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마검의 주인이 되었다 127화>
“날카로운 칼날은 알겠는데 와해기는 아무래도…….”
로버트와 싸웠을 때가 생각난다.
그는 자기 주변의 마력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반대로 상대에게는 마력의 흐름을 저해하여 흐름을 빼앗았다.
와해기는 아마도 그중에서 상대에게 걸던 기술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기에 로버트와 싸움에서 반응한 것이겠지.”
다만 아직은 추측일 뿐이고 직접 해 봐야 감이 제대로 잡힐 것 같은데…… 그 순간.
[ 청강검에 Ⓟ전생검 각성이 발동하였습니다. ]
어느새 바뀐 주변은 전쟁터였다.
병사들은 빽빽하게 밀집하여 창날이 하늘로 치솟고, 은빛이 번뜩거리며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울린다.
“와아아아아아아!”
함성 소리는 그야말로 땅을 울리게 할 정도였다.
다만 이런 혼잡한 전쟁 속에서도 병준은 마검의 인연으로 전대 주인이 어디 있는지 바로 알았다.
채챙- 챙!
아니, 이건 마검의 인연이 아니라도 알 수 있으리라.
“크억!”
“저자를 막아, 크어어억!”
병사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말 그대로 혼자 무쌍을 찍는 검사가 있었다.
그는 민첩하게 움직이려니 오히려 방해된다는 듯, 갑주를 벗고 망토를 휘날리며 청강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검광이 번뜩거릴 때마다 그 앞에 있던 병사들은 갑자기 멈칫거리더니 순식간에 베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렇게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돌진한 탓에 곧 사방에서 적군이 습격해 왔다.
“어디서 감히 조 승상의 진영에서 허튼짓을 벌이느냐!”
하물며 전대 검주가 보인 무용에 대적하기 위해서였는지 적도 만만치 않은 자가 나왔다.
몸집이 큰 더벅머리 남자는 한눈에도 굉장히 단련이 잘된 몸이었다.
게다가 무공 계열 힘을 다루는지, 철퇴에 묵직한 힘을 실어 그의 뒤통수를 쪼개려 했다.
“죽어라, 이놈!”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옆에선 애꾸눈의 거구도 가세했다.
심지어 그의 바로 뒤에는 형제로 보이는 비슷한 인상의 거구가 붙어 강궁을 팽팽하게 당겼다.
핑-
손을 놓자 철 화살이 쇄도한다.
저 하나하나가 일격필살의 공격인데 세 명의 고수가 동시에 공격해 오다니…….
어지간한 실력자라도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으리라.
“흐아아아아!”
그렇지만 전대 주인이 검을 휘두르며 돌아서는 순간, 병준은 느꼈다.
그가 펼쳐 낸 마력 파장이 세 고수의 무기에 걸린 공력을 한순간에 풀어 버린 것을.
“크허헙?!”
그로 인해 배후에서 달려들던 장수들이 멈칫거렸고 이는 다른 병사들의 움직임까지 결정지었다.
촤아아악-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날아든 청강검에 세 명의 고수가 나가떨어졌고.
“이, 이럴 수가?!”
“저 세 장군님이 동시에 당했다고?!”
병사들이 놀라는 순간, 그는 더욱 질주했다. 적을 도륙 내며 진영 깊숙이 들어가며, 그곳에서 적들 사이 갇힌 한 여인에게서 아기를 받아 다시 포위망을 빠져나오는 모습과 함께 전생검의 기억은 점차 흐려졌다.
“아, 이건…….”
병준은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는지, 현실로 돌아와서도 여운에 취해 탄성을 토했다.
“그래, 청강검이 그거였구나. 삼국지에서 나오는 조운의 검이었어! 하, 조자룡이라니…….
어렸을 적 이야기로만 듣던 그 검을 직접 쥐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새삼 마검전이라는 이름이 실감 나네.”
“어, 새로운 검이네?”
그때 세레나가 옆에 나타나더니 물었다.
이제 불쑥불쑥 나오는 세레나에게도 적응이 되어 웃으며 반겨 주는 병준이다.
“왔어?”
그런 병준을 보며 세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미소 지었다.
“병준, 표정이 밝아졌어.”
“응. 괜찮은 검을 얻었거든. 그래서 좋아.”
“병준이 좋으니 나도 좋아. 그렇지만 나 배고파.”
꼬르르르륵-
그러다 추임새라도 넣듯, 세레나의 배에서 나는 소리에 피식 웃고 말았다.
“아, 배에서 자꾸 소리가 나. 저번에 밖에 가면 맛있는 거 있다고 했잖아?”
사실 이 녀석은 배가 고파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 정도다.
“아, 맛있는 냄새 나! 역시 병준, 약속 지켰구나!”
그 순간, 세레나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손뼉을 치며 빙빙 돌기 시작했다.
밖에서 갑자기 맛있는 냄새라니…… 이곳에 그런 것이 있던가?
