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정리
아나토스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검투로 정면 승부를 유도했다.
회피하면 비겁하다는 식의 도발을 했지만, 기사의 명예는 우습게 생각하는 루터에게 통할 리가 전무했다.
루터는 일부러 가지고 놀 듯이 거리를 이용하여 목창으로 콕콕 찔렀다.
타악!
투구를 도발하듯 툭 건드린 목창이 이번엔 번개같이 어깨를 찌르고 명치, 복부, 허벅지로 이어졌다.
가판대에 오른 생선의 상태를 간 보듯 찔러대자 모욕감에 아나토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가 고함을 질렀다.
“이 비겁한 새끼!”
욕설에 루터의 표정에 비웃음이 감돌았다.
“스스로 자빠져 불리함을 자처해놓고 이제 와 비겁하다고 하느냐?”
정곡을 찌르자 아나토스가 이를 악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상 시합에서 스스로 낙마하여 검투를 자처하는 것은 불리함을 떠안고 시작하는 것이다.
게다가 검투를 응하고 말고는 상대의 의사에 따라 달렸다.
아나토스가 비겁하다 할 처지가 아닌 셈이다.
루터는 아나토스를 괴롭혔다.
계속 찌르기를 멈추지 않자 어지러이 검술을 펼치던 아나토스가 참다못해 검을 내질렀다.
냉철한 이성이 날아간 순간적인 충동이었다.
검은 정확히 루터의 안면을 노렸다.
루터는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살짝 꺾어 피한 뒤, 다시 목창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찌르지 않고 횡으로 그었다.
찰싹!
부드럽게 하단에 포물선을 그린 목창이 아나토스의 엉덩이를 때렸다.
찰진 소리에 관람하던 군중들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아나토스가 낙마한 이후로 내내 침묵이었다.
그를 응원하던 군중은 보다 못해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대결이 아니라 농락이었다.
작년 준우승자의 위용이 고꾸라졌다.
아나토스를 보는 관중의 시선에 실망감이 어렸다.
“으아아아! 이노옴!”
계속된 농락에 아나토스가 고함을 지르며 무작정 달렸다.
루터는 목창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쾅!
목창이 투구를 강하게 때렸다.
전과 달리 강력한 충격이었다.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던 아나토스가 결국 바닥에 드러누웠다.
루터가 목창을 들어 올렸다.
군중들은 승자를 축하하지 못했다.
과정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압도적인 실력을 비춘 루터의 신위에 모두가 소리 없는 경악을 질렀다.
결투가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가는데 다음 순서인 칼츠가 길을 가로막았다.
그의 시선이 차가웠다.
“너무 심했네.”
“자업자득이죠.”
“그래도 이건 아니야. 이번 대결로 아나토스의 명성은 바닥에 떨어졌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걸세.”
추악한 패배의 과정을 지켜본 군중들이 전과 같이 아나토스를 받아줄 리 없었다.
칼츠가 물었다.
“한 기사의 인생을 끝장낸 기분이 어떤가?”
“그 기분은 당신이 더 잘 알 것 같군요.”
“무슨 뜻인가.”
“다음 차례는 당신이 될 테니까.”
루터는 전과 같이 적당히 받아주지 않았다.
이제부터 진짜배기 싸움이다.
칼츠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는 전과 같이 루터에게 운이 통할 것 같으냐고 말하지 않았다.
루터는 진짜 실력자다.
더 이상 만만히 볼 수 없었다.
신성의 등장은 기존의 실력자를 긴장케 한다.
루터는 긴장한 그를 지나쳐 캔버라 남작이 있는 관람석으로 향했다.
돌아온 그를 캔버라 남작과 듀크 등이 환영했다.
축하를 받는 동안 경기장에서 칼츠의 차례가 시작되고 있었다.
달리는 마상에서 칼츠가 무난히 상대를 꺾었다.
그러나 칼츠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 경고를 많이 의식했나 보군.’
너무 겁을 줬을까.
곧 성사될 칼츠와의 대결은 재미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성의 등장은 주목을 불러일으킨다.
루터는 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여러 장의 초대장을 보며 캔버라 남작을 바라봤다.
“이게 다 뭡니까?”
“자네와 인연을 트고 싶은 승냥이들이지. 자네를 휘하에 두고 싶은 귀족도 있고, 정복하고 싶어 하는 영애도 있을 걸세. 곧 마상 시합의 결승에 오를 텐데 이 정도 인기는 당연하지.”
관심이 뜨겁다.
초대장은 대부분 무도회나 연회. 그리고 사교 클럽도 포함되어 있었다.
