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마검의 주인이 되었다 59화>
“아, 모르셨어요? 제이슨 정이라고, 제가 듣기로 어머니 쪽이 클리어리 가문 혈통을 직계로 이었다고 그러더군요.”
“빙한 계열로 유명한 미국 클리어리 가문, 바로 거기요!”
김철이 흥분한 어조로 추임새처럼 덧붙인다.
‘클리어리 가문 출신이었나.’
다만 그의 말이 아니라도 병준도 클리어리 가문에 대해서는 들어 본 바가 있었다.
아니, 그건 오히려 못 들어 봤으면 이상하려나.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헌터 가문의 한 곳이며, 특히 음지에서 영향력이 더 강한 집단.
‘왜 한용기가 그랬는지 이제 이해가 되네.’
클리어리 가문의 인재를 데려왔으니 자신의 앞길을 닦는 반석으로 쓰려는 속내인 듯싶었다.
“그리고 소문으로는…….”
말 터진 김에 김철이 수다를 토해 내나 싶었으나, 그는 곧 입술을 다시 닫을 수밖에 없었다.
막 그 말의 주인공인 제이슨 정이 대기실에 왔기에.
“…….”
까만 코트를 차려입고 손가락에는 반지를 주렁주렁 낀 차림.
그야말로 풀템으로 무장한 제이슨은 걸어오더니 병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묘한 분위기에 협회의 헌터가 먼저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지만.
“크흠! 반갑습니다, 저는 길잡이를 맡은 유준…….”
그는 뒷짐 진 상태로 잠시 훑어보더니.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그저 게이트 통로로 향했다.
썩어들어 가는 유준호 표정.
옆에서 그런 선배를 보는 김철의 어색한 얼굴.
‘하아, 잘 알지. 저 기분.’
플랫폼에서 근무하며 저런 진상을 많이 겪어본 덕분인지 유준호의 기분이 이해 가면서도.
‘그리고 보통 저런 녀석들이 실속은 부족하단 말이지.
포탈로 들어가는 제이슨의 뒷모습을 보며 병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 *
생추어리 던전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지형이었다.
정사각형의 일정한 영역이 허공에 떠 있다.
기묘하지만 이 표현이 가장 정확한 묘사였다.
마치 우주처럼 캄캄한 공간.
연속되는 타일이 섬처럼 표류하고 있으니.
그리고 캄캄한 공간 저편 하얗게 빛을 내는 또 다른 영역이 부유하는 게 보였다.
그중 가장 넓은 영역의 중앙에는 포탈이 위치했고.
우우우우웅-
단면이 파랗게 일렁이더니 인영들이 나왔다.
“들어왔군요. 여긴 이어지는 통로가 계속 변하고, 곳곳이 비슷하므로 주의하셔야 합니다.”
경고하는 유준호.
‘음, 확실히 자칫 길이라도 잃으면 영원히 헤매다가 죽기 십상이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병준은 선지자의 나침반을 꺼냈다.
일단 포탈이 위치한 이곳의 위치를 각인해 둔다.
그러는 사이, 길잡이가 뭐라 조언을 하건 말건 혼자 앞으로 가 버리는 제이슨.
“잠시만요, 제이슨 헌터님!”
유준호가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난 혼자 충분하다. 저따위 녀석과 같이 움직일 생각 없어.”
그러고는 자기 말이 절대의 법인 것처럼 다시 움직였다.
“하아, 저…쓰읍! 후우, 방금 전에 말했는데.”
“선배님이 참으세요.”
면전에 대고 말은 못 하겠고.
암에 걸릴 듯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는 유준호.
“병준 헌터님,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양쪽으로 갈려져서 사냥 가도 괜찮은지?”
“저야 뭐 상관없습니다만, 두 분께서 고생이네요.”
그저 간단한 격려 한마디였지만, 제이슨과 완전히 대비되는 태도에 유준호와 김철은 고맙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병준 헌터님은 타이탄 데몬을 사냥하신 적이 있으시죠?”
“네, 뭐.”
“그럼 저쪽에는 제가 붙고 철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히러 헌터에게 길잡이를 부탁하는 모습이라니 뭔가 반대로 됐다 싶지만.
그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철이 이 녀석이 좀 촐랑거려 보여도 길잡이로서 재능은 뛰어납니다. 제가 아는 만큼은 길 패턴을 다 외웠거든요.”
“헤헤, 다 준호 선배님이 잘 알려 준 덕분이죠.”
머쓱하게 웃은 김철.
하긴 그 정도 실력은 있으니 둘만 들어오는 이번 레이드에도 보내 준 것이겠지.
어쨌든 길잡이로서 한 사람 몫을 해낼 수 있다면야 안 될 이유는 없었다.
