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단칼
“나머지 정령왕들을 모두 소집해야겠다. 문제는 엘프가 아니었어. 바로 너희들이다.”
루터의 신랄한 지적에 노아스는 말이 없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현 이종족 사회는 엘프로 인해 갈등이 싹 틔웠고, 그 원인은 당연히 정령왕들의 욕심 때문이다.
루터는 노아스를 쳐다봤다.
부르지 않고 뭐 하고 있냐는 무언의 시선이다.
침묵하던 노아스가 시선의 압박에 못 이겨 말문을 열었다.
“난 그들과 오랫동안 척을 지었다.”
“그래서? 만나기도 싫다는 것이냐?”
“그래.”
루터는 노아스의 고집에 혀를 찼다.
“엘프 사회의 문제보다 너의 고집이 우선인 것 같으냐? 이대로 가다간 엘프는 자멸한다. 설마 그러기를 바라나?”
그의 경고에 노아스의 눈이 흔들렸다.
루터가 다시 채근했다.
“잘 들어라. 역사는 반복한다. 현 엘프의 상태로는 외부의 적을 감당 못 한다. 만약 인간들과 대척을 한다면 반드시 자멸하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드래곤의 지배를 받았던 것처럼 엘프 역시도 인간들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때 힘을 합쳐 나선다면 이미 늦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잡을지 말지는 오로지 네 선택이다.”
루터는 노아스가 계속 뻗대면 자신의 추측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예상했다.
상황이 그랬다.
인간들은 연방 통일 제국이 되어 하나로 응축되었다.
유일한 불안감이었던 질리언의 수작도 이제 자신에게 가로막혔다.
황자들은 황제가 되기 위한 시험대에 올랐고, 누가 올라서건 제국은 새로운 황제를 통해 도약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헌데 정령왕들은 여전히 서로 싫다 좋다는 애들 싸움을 하고 있다.
바로 잡아야 한다.
‘내가 줄 수 있는 기회는 여기까지다.’
노아스가 거절하면 끝이다.
그가 내민 손은 바로 희망이다.
거부하면 나락이다.
노아스는 루터의 의미심장한 경고에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뜻에 따르겠다.”
루터의 말이 맞다.
이대로라면 다시 과거처럼 파멸을 면치 못한다.
누군가 수습을 해야 했고, 그 대상은 4대 정령왕 모두가 인정하는 존재여야만 했다.
허나 그 어느 누구도 정령왕 모두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딱 한 존재를 꼽으면 바로 눈앞의 루터다.
그는 자신들을 구했고, 엘프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이제 믿을 대상은 루터뿐이다.
노아스는 체면과 자존심을 모두 버렸다.
엘프 사회를 다시 견고히 다지려면 현재의 혼란을 바로 잡을 기반이 필요했다.
노아스는 그 기반이 바로 루터라 확신했다.
노아스의 방문을 반가워하는 정령왕은 없었다.
모두의 생각이 다르고 의견 차이가 심했다.
마지막 만남의 기억이 좋지 않으니, 당연히 꺼렸다.
하지만 노아스는 단 한 마디로 정령왕들의 불편한 기색을 잠재웠다.
“루터가 돌아왔다. 그가 우리 모두를 보고 싶어 한다.”
루터의 존재는 정령왕들에게 남다른 의미였다.
그가 부르니 당연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정령왕들 모두가 루터가 있는 땅의 정령계로 진입했다.
루터는 가시처럼 솟아오른 사파이어 광물 위에 서 있다 정령왕들을 바라봤다.
나타난 정령왕들은 루터를 반겼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잠을 오래도 잤어. 이제 활동하는 건가?”
“이제 거인이 기지개를 켜는군.”
“다시 보니 반갑다.”
은연중에 루터를 자신에게 끌어들이려는지 서로 간에 눈빛 경쟁을 벌인다.
루터는 정령왕을 둘러보며 일침을 가했다.
“너희들 때문에 엘프들이 다시 몰락하게 생겼다. 그 사실을 알면서 지금 반갑다는 말이 나오나?”
갑작스러운 꾸중에 정령왕들의 시선이 당혹감이 스쳤다.
루터가 혀를 찼다.
