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유유자적
“흥흥흥!”
자신들이 깨어난 줄 모르고 우거진 식물 줄기로 이루어진 숲의 통로를 지나는 수인족 소녀의 콧노래가 무척이나 맑다.
키아라가 작은 미소를 띠었다.
수인족은 그녀의 책임이었고, 그래서 백 년 간 돌봤다.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듯이 희망찬 흥겨운 콧노래는 듣기가 좋았다.
수인족 소녀는 한 손엔 바구니 한 손엔 낫을 들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들이 있던 주변을 벌초하려는 것 같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다가오던 소녀가 마침내 긴 통로를 지나 자신들이 있는 장소에 다다랐다.
헌데 자신을 대면하고서도 소녀는 전혀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다.
“엘 라도라!”
수인족 소녀가 낭랑한 목소리가 발했다.
그러자 차고 있던 목걸이에서 빛이 발하더니 반투명한 막이 사라졌다.
소녀가 의욕을 드러내며 정면을 응시했다.
“오늘도 열심히 해야….”
중얼거리던 소녀의 붉은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털썩!
들고 있던 바구니와 낫이 떨어지며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비명 소리의 원인은 자신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루터와 키아라 때문이었다.
토끼처럼 하얗고 뽀송뽀송한 귀가 부르르 떨렸다.
비명을 멈춘 소녀는 다시 한번 루터와 키아라를 번갈아 봤다.
“아아아!”
어지러운 듯 비틀거린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더니 그대로 혼절했다.
루터는 잠깐이나마 보여준 소녀의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반응이 격하구나.”
“아마 놀랐을 거야. 전설적인 인물을 눈앞에서 마주했으니.”
키아라는 소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은 차치하고서라도 루터는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런 그가 깨어나 쳐다보면 얼마나 놀랄까 능히 짐작이 갔다.
키아라가 소녀의 상태를 살피는 사이, 루터는 바구니를 바라봤다.
온통 푸른 야채 뿐이다.
루터가 물었다.
“처음 보는 수인족 종족인데?”
“토끼 족이야. 수인족 가운데 가장 겁이 많고 소심하지.”
“그래서 곧장 기절했구나.”
“잠들기 직전까지도 늘 걱정했던 수인족인데, 아무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키아라는 자식을 보는 것처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잠든 소녀를 바라봤다.
토끼 족 소녀는 금방 잠에서 깨어났다.
“꺄아아악!”
다시 한번 비명이 터졌다.
키아라가 빙그레 웃으며 토끼 족의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으니 진정하렴.”
커다란 눈동자로 당장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울먹이던 소녀가 이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정한 목소리가 놀란 새가슴을 진정시킨다.
키아라가 물었다.
“이름이 뭐니?”
소녀가 눈치를 보더니 희미하게 속삭였다.
“샤인티요.”
“반가워. 샤인티. 나는 키아라. 저쪽은 루터야. 누구인지 알겠니?”
“네. 아, 알아요.”
샤인티가 루터를 힐끔거렸다.
단순히 아는 정도가 아니다.
그는 위대한 존재였다.
기절한 이유도 키아라보다 루터 때문이 컸다.
그를 본 순간 벼락에 감전당한 것처럼 혼비백산한 마음이 컸다.
키아라가 물었다.
“샤인티. 혹시 샤노레노와 무슨 관계니?”
샤인티가 멍하니 물었다.
“샤노레노?”
“그녀는 이 비밀 화원의 첫 번째 관리자였어.”
키아라의 설명에 샤인티가 신기하다는 듯이 그녀를 보더니 진실을 알려주었다.
“그분은 제 고조할머니세요.”
“고조할머니?”
키아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터가 말했다.
“시간이 제법 흐른 모양이네.”
“제법 흐른 정도가 아니야.”
아연실색한 채, 중얼거린 키아라가 여전히 신기한 듯 커다란 눈망울을 연신 깜빡이는 샤인티에게 재차 물었다.
“샤인티. 혹시 이 비밀 화원의 관리자는 어떻게 임명되었지?”
“저희 샤 가문이 계속 맡아왔어요. 처음엔 고조할머니. 그 다음엔 증조할머니. 다음은 제 어머니. 그리고 저. 이렇게요.”
“그럼 네가 네 번째구나.”