“딱 하나 문제가 이 녀석이 몬스터와 마주하면 굳는데…….”
“그건 제가 커버하죠. 그게 딜러의 역할이고 길잡이는 안내만 잘하면 되죠.”
병준이 답하자 그는 살짝 목례를 한 뒤 김철에게는.
“병준 헌터님, 잘 모셔라.”
“물론입죠!”
짧게 당부하고 제이슨이 간 방향으로 움직였다.
병준 역시 곧 제이슨이 향한 곳과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같이 가게 된 김철이 먼저 걸어가며 말했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은 저쪽에 곧 나타날 타일 영역과 연결되는데…….”
유준호가 말한 것처럼 길 패턴을 꿰고 있는지.
김철이 앞서 안내했고.
타일 영역 한쪽 끝에 가서 기다리자 김철의 말대로 캄캄한 영역의 저편.
이곳과 마찬가지로 타일이 붙어서 떠 있는 영역이 거대한 선박처럼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곳과는 달리 저쪽의 영역은 비어 있지 않았다.
뿔이 돋고 누런 눈알이 번들거리는 짐승 머리에 핼버드 든 상체는 인간의 것.
그렇지만 튼실한 허벅지에 무릎이 굽고 발굽으로 디디고 선 하체는 유제류의 모습.
그 외형은 틀림없이 악마종 특유의 그것이었다.
“쿠이이익! 쿠이익!”
“퀴익, 쿠이이!”
그리고 놈들이 뱉는 울부짖음에 김철이 멈칫하는 사이.
“고트 데빌이군요.”
먼저 말하는 병준의 말에 머쓱해하는 김철.
다만 여느 고트 데빌과 다른 점이 있었다.
놈들의 밑으로 회색 오라를 번지고 있는 것.
하물며 이쪽 기척에 어그로 끌렸는지, 어디선가 몰려들며 숫자가 계속 늘어난다.
그로 인해 오라가 겹치며 색깔이 점점 더 진해지고.
[ 퀘스트가 떴습니다. ]
“조심하세요. 저놈들, 저렇게 오라를 겹쳐서 방어력을 증폭한다고 합니다. 뭉치면 웬만한 공격은 아예 안 박혀요.”
김철의 설명과 함께 병준의 눈앞에 창이 떴다.
[ 악마종 학살 ]
*조건 : 뭉치면 더 강해지는 악마종 몬스터 대면
*내용 : 뭉치면 강해지는 특성의 악마종 몬스터 10마리 이상을 한꺼번에 사냥하여 몰살
*진행 : 0/10회
*보상 : 마검석 2개
숫자가 아니라 횟수라 이번 퀘스트는 사뭇 다르다.
“것보다 뭉치면 강해지는 특성이란 말이지.”
후우우욱-
나직이 중얼거리며 병준은 상아색 전자 담배를 물었다 연기를 내뿜었다.
그 모습에 김철이 고트 데빌 무리를 번갈아 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슬슬 사냥 준비 하시…어, 헌터님 무기는요?”
“제 무기는 이겁니다.”
“네?”
어느새 양 타일의 영역이 서서히 겹쳐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점프하면 넘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가까워진 거리.
“크에에엑!”
“크어억!”
이윽고 고트 데빌 십여 마리가 이쪽으로 뛰어들자.
김철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으, 으아악!”
그 순간!
병준의 손에는 어느새 전자 담배가 아니라.
가느다랗고 붉은 검을 쥐어 휘두르고 있었다.
쿠화하화하학-
그 궤적과 함께 불의 꽃잎이 흩날린다.
“크, 크익?!”
그 흐드러진 효과에 고트 데빌 움찔했고.
뭔가가 팔을 잡아 일으키는 힘에 김철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그로 안 튀게 저쪽으로 물러나 있어요.”
그 말에 일단 허겁지겁 내달리며.
김철이 걱정 반 호기심 반에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병준의 손에는 또 다른 검이 쥐어져 있었다.
의장용 검처럼 얄팍하면서도 묘하게 신성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검.
마치 유리로 빚어낸 투명한 검신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고트 데빌 사이 틈을 비집고, 무리 반대편으로 돌파한 병준.
거의 스칠 듯한 거리인데도 놈들에게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어떻게?!”
보고도 믿기지 않는 속도.
아니, 엄밀히 말해서는 그 동작을 미처 눈으로 좇지도 못했기에 그저 육성으로 감탄을 내뱉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정말로 놀라운 일은 그다음부터였다.
아직 허공에는 불싸라기가 곳곳에 남았고.
유리검을 수평으로 뉘며 기울이자 마치 프리즘처럼 불싸라기의 빛이 산란했다.