“한심하다. 너희들을 보니 어째서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엘프들이 드래곤의 지배를 받아왔는지 알겠다. 엘프 사회를 견실하게 다질 거라 기대했는데, 현재를 보라. 모두 엉망으로 망가트렸어. 그 모두가 너희들로 인해 비롯된 것이다. 어째서 엘프들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놨지? 지금의 엘프 사회가 너희가 원하는 결과였나?”
쉴 틈도 주지 않고 쏘아붙이는 말에 정령왕들이 신음을 삼켰다.
미네르바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언사가 거칠어졌어.”
엘라임은 루터의 지적이 체감 되는지, 한숨을 깊게 내쉬었어.
“미안해. 면목이 없어.”
샐리온은 당당했다.
“내 말을 들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어. 지금의 엘프 사회는 너희들이 벌인 짓이다.”
그의 변명에 미네르바가 고개를 홱 돌렸다.
희끗한 형체에서 내뿜는 기운이 살벌했다.
“너는 항상 그랬지. 항상 우릴 무시하고 무조건 본인이 옳다고 해. 이게 정말 네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너희들이 내 뜻을 따라주지 않았으니 이렇게 된 게 아니더냐.”
“우리가 어째서 네 뜻을 따라주어야 하지? 같잖은 대장 노릇은 그만하지 그래?”
샐리온의 눈에 열기가 차올랐다.
“말 다 했나?”
“아직 안 끝났는데?”
미네르바가 비웃음을 흘렸다.
열기가 피어오르는 샐리온에 뒤지지 않겠다는 듯 그의 주변에 회오리가 솟아올랐다.
루터는 팔짱을 끼며 상황을 지켜봤다.
‘가관이군.’
샐리온과 미네르바는 팽팽하게 대치했고, 노아스는 방관한다.
그나마 엘라임이 중재하려는 기미를 보이지만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더는 지켜보지 못하겠군.’
보다 못한 루터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대책이 나왔다.”
은연중에 흘린 말인데, 모두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답답했던 엘라임이 그 말을 얼른 받았다.
“대책이라니? 무슨 대책이라도 있나?”
“그래. 너희들을 엘프 사회와 차단시켜야겠다.”
그의 말에 정령왕 모두가 흠칫했다.
미네르바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타협점 없이 평행선만 달리고 있어. 서로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으려 하니 정령의 영향을 받는 엘프들이 그 모양이겠지. 이제 너희들과 엘프 사회의 접점을 없애겠다. 그들은 정령을 부리지 못할 것이며, 너희들은 그런 엘프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샐리온이 즉각 반박했다.
“우리와 엘프를 떨어트리겠다고? 그게 진심인가?”
“그래. 진심이다. 너희들이 하는 꼴을 보자니 도저히 못 봐주겠다. 너희들로 인해 엘프들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어. 그렇게 둘 수 없지.”
루터는 엘프가 중요한 종족이라 여겼다.
그들은 누구보다 자연을 사랑하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한다.
그런데 정령왕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이대로 둔다면 반드시 몰락이 찾아온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엘라임이 사정했다.
“루터. 그대가 이끈다면 분란은 없을 거야.”
“그건 미봉책에 불과해. 게다가 나는 이미 세계를 관조하기로 마음먹었다. 각자의 사정은 각자가 해결하라. 쓸데없는 아집만 내세우는 너희들이 진절머리가 나는군. 모두 돌아가라. 너희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
일방적인 지시에 샐리온이 눈에 불을 켰다.
“우릴 엘프들과 떨어트리게 된다면 오히려 몰락이 더 빨리 찾아올걸?”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그들은 정령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깨우치게 될 거다. 아울러 기존의 그릇된 사회를 반성하는 계기가 될 거다. 너희들의 존재는 엘프 사회를 방해하고 있다.”
“우리가 순순히 물러설 것 같은가?”
샐리온의 저항에 루터는 코웃음을 쳤다.
그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더니 샐리온의 전면에 다가섰다.
루터가 무심한 눈으로 물었다.
“물러서지 않으면? 어찌할 텐가?”
샐리온은 말없이 신음을 삼켰다.
루터가 나직이 말했다.
“미리 말해두건대, 난 드래곤이 아니다. 난 그들과 다르다. 내 뜻을 거역하면 단순히 큰 상처를 입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루터는 공허였다.
