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재회
일레인이 더듬거렸다.
“어, 어떻게 알았어?”
“한쪽만 장갑을 착용하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지. 벗어봐라.”
루터의 제안에 일레인이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처음 본 상대에게 자신의 치부를 보여주는 게 선뜻 내키지 않았다.
루터가 조언했다.
“강요하진 않으마.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어쩌면 영영 후회할 수 있다.”
일레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강렬했다.
“정말 치료할 수 있어?”
“나는 근거 없는 소릴 하지 않는다.”
“누구도 치료하지 못했어. 아니, 이건 치료의 영역이 아니야. 날 때부터 그랬으니까.”
“알고 있다.”
일레인이 장갑을 벗었다.
드러난 손은 흉터나 화상 자국은 아니었다.
손가락이 다섯 개여야 하는데, 네 개밖에 없다.
검지가 없다.
일레인의 눈빛이 서글펐다.
“태어날 때부터 이랬어. 내 손은 기형이야.”
루터는 손을 보더니 제안을 했다.
“돈 좀 있느냐?”
“돈은 왜?”
“치료를 공짜로 받을 생각이냐?”
“치료?”
일레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치료비를 말하는 걸 보면 고칠 수 있다는 말로들이네.”
“그래.”
“내 손은 기형이야. 그런데 이걸 고칠 수 있다는 소리야?”
“당분간 풍족하게 지낼 수 있는 돈이면 된다.”
“만약 이걸 고치면 평생 부유하게 만들어 줄 수 있어.”
“그 정도까진 바라지 않는다.”
강렬한 희망에 피식 웃은 루터는 일레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흠칫하는 그녀에게 아랑곳 않고 루터는 즉각 치료를 시작했다.
없는 손가락을 만들어 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루터가 자신만만한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공허를 다루는 그에게 창조 능력은 어렵지 않았다.
손가락이 없는 빈자리로 공허를 주입하자, 창조가 되어 씨앗이 새싹으로 자라듯 검지가 자라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
“꺄아아악!”
하녀들이 비명을 지르고 일레인이 눈을 부릅떴다.
루터는 가늘고 흰 예쁜 검지를 만들어 낸 뒤, 손을 놓아주었다.
오한에 걸린 듯 일레인이 벌벌 떨었다.
“이, 이게 뭐야?”
“움직여봐라.”
뼈와 살이 붙고 신경이 이어졌다.
일레인은 움직이는 검지를 보자 눈물을 흘렸다.
비명 소리에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엘번이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네 이놈! 뭐 하는 짓이냐!”
부르기 전까진 가만히 있으라는 일레인의 경고를 무시할 정도로 큰 비명인지라 엘번이 나섰다.
조급한지, 날카로운 검을 거머쥐었던 엘번이 루터를 찌를 듯이 내밀려 했다.
하녀들은 그가 나타나든 말든 일레인의 손가락에 집중했다.
“아가씨! 손가락이! 손가락이!”
“손가락이 생겼어요!”
“흐흐흑!”
놀란 하녀들 사이로 일레인이 울음을 터트렸다.
“아가씨! 대체 무슨 일입니까!”
경황없는 엘번을 뒤로하고 일레인이 다짜고짜 루터를 껴안았다.
루터는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눈을 동그랗게 뜬 엘번을 바라봤다.
“태도를 보아하니, 내가 사고 치길 기다리기라도 한 모양이군.”
“이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치료했다.”
“치료?”
일레인이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마법사에게 손은 생명이나 다름없다.
마법을 캐스팅해야 하고 부리는 데 손이 중요했다.
하지만 일레인은 장애를 안고 있었다.
장갑으로 가리긴 했지만 말 못 할 고생을 겪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루터가 고쳐주니 감격이 밀려왔다.
루터는 당황하는 엘번에게 한마디 했다.
“앞으로 내게 말을 함부로 못할 거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이는 엘번을 향해 루터는 어깨를 으쓱였다.
행렬이 멈추고 일레인의 손가락을 쳐다보기 분주했다.
모두가 피오렌체 가문의 일원이었다.
당연히 일레인의 장애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햇볕에 당당히 노출한 일레인의 검지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 이방인이 치료했대.”
“맙소사. 보고도 믿기지 않아.”
“이건 기적이야!”
탄성을 지르며 전율하는 사람들이 경외에 찬 시선으로 루터를 바라봤다.
엘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첫 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레인의 장애를 치료하니 자연 공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루터를 향해 허리를 조아렸다.
“알고 보니 귀인이셨군요.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알면 됐다.”