화려하게 흩날려져 있는 불꽃 사이에서 오연히 빛을 반사하는 투명한 검.
“크이익?!”
돌진하려던 고트 데빌들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 틈에 왼손에 또 하나의 마검이 추가되었다.
마치 환영처럼 흐릿한 검.
그리고 병준이 그것을 휘두르자 튀어나오는 분신들.
“크, 크이익!”
“크익!”
그것에 맞은 녀석들이 비틀거리며 허우적거렸고.
일부는 아예 그가 투사한 다른 분신들을 따라가기까지!
‘와…….’
그렇게 고트 데빌을 몇 마리씩 떼어 내며 물러나자.
흡사 녀석들을 한 줄로 세워 놓는 모양새가 되었다.
“어, 저거?!”
김철도 배운 적이 있었다.
다수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상황에서는 진형을 흩트리라고.
하지만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게다가 솔로잉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이 눈앞에서 너무나 쉽게 이뤄지고 있었다.
츠파팟- 파아앗!
그리고 마치 정석과도 같이, 남은 녀석들을 유리 같은 얇은 검으로 처리해 나가는 병준.
크게 한 방을 베고 꽂기보다는, 곳곳을 스치듯 얕게 베는 공격이었으나 신성 속성이 있는지.
상처에서 하얗게 불꽃이 피어나더니, 백린탄처럼 번지며 데빌 고트를 태웠다.
화르륵! 화하아아아아-
“크에에에엑!”
그렇게 따라오던 녀석들을 처리한 병준은 일렬로 세워진 나머지 고트 데빌 무리로 먼저 뛰어들었다.
이제 도망친다느니 하는 생각조차 잊었다.
김철은 두 주먹을 꽉 쥐고, 자신이 직접 싸우기라도 하는 듯 병준의 전투에 몰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내 희미한 역장의 오라가 스러지며 마지막 고트 데빌이 맥없이 널브러지고.
“크에에에…….”
신성력의 불길이 사그라진 자리에, 서 있는 고트 데빌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마검 투영을 해제하는 병준.
[ 타락 응징_퀘스트의 진행도가 올랐습니다. 15/100 ]
[ 악마종 학살_퀘스트의 진행도가 올랐습니다. 1/10 ]
두 눈에 비친 것은 바로 퀘스트의 진행도였다.
“좋았어. 타락의 돌에 기운도 많이 충전했고, 몰이 퀘스트도 이걸로 한 건 올렸군.”
확 오른 진행도에 저절로 미소가 드리우는데.
옆에서 김철이 소리쳤다.
“와, 역시 타이탄 데몬을 잡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전 그렇게 예술적으로 싸우는 헌터님은 처음 봤습니다!”
무슨 팬이라도 된 듯 입에서 멈추지 않고 쏟아내는 찬사.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그는 문득 정신이 들었는지, 머쓱하게 웃으며 호감 섞인 얼굴로 말했다.
“병준 헌터님은 쉬고 계십쇼. 몬스터 사체 산화하기 전에 마력 핵이랑 부산물은 제가 전부 알뜰하게 챙겨 놓겠습니다!”
그리고는 도축용 칼을 꺼내더니, 빠릿하게 움직이는 김철.
“그럼 좀 부탁드립니다.”
기왕이면 그에게 무조건 다 맡기기보다 도와주고 싶었으나 신경 쓸 것이 있었다.
늘 그렇듯 전투 후 마력을 흡수하는 일도 그렇지만.
“유리검 특유의 민첩성과 불싸라기검을 이용한 어그로. 그리고 일루셔니스트의 환영으로 흩어내는 전략이라…….”
전투를 복기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예상했던 전략이 확실히 먹혔어. 하지만 개선할 점도 몇 군데가 없지는 않았지.’
마검을 투영하는 타이밍이라거나, 연계하여 움직임을 더 매끄럽게 하는 보법 등.
단순히 마검을 여러 개 꺼내는 것이 아닌, 더욱 자연스럽고 세밀한 마검 간의 연계에 집중해야 했다.
“병준 헌터님, 작업 다 끝냈습니다.”
그렇게 전투를 복기하는 사이 어느새 도축을 마쳤다.
그런 그를 향해 병준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다시 가 볼까요?”
“예?”
살짝 당황하는 모습.
“저야 한 게 없어서 체력이 멀쩡하지만, 아까 그렇게 사냥하셨는데 쉬시는 편이…….”
“체력은 문제없습니다. 그보다는 복기하면서 고트 데빌 사냥법을 조금 개선해 봤거든요.”
병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인지 얼른 사냥하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말투는 부드럽지만, 이미 그의 양손에는 불싸라기검과 일루셔니스트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전의로 불타는 두 눈빛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냥하고 싶다는 확실한 뜻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