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마검의 주인이 되었다 122화>
“극우파에 안 좋은 매너라 확실히 그렇게 보이네.”
“저 한국어도 직접 비아냥거리려고 배웠다는 소문이 있죠. 근데 이번엔 저 인간이 나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과연 한국어를 배웠다는 말이 사실인지, 백수연의 말에 녀석이 직접 답했다.
“딴에는 S급이 됐다면서 의기양양하게 교류회 온 모양인데, 너무 궁금해서 말이야.”
“그래? 그럼 그 궁금증은 풀렸나?”
“크큭, 궁금증? 풀렸지. 나름의 실력은 있는 모양인데 그래봤자 역시 조센징이네.”
“그저 듣고 있어 줬더니 말이 좀 많이 험하군.”
히로아키는 비릿한 미소를 띠면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말이 험하다? 캬, 이것 봐. 이래서 주기적으로 밟아 줘야 하는데 교류회에 나가는 녀석들은 매번 순하거든.”
밟아 줘야 한다는 말에 어이없어진 병준은 할 말을 잃었다.
반면 히로아키는 더 기세가 올라 말을 이었다.
“그래도 걱정 마. 크큭, 격의 차이라는 것을 이 몸께서 직접 새겨줄 테니 말이야. 영광으로 알라고.”
그리 말하며 녀석은 검지를 앞에 세우고는 까딱거렸다.
더불어 입가에 한쪽만 씰룩거리며 드리운 미소와 고개를 탁 젖히며 보라색으로 물들인 앞 머리칼을 튕기는 제스처까지.
“왜 괜히 내 손발까지 다 오그라드는 것 같지…….”
아니, 병준 혼자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으으, 나 속이 안 좋아. 아까 저 새끼 윙크하는 걸 봤어, 웨엑!”
백수연은 아예 헛구역질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흘깃 보더니 히로아키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후, 내 패기에 눌렸나. 어쩔 수 없군. 특별히 용서해 주도록 하지.”
“아, 진짜 미치겠다. 병준 아저씨, 제발 저 새끼 닥치게 해 줘요. 아니면 내가 할까요?”
백수연이 살기를 뿜어내자 병준은 제지하고는 나섰다.
그러고는 히로아키를 향해서 말했다.
“이봐, 히로아키라고 했나? 솔직히 난 한일 양국 사이에 별 감정은 없어.”
“크큭, 왜 이러시나. 나도 마찬가지야. 서로 주제를 알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그 말에 병준은 한숨 내쉬곤 돌아섰다.
“어이, 어딜 가나? 개폼은 다 잡더니 도망쳐?”
뒤에서 놈이 이죽거렸지만, 병준은 계속 걸음을 옮기더니 연무장 가운데로 향했다.
“도망치기는.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격의 차이를 보여 줄 생각이다. 들어와라.”
“크큭, 역시 초짜. 주제도 모르는 녀석이군.”
녀석은 건들거리며 병준 앞에 섰다.
분위기가 이쯤 되자 한국의 A급 헌터뿐 아니라, 모두의 이목이 연무장 가운데로 향했다.
“저기 좀 봐.”
“한판 제대로 하려나 본데.”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녀석은 더 이죽거렸다.
“자, 이분은 한국의 새 S급 헌터이십니다. 한국에서 S급은 어느 정도 급이나 되는지 견식하려면 주목하세요.”
마치 광대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지껄이는 녀석, 한국어에 비하자면 어설픈 영어였으나, 그 뜻은 대략 통했다.
무엇보다 그들도 각각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헌터였던 만큼, 한국의 새로운 S급 헌터라는 내용은 시선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오, 저자가 한국의 S급 헌터인가.”
“그런 모양이야. 흠, 그런데 저자는 나카무라 히로아키 아니야?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분위기를 보니 한판 붙을 거 같은데…… 아무렴 어때, 새로운 S급의 실력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군.”
교류회에 참가한 많은 헌터가 흥미로운, 그리고 일부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교류회에 참가한 3국뿐 아니라 옵서버로 참가한 다른 나라의 헌터들도 대부분 그 소란에 관심을 보였다.
“참나, 기껏 거품 따위에 이런 반응이라니 과분해. 하여간 다른 S급들이 일을 안 하니까 이 몸이 고생이잖아.”
혼잣말과 짐짓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이 그야말로 일본 만화에서 나온 듯했다.
병준은 그를 한심하다는 듯 보다 나지막이 말했다.
“쓸데없는 말은 치우고 룰이나 정해. 일본에서는 피격 판정 아이템 같은 건 따로 쓰지 않는 건가?”
“뭐, 피격 판정 아이템? 샌님 같은 소리 하네. 이래서 한국은 급이 떨어지거든. 당연히 진검승부지.”