루터는 영 관심이 없었다.
귀족들의 허례허식은 질린다.
은근히 돌려 말하는 정치적인 족속들이라 얽혀봤자 지루하기만 할 뿐이다.
루터는 초대장을 치우고 캔버라 남작과의 향후에 대해 논의했다.
“드레이스 마상 시합에서 우승하면 엘몬트로 가는 겁니까?”
“맞네. 엘몬트는 전 대륙의 지역에서 열린 마상 시합의 우승자들만 모여 자웅을 겨루는 곳이지. 진정한 실력자들의 세계에 들어서는 거야.”
마상 시합의 인기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루터는 참가할까 말까를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참에 이종족 영역으로 가 봐야겠다.’
슬슬 오랜 인연들이 보고 싶다.
“우승해야겠군요.”
“이미 따 놓은 당상일걸. 내 측근 말로는 칼츠가 승리를 하고도 기뻐 보이지 않다고 하더군. 아마 자네와의 대결을 염두하고 겁을 먹고 있는 게 분명해.”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 드레이스 마상 시합의 우승자는 바로 접니다.”
“축하하네.”
미리 승리를 확정 짓는 것은 오만한 발상이다.
하지만 캔버라나 루터나 그렇게 자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가장 막강한 상대인 칼츠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
마상 시합에서 기세는 가장 중요하다.
그런 그가 긴장을 하고 있으니 이미 대결은 불 보듯 뻔했다.
야심한 시각.
하루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려는 루터의 예민한 감각에 이질감이 걸렸다.
루터는 이 이질감의 정체를 알았다.
‘오랜만이네.’
어둠의 힘이 나타났다.
너무 오랜만이라 이제는 반가울 지경이다.
루터는 어둠의 힘을 쫓았다.
도시의 야경을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파묻혔다.
어둠 속에는 두 인영이 서 있었다.
하나는 칼츠였고, 다른 하나는 로브로 얼굴을 감춘 남성이었다.
칼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강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오?”
맞은편의 남성에게서 가벼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이지. 선택은 자네의 몫이네. 어찌할 텐가.”
“끄응.”
신음을 흘린 칼츠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받아들이겠소.”
“가져가게.”
품에서 작은 약병을 건넨 로브의 사내가 조언했다.
“명심하게. 힘을 취한 데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그래도 후회하지 않겠다면 말리지 않겠네.”
“부작용이 뭐요?”
“나도 모르지. 이 약병에 담긴 물약은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 힘을 제공하는 대가로 가져가는 게 제각각이거든.”
“끄응.”
신음을 흘리던 칼츠가 이내 받아들이고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중년인이 웃으며 물었다.
“작년 마상 시합 우승자가 뭐가 아쉬워 나와 거래하려는 건지 모르겠군. 상대가 그렇게 강력하나?”
“애송이요. 하지만 실력은 조금 있지. 나는 압도적으로 이기길 원하오.”
“그 애송이의 이름이 뭔가?”
“루터. 루터라고 하오.”
“루터라고?”
반문한 로브가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키득거렸다.
“이름값을 하는 모양이군.”
“그렇지. 하지만 애송이란 사실은 변함없소.”
칼츠가 사라졌다.
로브는 한참을 자리에 서성였다.
아마도 칼츠와의 대화를 곱씹는 모양이다.
루터는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오기까지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로브가 흠칫했다.
그는 경계보다 묘한 소릴 냈다.
“내가 감지 못할 상대라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말인데, 정체가 누구….”
말꼬리를 흐리던 로브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자 흠칫했다.
루터가 쓰게 웃었다.
“여전히 사람들과 얽혀 지내는 걸 좋아하는구나.”
그의 아는 체에 몸이 굳던 로브가 덮어쓴 후드를 걷었다.
드러난 얼굴은 낯선 중년인의 외양이었다.
하지만 그도 루터도 서로를 알고 있었다.
중년인의 모습을 한 악령이 환하게 웃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다. 악령.”
“대장이 돌아왔군. 돌아왔어.”
악령의 기쁜 목소리에 루터는 어깨를 으쓱였다.
“돌아온 건 아니다.”
“무슨 뜻이야? 설마 환영인가?”
다가온 악령이 루터의 얼굴을 매만졌다.
감촉이 느껴진다.
손을 뗀 악령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깨어난 건 맞는데 어째서 돌아오지 않았다 말해?”
“다시 돌아가야 하니까.”
“어디로?”
“공허 속으로.”
“음.”
악령이 은은히 미간을 좁히다 이내 씩 웃었다.
“이제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사는군.”
“그렇게 되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겠지?”
