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해츨링2
거대한 드래곤의 알은 총 세 개였다.
특징은 뚜렷했다.
하얗고 붉고 푸르다.
루터는 각 알의 속성을 알아차렸다.
“드래곤의 속성은 어떻게 정해지지?”
“자아가 형성되면 스스로 선택하게 되네. 예컨대 자신에게 맞는 맞춤형 속성을 알아서 선택한다고 보면 돼.”
“골드 드래곤은 없군.”
“골드 드래곤은 둘 이상이 나올 수 없어. 내가 골드 드래곤인 이상 더 이상은 없네.”
“자네가 골드 드래곤일 줄은 몰랐어. 그 때문에 쫓겨났나?”
루터는 드래곤 사회에서 골드 드래곤은 딱 한 개체만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 골드 드래곤은 드래곤 사회의 수장인 로드가 된다.
헌데 콕스는 골드 드래곤이지만 드래곤 사회에 자진해서 빠져나왔다.
어찌 된 일일까.
콕스는 루터의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난 원래 골드 드래곤이 아닐세. 원래는 레드 드래곤이었어.”
“레드 드래곤?”
“그래. 그런데 자네가 드래곤을 전부 제거하지 않았나. 그 탓에 홀로 존재한 드래곤이 골드 드래곤의 속성을 부여받게 된 걸세.”
“호오. 흥미롭군. 전이가 되는 건가?”
“종족 자체의 고유 특성이야. 중요한 역할이지. 일종의 여왕벌의 역할을 역임해야 하거든.”
“여왕벌?”
“골드 드래곤은 알을 낳을 수 있으니까.”
“다른 드래곤은 생식 능력이 없나?”
“맞아.”
“그렇다면 전임의 골드 드래곤은 자네의 부모였겠군.”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지. 하지만 자네가 알다시피 썩 좋은 부모는 아니었어.”
“그건 또 그렇군.”
루터의 표정이 묘했다.
그렇다면 이전의 골드 드래곤은 자신이 낳아 기른 드래곤을 다시 잡아먹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제 보니 드래곤 사회는 콩가루 집안이었군.”
루터의 감상에 콕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게 정답이야.”
“이제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길 바라네.”
“내 역할이 중요하긴 하지.”
콕스의 목소리가 들떴다.
루터는 콕스의 생각이 바뀐 계기가 스스로가 골드 드래곤이 되면서부터라고 짐작했다.
‘결국 드래곤 종족은 부활하겠군.’
콕스가 있으니 다시금 살아날 것이다.
‘과거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되네.’
짐작은 간다.
콕스는 악령과 성향이 비슷하다.
무난히 종족을 재건은 하겠지만, 그 이상의 야욕은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대화를 하고 있는 와중에 알이 반응을 시작했다.
루터의 세계의 마나는 순도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모든 것의 끝이자 시작인 공허에서 직접적으로 추출하여 태초 마나 상태와 같다.
순수한 태초의 마나를 빨아들이는 알에서 본격적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일주일이 지나자 알에 변화가 생겼다.
드드드득!
거대한 알의 껍데기에 균열이 일어났다.
루터와 콕스는 대화를 멈추고 알을 바라봤다.
성미가 급한 속성을 타고 난 건지 불그스름한 알에서 먼저 해츨링이 모습을 드러냈다.
까아아악!
울음과 함께 붉은 주둥이가 튀어나오더니 2미터 크기의 해츨링이 얼굴을 내밀었다.
까득! 까득!
“드디어 깨어났다.”
콕스의 감격 속에 해츨링이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알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루터는 혀를 내둘렀다.
“과격한 녀석이구나.”
“레드 드래곤은 대개 저래.”
탄생을 자랑하듯 알을 부수며 깨어난 레드 드래곤 해츨링을 바라보며 루터가 물었다.
“이름은 정했나?”
“카나플린. 자네의 룬어를 따왔네.”
“이름처럼 용맹한 것 같긴 하군.”
카나플린의 탄생에 이어 블루 드래곤의 껍질도 변화를 일으켰다.
콰직!
타원형 알의 정중앙에 주둥이가 툭 튀어나오더니 이내 부들거렸다.
“도와줘야겠는데?”
루터의 제안에 콕스가 용언을 사용했다.
껍질에 박힌 주둥이가 풀리고 곧 해츨링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집스럽게 생긴 카나플런과 다르게 다소 순진해 보였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콕스를 바라보는 해츨링이 날갯짓을 하며 기쁨을 드러냈다.