“네. 단 한 번도 일에 소홀한 적이 없어요.”
샤인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키아라가 일어서며 혀를 내둘렀다.
“루터. 이거 큰일 났는데?”
“왜?”
“토끼 족의 수명은 길어.”
“얼마나?”
“이백 년.”
루터는 작게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그럼 얼마나 지난 거지?”
“샤인티. 지금 루터력이 몇 년이니?”
“756년이요.”
고개를 끄덕인 키아라가 다시 루터를 쳐다봤다.
“루터가 잠든 이후로 850년이 흘렀어.”
“오래 흘렀구나.”
놀란 루터는 이내 혀를 찼다.
“정말 오래 흘렀어. 공허에서 시간이 이 세계보다 느린 걸 감안하면 더더욱 그랬겠지.”
“맺었던 인간들은 다시 만나지 못하겠는데?”
“아니. 가능하다.”
“어떻게?”
“시공간은 내게 의미가 없어.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지.”
키아라가 탄성을 질렀다.
“루터라면 충분하겠어.”
“만나려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지.”
“그럼 돌아갈 생각이야?”
“아니. 가급적이면 시간을 돌리는 일은 없을 거다.”
“왜?”
“내가 과거에 간섭하면 미래는 바뀐다. 바뀐 미래는 시공간의 균열을 불러일으키고 그렇게 된다면 이 세계는 균열을 일으켜 붕괴될 수 있다. 예전에는 강제로 돌려도 세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지. 그럴 만한 주제도 되지 않았고 역량도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 작은 움직임은 세계를 부서트릴 수도 있다.”
진지한 설명에 키아라가 쓰게 웃었다.
“그거 듣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걸?”
“그래서 가급적이면 이 세계에 자극을 주는 힘을 사용하는 건 최대한으로 자제할 생각이다.”
“그게 좋겠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키아라가 배를 문질렀다.
“오랜만에 깨어나서 그런가? 허기가 지네.”
황망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던 샤인티의 귀가 쫑긋 섰다.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 샤인티가 바구니를 들어 내밀었다.
샤인티가 수줍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싸 온 음식을 드실래요?”
“어머. 그래도 괜찮을까?”
“여, 영광이에요.”
종족의 구원자가 자신의 도시락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고마워. 샤인티. 루터는?”
“나는 생명체의 구성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먹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야.”
“샤인티가 이렇게 먹어 달라고 하는데, 외면할 생각이야?”
키아라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루터를 바라보는 샤인티를 가리켰다.
거절의 뉘앙스를 보이자 쫑긋 선 귀가 축 늘어졌다.
감정이 귀에 전부 나타났다.
쓰게 웃은 루터가 키아라와 같이 바닥에 눌러앉았다.
바구니에는 보자기와 야채와 과일이 풍성하게 담겨 있었다.
앉아 대화를 주고받으며 나눠 먹는 동안 키아라가 루터가 잠든 이후의 백 년 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루터가 떠난 이후 사람들은 다시 엘몬트로 돌아갔어. 먼저 얘기했던 대로 세계는 다시 원래로 돌려져 있더라고. 한동안 계속 평화가 유지되었어. 하지만 물은 계속 흐르는 법이잖아. 엘몬트는 정말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어.”
엘몬트는 루터의 유산과 방향을 계속 이어갔다.
루터가 남긴 창조 룬어가 밑거름이었다.
엘몬트 마법 아카데미에서 인재가 무수히 나왔고, 그 인재들은 루터의 의도대로 생활 마법에 전력을 기울였다.
백 년 동안 마법사가 쏟아져 나왔고, 그와 동시에 도시는 발전을 거듭했다.
성장한 도시는 루터의 의도했던 대로 공국이 되고자 하였고, 그리고 이뤄냈다.
여기까지가 키아라가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루터가 물었다.
“네 주변에 마법진이 있었다. 누구의 작품이냐?”
“콕스와 질리언. 콕스는 드래곤이라 그렇다 치지만 질리언은 정말 대단한 마법사였어. 루터 이후로 아무도 달성하지 못할 줄 알았던 9서클 마도사가 되었으니까.”
“질리언이 마도사가 되었다고?”