“많았지. 하지만 대장이나 내 입장에서 보면 이 세계의 변화는 하잘것없지.”
“어쩌다 어둠의 상인 노릇을 하나?”
“재밌으니까.”
“시간이 흘러도 넌 여전히 즐거움을 추구하는구나.”
“사명감이 없다는 건, 꽤나 흥미로운 일이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내 거처로 가자고.”
악령이 바닥을 탁탁 밟았다.
작게 균열이 생긴 바닥이 지하 계단을 드러냈다.
악령은 대지의 마왕의 힘을 손에 넣었다.
이제 지하는 그의 세계이다.
루터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자.”
그동안 악령이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 궁금하긴 했다.
루터는 악령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끝없는 지하는 아니었다.
계단은 일종의 시공간을 관통하는 통로의 역할이다.
계단을 관통하니 지저의 세계가 나타났다.
악령은 자신의 거처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끄아아악!”
“살려줘!”
비명을 지르는 존재들이 즐비하다.
하나같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는데, 생김새도 다르고 종족도 제각각이다.
루터가 물었다.
“저들은 뭐냐?”
“내 전시물이지. 어때?”
“별로 좋은 취향 같지는 않군.”
“하지만 가치는 있지. 이유 있는 고문은 없어. 저들은 근 몇백 년 동안 학살극을 벌인 존재들이다. 쉽게 말해 타락한 이들이지.”
“그래서?”
“저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어둠의 힘을 내뿜고 있어. 쉽게 말하면 그런 저들이 내뿜는 비명과 고통의 절규는 어둠의 힘이란 얘기지. 덕분에 내가 만든 이 세계를 유지하기도 쉽고 말이야.”
“잠깐만. 어둠의 힘을 내뿜는 다고? 그것도 본능적으로? 저 인간이. 그리고 저 엘프가?”
루터의 의문에 악령이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알려주었다.
“어둠의 힘은 어느 존재건 가지고 있는 일면 중의 하나더라고.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그랬구나. 그래서였어.”
생명체에게 존재하는 어둠의 힘은 애초에 탄생과 동시에 자연스레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별개의 저주가 아니라 애초에 구성원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과거에 낙사노르와 어둠의 힘이 서로 연결이 가능했던 거였어. 결국 어둠의 힘과 생명체는 공유하는 성질이었으니까.”
“나 없는 동안 연구를 제법 많이 한 모양이다.”
“학자 노릇을 한 적이 있었거든.”
“지루하진 않느냐?”
“전혀. 저들을 봐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전혀 지루하지 않아. 저 드워프가 자신의 동족 천 명을 죽일 거라고 상상해봤어? 그리고 저 엘프는 자신이 세운 도시 전체를 불태웠고. 아주 흥미로운 녀석들이야.”
루터는 가리키는 엘프와 드워프를 번갈아 보았다.
한때는 학살자였지만, 지금은 악령에 잡혀 고문에 의해 도구로 이용되는 신세가 되었다.
“흥미롭게 살았구나.”
“원한다면 얼마든지 머물며 관찰해도 좋아. 내가 만들었지만, 대장이 아니었으면 이루지 못할 세계였으니까.”
“됐다. 정신 사납고 시끄럽다.”
“저기야.”
악령은 자신의 거처를 가리켰다.
흑요석으로 꾸며진 성채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인간 식 왕성과 비슷한 구조였다.
상석의 옥좌가 있다.
악령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원래는 내 자리지만 잠깐은 양보해주지.”
“양보가 아니라 당연한 거다.”
루터는 옥좌에 앉았다.
인간의 신체에 맞춰 제작된 것이라 그런지 잘 맞았다.
악령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할 생각이지? 다시 도시를 세워 그들의 주인이 될 거야? 아니면 혼란스러운 현 대륙의 정세를 잠재울 거야?”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굳이 말하자면 방랑자가 될 생각이다. 난 그동안 사명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 너처럼 해방될 때도 되었지.”
루터의 설명에 악령은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그 생각 아주 올바른데? 드디어 대장이 깨어났군.”
“이유가 있다. 이제 마왕이니 뭐니 하는 존재들이 간섭할 일이 없다. 이 세계에 해악을 끼칠 존재들이 더 이상 없다는 뜻이지. 그러니 내가 하고자 해도 할 게 없기도 해.”
루터의 설명에 악령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세계가 혼란스럽기는 해도 다 자처한 것이고 반복된 역사의 흐름일 뿐이다.
과거처럼 감당 못 할 낙사노르의 마왕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루터가 세계에 큰 영향을 간섭할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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