콕스가 잔잔히 말했다.
“네 이름은 파메이라. 현명한 자라는 뜻이다.”
알아들었는지, 울음을 터트린다.
마지막 화이트 해츨링은 시간이 흘러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콕스가 염려를 담아 중얼거렸다.
“왜 깨어나지 않는 거지?”
루터는 알 내부를 바라봤다.
새하얀 해츨링이 날개를 덮은 채, 바닥에 엎드려 있다.
“자고 있는데?”
루터의 감상에 콕스가 인상을 그리더니, 직접 알을 깼다.
그의 말대로 곤히 잠을 청하고 있다.
콕스가 허탈하게 말했다.
“독특한 아이로군. 보통 알에서 의식을 차리는 순간, 스스로 답답하여 일부러라도 깨고 나올 텐데.”
“천성이 느긋한 모양이야.”
“이 화이트 해츨링은 멜바니아라고 지어야겠군.”
“이름처럼 인내심이 강하기보다 잠이 많은 것 같군.”
어찌 되었건 드래곤 종족 재건의 기틀이 될 해츨링이 깨어났다.
콕스가 미래를 내다보는 것처럼 예견했다.
“곧 드래곤 종족의 번영이 시작되리라. 수많은 이들의 적대감을 마주하겠지만 현명함으로 이를 이겨낼 것이다. 부디 현명한 종족으로 거듭나기를.”
콕스는 부디 과거의 실수를 되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깨어난 해츨링은 이내 서로 뒤섞이며 어울렸다.
레드 해츨링 카나플린이 가장 활발했고, 파메이라는 적당히 움직였다.
반면, 멜바니아는 머리를 바닥에 붙인 채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개성이 뚜렷했다.
루터는 해츨링들이 서로 어울리는 동안 앞으로의 계획을 나눴다.
“이 세계를 빌려주게. 여긴 드래곤이 자라기 가장 좋은 터전이야. 누구의 방해도 위협도 없는 데다가 순수한 마나가 풍부해. 자라기 좋은 환경이지.”
“자네가 원한다면 그리하게.”
“휴. 고맙네. 이제 앞으로의 시련을 이겨내야겠어.”
“쉽지 않을 거야.”
“그렇겠지.”
루터의 장담에 콕스가 씁쓸히 대답했다.
드래곤의 처지는 과거와 많이 다르다.
드래곤은 한 때 멸족에 이르렀고, 지금도 드래곤의 부활을 반기는 이들이 없다.
갈등은 당연하고 심하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콕스는 예전과 달리 드래곤이 절대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단 각 종족의 문명이 크게 발달했다.
각자 다른 형태로 마도학에 대한 기술이 발전해 드래곤에게 크게 열세도 아니다.
거기에 그들 자체에게 드래곤에 대한 적개심이 깃들어 있다.
인간은 덜할지 모르겠지만, 피해를 입은 설산족이나 이종족들은 드래곤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잘 설득할 수밖에.”
자조적인 콕스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루터는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 바쁘겠어.”
“그래야지.”
의욕에 찬 콕스를 보니 묘한 감정이 든다.
‘처지가 바뀌었군.’
과거의 자신과는 다르게 자유를 만끽하던 그들은 이제 책임감을 띠고 있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지.’
모든 존재는 목적성을 띠기 마련이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도 주어진 사명을 수행할 때가 온 것이다.
콕스가 툭 하니 물었다.
“자네는 이제 뭘 할 건가? 인간과 이종족의 갈등을 해결할 건가? 아니면 전에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영지를 세울 건가? 그때는 일개 영지에 그쳤지만, 지금은 세계 전체를 통일할 수도 있겠어.”
루터가 만든 설산족과 해방시킨 이종족. 그리고 인간들까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 종족이 하나의 거대 국가로 탄생할 수 있었다.
콕스의 기대에 루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거창한 계획을 세울 생각은 없다. 이미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다 이뤘어.”
그는 악령과 나눴던 자신의 계획을 다시 들려주었다.
경청하던 콕스가 실소를 흘렸다.
“느긋하게 여행을 다니겠다는 건가?”
“왜? 안 될 거라도 있나?”
“아니. 자네와 어울리지 않아서. 늘 바빴잖나.”
“이제 좀 쉴 생각이다.”
“하긴.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긴 했어.”