루터의 오만한 대답에 고개 숙인 일레인의 얼굴이 똥 씹은 얼굴이다.
놀라움 사이로 무언가 결심한 일레인이 루터를 마차 안으로 끌어 독대했다.
그녀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나랑 결혼하자. 내 전 재산을 줄게.”
결혼이란 말에 루터가 빙그레 웃었다.
“왜? 고마워서 그러느냐?”
“여기까지 온 거 전부 솔직하게 말할게. 당신의 모든 게 좋아. 처음 봤을 때부터 잘생겨서 마음에 들었는데, 알고 보니 기적 같은 치료 능력도 있어.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아.”
노골적인 구애에 루터는 단호히 대답했다.
“난 싫다.”
자신만만한 일레인이 흠칫하더니 이내 눈에 힘을 주었다.
“어째서? 나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줄 수 있어. 봐서 알겠지만, 난 아름답고 돈도 많아. 집안 배경도 대단해. 그런데 어째서 날 거부하는 거야?”
“한곳에 얽혀 있을 생각이 없거든. 지금처럼 세상을 유람하며 편히 보낼 거다.”
일레인의 눈꼬리가 쳐졌다.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해.”
“적극적이고 당당하구나. 보기 좋다. 앞으로도 그렇게 지내려무나.”
에둘러 거절한 표현에 일레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무책임하게 떠날 생각이야?”
루터는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여자는 다 너와 같이 적극적인가?”
“마음을 표현하는 게 뭐가 부끄럽다고.”
“그래. 맞는 말이지. 세상이 정말 변하긴 변했구나.”
사랑에 적극적인 귀족 영애의 모습을 보자니 새삼 자신이 살던 과거가 떠올랐다.
당시 귀족 영애들은 정략결혼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아직 많은 면은 보지 않았지만, 당장의 일레인이 보이는 태도를 보니 세상이 많이 바뀐 게 분명하다.
당돌한 일레인이 썩 마음에 든다.
루터가 부드럽게 말했다.
“너와의 만남은 여기까지 해야겠구나.”
“나는 어떻게 하고.”
“넌 괜찮을 거다. 심지가 강하니까.”
루터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일레인이 슬픈 얼굴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루터가 분위기를 깼다.
“아니. 치료비를 줘야지.”
“내 전 재산을 주겠다니까.”
“대신 결혼해야 한다는 거냐? 미련은 이제 놓아라.”
“미련이 아니라 간절한 사랑이야.”
집착을 쉽게 놓지 못하자 루터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마음에 간섭했다.
잠시 후, 일레인은 얼떨떨한 눈으로 루터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갑자기 애정이 싹 식었어.”
루터를 향한 활화산 같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일레인의 어리둥절한 마음에 루터가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잠깐의 고마운 마음을 사랑이라고 착각한 거다. 스스로를 냉철하게 돌아보아라.”
“음. 그런 것 같기도 해.”
일레인은 자신의 말을 철회했다.
“전부 취소야. 하지만 치료비는 넉넉하게 줄게. 그리고 정말 고마워.”
“이 또한 인연이고 운명이지. 나에 대해서 맞춘 건 하나 없지만, 선물이라고 생각하려무나.”
“그럴게.”
일레인은 말한 대로 금화 보따리를 내어놓았다.
주화에 질리언의 노회한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루터는 금화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질리언. 잘 지냈느냐.’
금화 속 질리언의 표정은 근엄했다.
우여곡절 끝에 텔레포트 관문 소에 다다랐다.
일레인이 제안했다.
“당신의 뛰어난 치료 능력이라면 엘몬트 아카데미에 입학해 보는 게 어때? 충분히 재능을 발하게 될 거야.”
그녀의 조언에 루터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다. 아카데미에 묵으면 당분간 그곳에 남아야 할 것 같구나. 지금처럼 돌아다닐 생각이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해. 돈은 대신 내줄 테니까.”
“되었다. 나는 저 도시로 가마.”
관문소 너머로 작은 소도시가 보였다.
루터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식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무엇을 할지 궁금했다.
그녀가 물었다.
“이제 계속 치료사로 활동할 거야? 정말 유명해질 수 있어.”
기형을 고쳤으니, 놀라운 실력이다.
“당신의 능력이라면 치료 마법사로 금방 명성을 쌓게 될 거야.”
“명성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지내고 싶구나. 저 도시가 적당하군.”
“오레올이라는 중소 도시야. 우리 가문이 다스리고 있는 곳이지. 이거 받아. 가문의 귀한 손님에게 제공하는 신분증이야. 이거라면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을 거야.”