“응. 지금은 없겠지만, 아무튼 그때의 질리언은 대단했어. 성인이 되기도 전에 엘몬트의 영주가 되었고 이후에도 도시를 확장하기 위해 제법 노력했어. 아마 내가 잠들기 직전에는 공국을 넘어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었어. 그리고 아마 되었겠지. 그는 마치 루터와 같았으니까.”
9서클 마도사가 된 질리언의 적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질리언은 자신의 살아생전까지 루터의 의지를 이어받으려고 노력했어.”
“역시 잘해 주었구나.”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할 줄 알았으니 크게 놀랍지도 않았다.
인간에 대해서는 거기까지였다.
루터는 키아라의 행적이 무척 궁금했다.
“너는 잠들기 전까지 어떻게 지냈지?”
“수인족과 함께 있었어. 하지만 백 년이 지나니 더 이상 내가 간섭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스스로들 잘 지내더라고. 그래서 할 게 없었어. 사실 뿌듯하긴 했지만, 외롭기도 했어. 루터가 없는 빈자리가 너무 그리웠어. 루터를 몇 번이나 부르고 싶었지만 혹여나 루터를 불러낼 때, 나를 잊거나 마음이 사라지면 어쩔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어. 아직 준비되지 않은 루터를 부를 수가 없겠더라고. 그래서 같이 잠드는 걸 선택했어.”
결국 옳은 방법이었다.
다시 깨어난 루터는 키아라를 잊지 않았다.
루터는 자신이 주목하는 점을 꼬집었다.
“혹시 네가 잠들기 전에 인간과 이종족 사이에 문제가 있었던 적은 있었나?”
“그럴 리가. 드래곤의 이종족들은 모두 터전을 재건하느라 여념 없었어. 인간들과 만날 일도 없었어. 당시에도 여전히 몬스터 영역은 있었으니까.”
키아라의 단호한 대답에 샤인티가 흠칫했다.
루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샤인티에게 닿았다.
“지금은 다른가 보구나.”
샤인티의 시선이 흔들리더니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안은 키아라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샤인티를 바라봤다.
“왜? 그동안 문제라도 있었니?”
“그, 그게….”
“괜찮으니 사실대로 알려주렴. 내가 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무슨 일이 생겼니?”
샤인티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키아라님이 잠드신 이후로 인간과 이종족 간의 전쟁이 있었어요.”
“뭐?”
놀란 키아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이미 짐작한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했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어떻게 된 일이지?”
“음. 그게요.”
샤인티의 설명이 이어졌다.
지금으로부터 오백 년 전, 인간들이 이종족들의 영토를 탐내어 침략했고, 이는 1차 대륙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후에도 2차, 3차가 연이어 터졌고 현재도 4차 대륙 전쟁의 기미가 보이고 있다 한다.
인간과 이종족 간의 사이가 살벌했다.
키아라의 표정이 굳었다.
“인간이 왜 이종족의 영토를 침략했지?”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저희 영토에 인간들이 탐내는 광석이 있대요. 그걸 탐내서 빼앗으려고 했고 그걸 막으려다 전쟁이 일어난 거래요.”
샤인티의 설명에 따르면 전쟁은 현재 진행 중이다.
키아라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 그런 일이.”
루터는 탐내는 광석이라는 대목에서 마나석이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잠깐 들여다본 엘몬트는 마법사의 탑들이 무수히 많았다.
생활 마법을 통해 건실한 사회 건설을 추구했는데, 아마도 잘못 변질된 모양이다.
루터가 씁쓸히 중얼거렸다.
“모두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모양이군.”
아쉬울 따름이다.
키아라가 심각하게 물었다.
“전쟁이 또 일어날까?”
샤인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많은 이종족들이 여기 루터사르로 피신 왔어요.”
“루터사르?”
루터의 반문에 진지하던 키아라가 이내 빙그레 웃었다.
“루터의 창조 세계를 이종족들은 그렇게 불러. 루터가 만든 천국이라는 뜻이야. 어때?”
“천국인 건 모르겠군.”
“그만큼 살기 좋다는 얘기야. 샤인티. 내 말이 맞니?”
샤인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루터사르는 이종족들이 유일하게 피신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에요.”
듣는 루터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과거에는 낙사노르의 마물로부터 피신시키기 위해 만든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종족들이 인간으로부터 대피소가 되었다.
낙사노르의 마물을 인간이 대체하게 된 걸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입맛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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