어느새 녀석은 허리에 차고 있던 커다란 수리검을 꺼내더니 손가락 위로 굴리며 덧붙였다.
“아니면 인제 와서 겁이라도 나신 건가? 사과한다면 용서해 줄 수도 있는데?”
더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병준은 조용히 물품을 점검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녀석은 꾸준히 키득거리며 주절거린다.
“무릎 꿇고 네 주제를 잘 안다고 사실을 시인하면 치욕은 면하게 해 주지. 어때?”
“실력을 우선하는 듯싶더니 말이 많군.”
룰도 정해졌겠다, 이제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적당히 클래스를 보여 주면서, 시끄럽고 정신 사납게 하는 쓰레기를 치워 버리는 일.
“선공을 양보하지.”
“허, 뭐라?!”
순간 녀석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역시 주제를 모르는군. 감히 너 따위가!”
여태까지 실컷 도발했으면서 막상 자기가 도발 당하자 너무 쉽게 넘어온다.
하기야 어쭙잖은 자만이 지나치면 으레 저렇기 마련이다.
병준은 한숨을 내쉬곤 손을 까딱거렸다.
“왜? 나불대더니 사실은 겁이라도 나셨나? 어차피……”
병준은 모비딕 크라잉을 투영하고는 마력을 끌어모아 권능을 일으켰다.
“선공하지 않으면 기회도 없을 텐데.”
그에 따라 마력지맥이 꿈틀거리더니 연무장 전체, 아니 이 일대가 준동했다.
쿠구구구구구구구-
개인전에 큰 위력을 보이는 권능은 아니나, 과시용으로는 충분했다.
“허엇?!”
아니나 다를까 히로아키는 준동하는 마력에 흠칫 당황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잠시나마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 수치스러웠는지 흥분하며 소리쳤다.
“이, 이잇! 내가 그런 사기 같은 수법에 넘어갈 병신이라고 생각했나?!”
츠파팟-
떠드는 입과는 다르게 몸은 솔직한지, 결국 녀석은 제 감정에 못 이겨 힘껏 땅을 박차더니 병준을 덮쳐 왔다.
동시에 녀석의 몸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나 싶더니 분신이 하나둘 늘어났다.
파파팟- 파파팟- 츠파팟-
그렇게 십여 명까지 불어난 실루엣은 시야를 어지럽히며 교란했고.
후욱! 화르르륵-
그 틈을 노려 후방에서 덮쳐들던 녀석 중 하나가 입으로 화염구를 토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반 박자 빠른 템포로 사각에서 사각으로, 분신들은 계속해서 불을 내뱉으며 연계했다.
“오오오, 엄청난 화공이야. 열기가 여기까지 전해지는데.”
“그것도 그렇지만 그냥 분신이 아닌 것 같아.”
“그러게, 열기를 봐. 화염 속성뿐만 아니라, 뭔가를 매개체로 만든 모양인데?”
그 모습을 보자 헌터들이 놀라며 수군거렸다.
허나, 막상 화염구의 포화를 받는 병준은 미동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그렇게만 보였으리라.
퍼펑- 펑!
하지만 일부는 금방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이미 주변이 불바다처럼 작렬하고 있건만.
작은 불씨 하나조차 그에게 닿지 못하고 있던 것!
순간순간 무형의 장벽이 명멸하며 화염을 밀어낸다.
헥타드 아다만트로 방패를 펼쳐 낸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병준은 공간 장악의 감각으로 히로아키의 움직임을 면밀히 읽어 내고 있었다.
“흠, 역시 그랬던 건가.”
곧 뭔가를 확신한 순간, 난무하는 화염과 분신을 엄폐물 삼은 수리검이 교묘하게 날아들었다.
“훗, 이겼…….”
목표는 병준의 명치. 그야말로 급소를 노린 회심의 일격이라, 이번 공격만은 절대 못 피하리라 여겼는지 녀석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으나.
채애앵-
수리검은 병준이 세운 검에 맞고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화려한 기술로 시선을 뺏고, 진짜는 이쪽이었군.”
“엇?!”
내지른 힘에서 밀려나 휘청거리는 녀석.
이대로 추격하면 간단하게 처리 가능했지만, 병준은 그렇게 쉽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사람이 말을 했다면 그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제대로 밟아 줘야지. 음…… 녀석의 장기를 그대로 돌려줘 볼까?’
조센징이니 뭐니 하는 말을 다시는 못 하게 하리라.
병준은 헥타드 아다만트의 방패를 거두고, 실피드 페리온으로 스와핑하며 즉시 가속 영역 권능을 전개했다.
파치칫- 파츠츠츳!