“고맙구나.”
“내가 더 고마워. 앞으로 저 오레올에 있을 거면 반드시 꼭 찾을게.”
“계속 있진 않을 거다.”
“하지만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 당신의 능력이라면 눈에 안 띌 수가 없을 테니까.”
이별을 마친 일레인이 포탈 관문소로 향했다.
루터는 뒤돌아 가는 일레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보다는 네가 더 유명해지겠구나.”
당찬 여장부에 실력도 있으니 미래가 밝았다.
“질레인이 저렇게 당당했지.”
감상을 마친 루터는 오레올이라는 소도시를 향해 몸을 틀었다.
“뭘 해도 좋다.”
이제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만끽하고 싶다.
루터는 오레올이라는 소도시로 이동했다.
일레인이 내어 준 신분증은 관문에서 톡톡히 덕을 보았다.
경비병들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도시 안으로 들어선 루터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는 잘 포장되어 있었고, 사람들의 의복은 깔끔했다.
확실히 과거와는 더 살기 좋아진 세상이 된 것은 분명했다.
루터는 가벼운 마음으로 도시를 둘러봤다.
아이들은 웃으며 뛰어다녔고, 지나는 사람들은 근심 걱정 없어 보였다.
도시의 정경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샜다.
루터는 도시의 외곽에 있는 여관을 찾았다.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한숨을 쉬다 루터를 보자 반색했다.
“첫 손님이군. 어서 오시오.”
“내가 첫 손님이오?”
“하하. 귀도 밝소.”
안내를 받고 텅 빈 홀의 중앙 탁자에 앉자 여관 주인이 손을 비비며 다가왔다.
“묵다 가시려오?”
“그럽시다.”
“여행객인 모양이군. 옷차림이 이곳 사람이 아닌 걸 보니.”
여관 주인의 말에 루터는 자신의 의복을 훑었다.
평범한 갈색 천 바지에 리넨 셔츠였다.
여관 주인이 혀를 찼다.
“여기 도시 사람들은 옷차림에 목숨 걸어 치장하고 다닌다오.”
“그만큼 살기 좋다는 얘기 같소.”
“돈지랄하는 것이지. 그래. 손님. 뭘 시키시겠소.”
“제일 맛있는 걸로 해주시오.”
“내가 오리고기 하난 끝내주게 하지. 잠깐만 기다리시오.”
여관 주인이 내온 오리 훈제 고기가 큼직하다.
루터는 통째로 내 온 오리고기를 보며 쓰게 웃었다.
“이걸 다 먹으라고?”
“남겨서 내일 또 조리해 드리리다.”
“냄새가 나는데?”
“고기야 뭐 냄새나는 건 어쩔 수 없지. 여행객이 그런 걸 가리고 먹소?”
다소 퉁명한 대꾸에 루터가 쓰게 웃었다.
뱉은 말에 후회하는지, 여관 주인이 한숨을 내쉬며 사과했다.
“미안하오. 요즘 장사가 워낙 안돼서 냄새 난다 하니 곤두선 신경 때문에 나도 모르게 싫은 소릴 했소.”
그 말을 필두로 주인장의 하소연을 시작했다.
장사가 안되는 이유로 요리가 맛없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루터는 잠깐 고민하다 무슨 생각에선지 빙그레 웃었다.
“좋은 요리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법이오.”
“뛰어난 주방장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문제지.”
“주인장은 행운을 쥐었군.”
“그게 무슨 소리요?”
“눈앞에 뛰어난 주방장이 있잖소.”
여관 주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행객 양반. 요리사였소?”
“그렇소.”
루터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에 여관 주인이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요리사 양반에게 부족한 솜씨를 보여주었군.”
“괜찮다면 내가 직접 조리를 하는 게 어떻겠소.”
제안에 주인이 흔쾌히 수락했다.
“좋소. 한 번 봅시다.”
“만약 마음에 들면 날 이곳의 주방장으로 취직시켜 주시오.”
눈을 동그랗게 뜬 여관 주인이 손사래를 쳤다.
“당장 나 살길도 막막한데, 당신까지 거둘 형편이 못 되오.”
“그거야 뛰어난 주방장이 없을 때의 이야기지. 아마 내가 한 요리를 맛보면 구름같이 손님들이 몰려올 거요.”
허세 가득한 루터의 장담에 주인장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만 끌어올 수 있다면 뭐든 하시오.”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빙그레 웃은 루터는 자신이 찾은 직업이 마음에 드는지, 손바닥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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