공허는 시작과 끝.
지금의 정령왕을 아예 소멸시키고, 새로운 정령왕을 만들 수도 있었다.
샐리온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루터는 근본적으로 드래곤과 달랐다.
예전의 그는 드래곤을 거의 단독으로 몰살시켰고, 낙사노르의 마왕을 궤멸시켰다.
그런 그에게 저항은 무의미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 루터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절대자였다.
루터의 단단한 경고가 먹힌 것인지, 샐리온의 기세가 죽었다.
엘라임이 애원했다.
“우리가 잘못한 걸 인정해. 앞으로 노력할 테니, 부디 엘프들과 떨어지라고 말하지 말아 줘.”
“영영 떨어트린다고는 말 안 했다. 하지만 지금은 떨어져야 한다. 헌 집을 버려야 새집을 짓는다. 지금 엘프들에게 필요한 건 바로 새집이다.”
정령왕들의 얼굴이 멍해졌다.
루터는 그런 정령왕들을 무심히 바라본 뒤, 몸을 돌렸다.
‘이미 정해져 있는 해답을 찾아야겠지. 하지만 그때까지 정령은 없다.’
엘프에게 있어 정령은 생명의 젖줄과도 같다.
정령을 차단하면 엘프 사회는 대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해야만 한다.
엘프를 보존하려면 정령왕들이 바뀌어야 한다.
현재는 그럴 기미가 전혀 없으니, 자신이 나서 강제로 해결해야 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어느 종족이건 위기가 찾아오면 늘 그랬듯 해답을 찾기 마련이다.
그 과정 속에서 고통과 혼란이 생기겠지만 큰 걱정이 들지 않는다.
‘내가 그런 것처럼 너희들도 그래야만 한다.’
루터는 설산족에게 자유 의지를 주어 스스로 자립하게 했다.
그러나 엘프족은 아직도 포대기에 감싸 있는 아기였다.
아기는 언젠가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 과정이 엘프들에게 필요했다.
드래곤 영역의 숲을 바라보는 루터.
그러나 그는 단순히 보이는 숲에 시선을 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바로 정령.
4대 원소 정령들이 세계에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엘프들에게 부림을 받는 정령을 본 루터는 자신의 결단에 확신이 섰다.
‘정령들이 괴로워하는군.’
사회를 관찰하려면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을 보라 했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귀족은 풍요롭지만 평민은 가난하다.
정령왕들은 자기주장만 펼치기 급급했지만, 엘프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정령들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곳곳에서 동족 간의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하위 정령들은 엘프의 명령을 받고 엘프를 죽여야 한다.
그들의 괴로운 목소리가 숲 전체를 휘감았다.
루터는 과거를 회상했다.
정령계가 큰 타격에 입어 고통에 울부짖던 그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무책임한 정령왕들을 더 이상 세계에 간섭하게 둘 수 없다.
결심을 내렸으니 실행이다.
루터는 손을 뻗어 현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정령계를 건드렸다.
순환하던 정령계가 갑자기 일방적으로 정령들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숲에 머물던 정령들이 모조리 정령계로 빨려 갔다.
루터는 병뚜껑을 밀봉하듯 정령계의 입구를 막아 두었다.
부리려는 정령이 사라지니 당연히 전투 중이던 엘프들은 경악이 터트렸다.
“실피드! 실피드!”
“나타나라 샐러맨더!”
“대체 왜 공격하지 않는 거야!”
“아니! 정령들이 모조리 사라졌어!”
현장의 다급한 외침이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루터는 혼란에 빠진 엘프들을 무심히 바라봤다.
‘헌 집을 무너트리고 새집을 짓는다.’
현 엘프 사회에 충격을 주지 않는다면 올바른 사회를 재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완전히 무너트려야 한다.
정령의 부재는 엘프 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엘프 사회에 극단적인 처방 약을 내린 루터는 이제 시선을 돌렸다.
다음 차례는 수인족이었는데, 그곳에 키아라가 있다.
‘키아라가 이제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문제가 있긴 있다는 건데.’
이번에는 별문제가 없길 바랐지만, 어째 쉽지 않을 것 같다.
루터는 키아라가 있는 수인족 영역을 향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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