“응? ……아!”
이내 병준은 세레나가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알았다.
‘로버트 헌터님이 숨겨 둔 토템이겠구나.’
모두의 경험을 위해서 밤새 뿌려 두었다던 토템들!
마침 잘 됐다.
그 토템으로 세레나 간식을 챙겨 줄 수도 있으니.
“냄새, 이 근처에서 나. 우리 빨리 가 보자!”
자꾸 보채는 세레나의 귀여운 모습에, 병준은 가볍게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 보자.”
수해 깊은 곳으로 가면 몬스터도 있을 테니 청강검 성능을 시험해 볼 수도 있으리라.
겸사겸사 마력 핵이 나오면 그것도 세레나의 간식이 될 테고 말이다.
* * *
“으으으으음!”
두 손을 관자놀이에 붙인 채 무언가 굉장히 집중하는 세레나였다.
혼자서 웅얼거리는 모습이 꽤나 귀엽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세레나가 번뜻 눈을 떴다.
“또 찾았다!”
그녀는 이내 어딘가로 날아가더니, 교묘하게 숨겨진 나무뿌리 사이 틈으로 조그만 손을 집어넣었다.
“헤헤헤, 맛있는 토템이다!”
오도독- 오도독!
찾아낸 토템을 아몬드 초콜릿처럼 맛있게 씹어 먹던 세레나는 이내 병준을 보더니 그것을 내밀었다.
“병준도 먹을래? 난 다시 찾아서 먹으면 돼.”
“괜찮아, 많이 먹어.”
딴에 신경 써 주는지 그래도 받으라는 듯 세레나는 조그만 손으로 병준의 주머니에 토템을 넣어주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느꼈는지 멈칫하며 한쪽을 봤다.
“병준, 저쪽에서 또 뱀 몬스터들이 와.”
“아무래도 그런 거 같네.”
기실 병준도 공간 장악으로 기척을 느꼈기에 마검을 꺼내며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파치칫- 파칫!
어둠 속에서 나와 덮쳐드는 녀석들의 모습은 뱀의 하반신 위쪽으로 머리칼을 늘어트린 여인이었다.
흔히 말하기를 나가. 주요 특징으로는 마력을 잘 다루기에 타고난 마법사기도 했다.
‘특히 수해 필드 깊은 곳이라 그런지, 이 녀석들은 평균보다 수준이 더 높군.’
덮쳐 오며 캐스팅하는 불덩어리는 못 해도 중급 헌터를 웃도는 레벨이었다.
화르르륵-
그러나 지금 병준의 손에는 청감검이 쥐어져 있다.
병준은 마력을 흘려보내며 권능을 발동했다.
[ 청강검의 Ⓐ와해기 권능이 발동하였습니다. ]
후후우욱- 후스스스스-
“키, 케엑?!”
돌연 불덩어리를 캐스팅하던 마력이 와해 되자, 나가들은 몹시 당황했다.
그 찰나, 병준은 다섯 마리의 나가를 한 번에 벴다.
[ 청강검의 Ⓟ날카로운 칼날로 더욱 예기를 발합니다. ]
스걱- 스거덩-
그리고 검으로서 근본적인 기능인 베는 감각이 올라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병준은 새삼 어째서 청강검이 역사에 남은 명검인지를 실감했다.
“이거 어지간한 검사는 베는 손맛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예리하게 베이네.”
물론 병준의 오히려 특유의 감각으로 청강검의 예기로 나오는 묘한 짜릿함을 느꼈다.
“거기다 내 공간 장악의 감각으로 와해기가 닿는 범위를 더 넓히면…….”
와해기가 닿는 범위도 넓힐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불현듯 나무 사이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심상찮은 존재감을 느꼈다.
나가 급을 훨씬 상회한다.
병준은 긴장하면서 대비했다.
“세레나, 전투 준비해.”
“응!”
세레나마저 전투 준비를 시키고 저쪽을 응시하자, 곧 그 정체가 드러났다.
“허허, 강한 예기가 느껴지기에 누가 이 밤중에 이렇게 나가를 베고 다니는가 했더니, 자네였군.”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온 노인이 말한 것과 병준이 저쪽을 알아챈 건 거의 동시였다.
“신노스케 헌터님이셨군요. 긴장했습니다.”
“허허, 나 역시 그랬다네.”
같은 착각을 했다니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서로 얼굴에 번지는 그런 미소를 보자 왠지 서로 더 친해진 느낌도 든다.
어느새 곁에서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좋은 검이군. 시험해 보러 나온 겐가?”
“예, 같은 검사라서 그런지 정확하시군요.”
“허허, 그 마음 알지.”
그 마음 잘 안다는 듯 신노스케가 끄덕이고는 이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런 설레는 마음으로 던전에 나와 검 휘두르던 때가 있었지……. 혹시 한번 그 검을 쥐어 봐도 괜찮겠나?”
