법을 할 수 없었다.
썼던 마나를 전부 채우기까지는 마수계의 마나로도 1년.
데카드의 마나룸이 100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너무 방대해진 탓에 실패하면 1년 뒤에 다시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얘들아!”
뒤에 있던 5마리의 마수들이 모두 데카드의 몸에 손을 짚었다.
고오오-
5마리 마수의 마나가 모두 데카드에게로 빨려 들어가고 번쩍 데카드의 양손 앞으로 마법진 하나가 튀어나왔다.
“하아…… 하아…… 이거야.”
마수계의 공간을 뚫고 다시 인간계로 데려다줄 마법.
1000년의 노력 끝에 드디어 탈출구의 열쇠를 손에 넣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