그리고 비어 있는 왼손에는 연기로 빚어낸 듯 흐릿한 형체의 마검을 투영했다.
바로 일루셔니스트였다.
“진짜 눈속임과 속도전의 조합이 뭔지 보여 주지.”
“흥, 우연히 막은 걸로 감히…… 허읍?!”
츠팟-
히로아키가 분신들 사이로 숨으며 지껄이는 찰나, 순식간에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오는 병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에 당황해 말을 하다 숨을 잘못 들이켜 호흡이 꼬였을 정도.
“칙쑈옷!”
녀석은 괴성인지 욕인지 알아먹기 힘든 말을 내뱉으며 겨우 뒤로 물러났으나.
후욱-
순간 병준의 모습은 연기로 화해 스러졌다.
일루셔니스트의 환영.
“분신을 다룬다는 놈이, 진짜 가짜도 제대로 식별 못 하나?”
대신 놈의 바로 뒤에서 병준이 나타났다.
“이, 이! 닥쳐! 어디서 감히 나불거……크윽!”
기겁하며 놈이 수리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그건 불가능했다.
마치 혼자 빨리 감기라도 한 듯 움직이는 모습은 따라가기도 벅찼으니. 아니, 이미 히로아키의 눈에는 칼날의 궤적은 보이지도 않았다.
츠팟- 파팟-
그저 병준이 사라진 뒤에 아릿한 고통이 허벅지에 엄습하자, 그제야 베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달았을 따름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앗 쿳쏘오!”
어떻게든 잔상이라도 득달같이 공격했으나 이번에는 환영이었다.
붕괴하면서 퍼지는 연기, 이어서 뒤에서 나타난 병준에게 다시금 어깨가 베이며.
파팟-
“커흐흑!”
사방팔방 흔들어 대는 공격에 녀석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분신들도 이미 그 형태를 유지조차 못 하는 상황.
치명상은 아니어도 곳곳에 상처가 쌓여 가며 연무장 가운데서 허둥거린다.
육체도 육체였으나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이 진행은 자신이 녀석에게 하려고 했던 그대로가 아닌가!
심지어 이 모습을 모든 헌터들이 지켜보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온 헌터들까지도!
‘칙쇼! 어떻게 이런…….’
그의 눈이 이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을 훑었다.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우러러봤음이 분명했는데, 이젠 모두가 수군거리며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하다.
빠드득-
그럴 순 없다. 절대로!
그 순간, 히로아키는 뭔가 결심했는지 소매에 숨기고 있던 암녹색 장침을 꺼내더니 스스로 심장을 찔렀다.
“커헉! 크흡, 으흐흐흐!”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 상체를 젖히더니 암녹색 된 눈동자.
뺨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혈맥도 차차 암녹색으로 물들었다.
다음 순간.
츠파파팟- 파앗!
병준의 검을 피하고 녀석이 반격해 왔다.
‘순간적으로 빨라졌네.’
저 침을 꽂은 이후, 확실히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출력이 더 강해졌다.
속도도 시시각각 빨라지는 중, 하지만 병준의 눈에는 그 외의 다른 것들도 보였다.
불안정한 파동과 급격히 뭉치며 뒤틀리는 근육들!
‘그 장침이 도핑 같은 거였나.’
“크크크큭! 이것만은 쓰지 않으려 했거늘, 이 기술까지 쓰게 만드는군.”
다만 비극적인 사실은 나름 비장의 수였을 터이거늘, 여전히 병준의 감각엔 놈의 움직임이 선명히 읽힌다는 사실이었다.
츠파파팟-
“커흑! 으으으아아아!”
우위를 점했다 여기며 자신만만하던 녀석은 여전히 공격이 닿지 못하자, 당황하며 더욱더 기운을 끌어올렸다.
눈과 피부색은 더 진하게 물들었고 근육과 핏줄은 흉할 정도로 뒤틀어졌다.
명백한 이상 상황!
이대로는 분명 얼마 못 가 목숨조차 위험할 터였다.
병준은 환영을 모두 지우고 멈춰 서며 말했다.
“그만하지.”
“웃기지 마라! 승부는 이제부터가 진…… 으윽?!”
히로아키가 반발하며 달려들려고 했지만, 예상보다 녀석의 상태는 더 심각했다.
바닥을 디디는 순간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어으, 이게 어째서…… 으헉?! 으그그그?!”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는 순간, 팔 근육이 심하게 뒤틀렸다.
아니, 팔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리와 몸통에 이어서 안면 근육까지.
그리고 뒤이어 따라오는 마력회로의 폭주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터질 듯이 부풀어 가는 전신의 근육!
“으어읏, 엑!”
놈이 지르는 비명은 상태가 얼마나 심한지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