역시 그도 명검을 알아본 것이리라.
병준은 흔쾌히 응하여 검을 건넸다.
“오오, 과연 좋구먼. 이렇게 날카로운 예기라니……. 섬뜩할 정도로군.”
우우우웅-
그 순간 검이 울었다.
다만 병준이 마검을 쥘 때 그렇듯, 검이 주인에게 동조하는 검명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발하는 느낌이다.
“허허, 이거 자존심이 강한 검이었군. 이거, 그만 자네 손으로 돌려줘야 할 듯싶어.”
그가 건넨 청홍검을 다시 받자, 거짓말처럼 거친 떨림은 사라지고 은은한 검명이 울린다.
우우우우웅-
그 격차에 질투라도 느낄 법도 하건만, 신노스케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입을 열었다.
“허허, 그런 명검이 자네만을 오매불망 바라보다니 부럽구먼.”
“과찬이십니다.”
“아냐, 명검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네. 기실 오랜 세월 검을 잡다 보니 나도 알겠어. 그 명검이 느꼈을 자네의 그 매력을 말이야.”
병준이 웃으며 답하자, 신노스케는 이 밤에 취한 건지 검명에 취한 건지.
“이 늙은이조차 마음 터놓고 의지하고 싶게 만드는 흥미로운 매력이 있어.”
조곤히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걷기도 그러하니, 괜찮다면 이 노인의 이야기나 들어주겠나?”
“물론입니다. 이 또한 교류의 일환이겠지요.”
“허허, 과연 그 말이 맞군.”
신노스케는 마침 옆에 널브러져 있는 나가의 사체를 보고는 씁쓸히 미소를 머금었다.
“이 나가들 말일세. 수해의 몬스터들이 강한 건 자연적인 이유에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네.”
“예?”
“암흑 마력을 이용한 인체 실험의 부산물…….”
그는 한층 무거운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어떤 범죄 조직이 수해에서 그런 일을 벌였다네. 특히 10여 년 전에는 국가급 재난의 괴물을 만들어 냈지.”
“10여 년 전이면…….”
불현듯 뭔가 떠올랐는지 병준이 되물었다.
“혹시 오로치 토벌전 말씀이신지요?”
그 이야기가 맞았는지 신노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일본 오로치 토벌전은 유명했다.
A급 헌터 십여 명이 사상당했으며 일본 유력 가문의 S급 헌터조차 죽었기에.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지만, 당시엔 박 국장도 지원을 와서 도와주었다네.”
“박 국장님께서요?”
그러고 보니 박철호가 리무진에서 마지막으로 일본 왔을 때 이야기를 했었다.
담담하게 말해 몰랐는데 그게 이 일이었다니.
“당시 토벌전으로 난 일본의 영웅이 됐네만, 사실 정말 힘든 일은 박 국장이 떠맡았다네.”
신노스케는 참회라도 하는 듯한 침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로치가 인간의 몸을 그릇으로 쓰려 했거든. 시로가네 히데키라는 헌터를 말이야.”
“잠깐만요, 시로가네라면…….”
“그래.”
특히 그 이름을 언급할 때는 더욱 그러했다.
“그 헌터는…… 나미코의 아버지였다네.”
신노스케는 마치 당시 상황이 눈앞에 그려 보인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히데키는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부탁했다네. 자신을 베어 달라고 말이야.”
“그게 박철호 국장님이었던 겁니까?”
“그래, 본래 내가 해야 했을 일을 그가 대신해 주었지.”
신노스케의 말에 병준은 나미코와 박철호가 서먹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이제야 그 둘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됐다.
“나미코가 탓해야 할 상대는 사실 박 국장이 아니라 나였어. 나였어야 할 터이거늘.”
신노스케도 이를 알고 있었는지 나지막이 탄식했다.
그러나 그는 한 국가 수장급 헌터답게 신세 탓만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직 이 일은 끝난 것이 아니라네. 그 원흉인 범죄 조직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어.”
공허했던 눈동자는 오히려 지금까지 풀어낸 과거의 일을 연료로 삼은 듯, 그 속에 은연중 도사리고 있던 불씨를 다시 피워 내며 말했다.
“기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자들은 일부였을 뿐이더군. 세계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어. 특히 최근에는 만주나 북한 같은 지역에서 말이지.”
“북한이라고요?”
북한이란 말에 병준은 번뜻 함경도 던전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기실 거기서 자신도 인체 실험을 하던 군벌 잔당 헌터의 악행을 목도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 군벌도 관련이 있었던 건가.’
“재차 말하지만, 정세가 심상치 않아. 폭풍 전야처럼 말일세. 그런 의미에서 이런 교류회는 무척이나 중요해.”
문득 신노스케는 걸음을 멈추더니 병준을 보며 말했다.
“거친 바람이 오고 있어. 그때가 온다면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