루터를 물끄러미 보던 콕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황이 바뀌었군. 이제 자네는 과거의 내가 되었고, 나는 과거의 자네가 되었으니까.”
“악령도 그러더군.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악령과 자네는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
“아, 악령 말인가. 그 친구도 나와 비슷한 처지긴 하지. 그와 나는 스스로 자유를 포기했어. 하지만 옳다고 생각하네.”
“책임감 없이 마냥 자유로운 게 무조건 즐거운 일은 아니지.”
“맞는 말이야. 그나저나 정말 여행만 할 생각인가? 자네의 도움을 바라는 이들이 꽤 많을 텐데 말이야. 특히나 이종족은 더욱 간절할걸?”
“키아라가 깨어났다.”
“키아라? 자네에게 유독 집착하던 그 무시무시한 처자 말인가? 깨어났으면 자네 곁에 있을 텐데 지금 없는 걸 보니 어디에 간 모양이지?”
“키아라는 수인족에게 애정이 있어. 아마 지금쯤 수인족과 함께 있을 거다.”
“흐음. 그래? 이것 참. 공교롭군. 가봤자 골머리만 앓게 될 텐데 말이야.”
“골머리라니?”
“나 역시 외부와의 소식이 단절된 지, 꽤 되었으니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떠나기 직후부터 이종족 사이에서도 갈등을 겪더라고.”
“갈등? 어떻게?”
“서로 같은 종족끼리 똘똘 뭉치기 시작한 거야. 예컨대 드워프는 드워프끼리. 수인족은 수인족 끼리 말이야. 게다가 수인족은 일단 수인이긴 하지만 형성된 종이 다르니 또 갈라서게 되더군. 이종족 사회는 이미 공동체 사회를 포기했어. 종족이 다르다는 건 성향도 다름을 의미하지. 불협화음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거야.”
루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인간과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내부에서도 갈라서고 있다 이 말인가?”
“그래. 그래서 인간들이 항상 자잘한 전쟁이나 전투에서 우위에 서고 있지. 질리언이 황제로 있던 시절에는 인간 영역에만 집중하여 평화 무드가 오갔지만, 지금은 또 다르겠지. 어쩌면 같은 종족끼리라도 서로 헐뜯는 건 인간들도 못지않으니 이종족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균열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지.”
루터는 쓰게 웃었다.
“갈등은 세월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군.”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야. 인간과 이종족들은 애초에 글렀어. 그들은 끊임없이 갈등과 분란을 일으키게 될 거야. 오직 한 군데만 빼놓고 말이지.”
“한 군데?”
“설산족. 그들은 달라.”
콕스가 단호히 말했다.
“갈등도 없고 분란도 없어. 서로 헐뜯지 않고 비난하지도 않아. 그들은 서로를 아끼고 존중해. 그래서 그들은 설산을 넘어 낙사노르를 평정했지. 현 대륙에서 가장 번성한 곳은 다름 아닌 설산족이야.”
“그래?”
“루터. 이런 말을 하긴 조금 그렇지만, 아무래도 칼루아를 만나 봐야 할지도 모르겠네.”
“무슨 말인가?”
“좀 모호한데 말이야.”
어색한 표정을 짓던 콕스가 이내 내심 담아놓은 생각을 꺼냈다.
“어쩌면 설산족이 결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 같아.”
“결단? 무슨 결단.”
“내가 그들을 떠나기 전부터 은연중에 감지되었는데, 설산족의 낌새가 심상치 않아.”
“그게 무슨 뜻인가?”
“설산족은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한 채, 자신들의 세상을 구축하고 있어. 그런데 인간과 이종족들은 확장을 위해 설산족의 세계를 넘보고 있단 말이지. 현재는 설산족이 일부러 충돌을 피하는 느낌이지만, 가까이서 지켜본 설산족은 외부의 존재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거든. 아마 인간과 이종족들의 자극이 지속될 경우 결단을 내릴 수도 있어. 그리고 그들이 결단을 내리면 세상은 정말 위험해져.”
콕스는 설산족에 대한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가 인간 영역으로 몸을 피신한 데에는 설산족의 영향이 가장 컸다.
루터는 콕스의 설명이 와 닿지 않았다.
“설산족이 결단을 내리면 세상이 위험하다고?”
“직접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래?”
루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설산족은 자신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종족들이다.
그런 그들이 세계에 위험을 줄 수 있다 하니 아무래도 직접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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