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시간이 흐르다
어쩔 수 없지만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잠깐의 이별이겠지만, 누군가에겐 영영 이별이다.
케인과 같은 인간들은 더욱더 그랬다.
그들은 이종족이나 정령왕처럼 수명이 길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남달랐다.
돌켄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루터가 앞에 서자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루터 님을 뵙는 건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겠군요.”
“그래. 너희들과 함께한 여정은 오늘로써 끝이다.”
“아쉽습니다. 너무 아쉬워요.”
참지 못한 돌켄이 답지 않게 눈물을 흘렸다.
복받치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그가 말했다.
“모든 게 감사했습니다. 당신을 만난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고맙다. 돌켄.”
돌켄의 옆으로 엘레나가 다가왔다.
그녀 역시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이대로 떠나면 언제 다시 뵐까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겨라. 나를 위해서. 그리고 너희를 위해서 우리의 여정은 여기까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이 모든 게 감사할 뿐이에요.”
엘레나를 필두로 자크, 케인이 다가왔다.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엘몬트를 부탁한다.”
네 사람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터는 공허로 돌아가기 직전, 몸을 돌려 엘몬트 영지민과 설산의 이종족. 그리고 드래곤 영역의 이종족을 바라봤다.
루터는 떠나기 전, 마지막 선물을 남겼다.
“매 순간을 소중히 여겨라. 그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껍질을 깬 이들이여, 그대들에게 축복을 내린다.”
허공에 빛이 떠오르고 갈래갈래 퍼져 모든 이들의 가슴에 닿았다.
따듯하고 힘찬 마음이 샘솟는다.
모두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감돌았다.
‘이제 작별이다.’
그는 마련한 평평한 돌바닥에 누운 뒤,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의 의식이 육신을 떠났다.
루터의 육신이 숨이 멎었다.
그러나 그는 죽은 게 아니다.
육신의 상태를 살피던 칼루아가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마스터께서 떠나셨습니다.”
슬픔이 감돌고 탄식성이 이어졌다.
안색이 어두워진 키아라에게 칼루아가 다가와 어깨를 다독였다.
“너무 걱정 마. 우린 오래 살아. 다시 뵐 수 있을 거야.”
“응. 맞아. 잠깐의 이별이라면 참을 수 있어.”
키아라는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곧 다시 만날 수 있다.
잠시 떨어지는 거라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공허로 되돌아간 루터는 전처럼 아득함보다는 따스함을 느꼈다.
‘내 집 같다.’
육신이 공허로 이루어졌다 보니 몸이 공허를 바라고 있었다.
루터는 공허 속에서 자신이 떠나온 세계를 바라보았다.
슬퍼 보였지만, 곧 털고 일어나리라.
그는 자신의 피조물과 이종족. 그리고 인간들의 의지를 믿었다.
그래서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공허의 허무함에 적응하고 패턴을 주입해야 한다.
인간에게 생체 리듬이 있는 것처럼 쉬고 일하는 주기를 정해야 한다.
‘지금은 전부 내려놓고 편히 쉬자.’
공허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일단 적응기가 필요했다.
허무함을 받아들이고 다시 움직일 때를 위하여 스스로를 추슬러야 한다.
‘너무 강해도 탈이야.’
쓰게 웃은 루터는 그대로 공허라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제 오랫동안 의식을 내려놓고 공허라는 끝없는 세계에 잠이 든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다시 깨어날 때에는 늘 그랬듯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공허에 녹아들었던 루터가 의식을 차리는 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심연 속에서 루터는 자각 의식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깬 루터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리곤 스스로 만족했다.
‘벗어났구나.’
짓눌렀던 허무함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루터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알았다.
‘역시 지쳐 있었어.’
공허는 사용할수록 피로감을 일으킨다.
피로감은 곧 허무함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한동안 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활력이 넘치는 정도는 아니지만 활동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는 되었다.
‘좋군.’
스스로의 상태에 만족한 루터는 일단 자신에게 바뀐 점이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도 기억의 대상에 대한 공허함은 없었다.
‘건강하네.’
상태 점검을 확인한 루터는 일단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옛 인연들이 보고 싶군.’
잘 지내고 있을까 궁금했다.
공허에서 빠져나온 루터는 일단 자신의 세계를 관조하기 위해 우주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세계는 둥근 행성이었다.
푸르른 바다와 구름이 아우러져 무척 아름다웠다.
의지를 더욱더 돋우자 엘몬트 지방이 보였다.
루터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변했구나.”
구색은 갖췄지만, 그래도 지방 중소도시의 신세를 면치 못했던 엘몬트 지방.
그러나 과거와 달리 현재는 뾰족한 탑이 수천 개가 우뚝 세워졌다.
게다가 그 외 높은 건물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즐비하다.
“훨씬 커졌어.”
해변을 지나 해안의 섬까지 도로가 이어졌고, 그곳에도 도시들이 세워졌다.
사막을 넘어 중부 영역까지 도시가 길게 늘어졌으니 저만하면 바스코 제국의 수도 수준을 넘어도 한참 넘어섰다.
어떻게 된 걸까.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겠구나.”
친숙하지만 낯설었다.
루터는 엘몬트를 지나 설산에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엘몬트는 약과에 불과했구나.”
설산은 엘몬트보다 더 융성하게 발전했다.
마왕이 그랬는지는 모르ㅤㄱㅖㅆ지만, 설산의 앞을 가로막은 사해의 안개가 사라졌다.
동시에 사해의 바다도 푸르렀고, 그 위로 수많은 배들이 오고 갔다.
설산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주변은 엘몬트의 첨탑처럼 건물들이 세워졌는데, 건물 형태는 돔처럼 뒤집은 원반을 덮어 놓은 것 같았다.
그런 건물이 설산의 사해를 지나 낙사노르에 까지 닿았다.
루터는 낙사노르의 대륙을 처음 보았다.
그러나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었다.
마왕과 마물이 도사리는 위험한 세계.
헌데, 드러난 그 낙사노르에 이종족들이 있었다.
설산의 이종족들은 어찌 보면 자신의 피조물이나 다름없다.
애착이 있었던 루터는 그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융성한 모습을 보이자 뿌듯함이 먼저 일었다.
“잘하고 있구나.”
루터의 시선은 다시 드래곤 영역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이라면 몬스터 영역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대신 기다란 국경선이 존재했다.
대륙의 동쪽과 서쪽을 가로질렀는데, 몬스터 영역의 중간 지점이었다.
사막은 사라졌고 숲이 자랐다.
루터는 드래곤 영역의 이종족들을 훑었다.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수인족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그들 역시 과거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극복했는지 설산이나 엘몬트처럼 성세를 구가하며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있었다.
루터는 일이 참 공교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내 흔적이 닿은 존재들이 유독 번성했구나.”
어쩌면 자신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되었다 생각하면서도 내심 자신의 영향으로 세계가 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낙사노르의 마왕에게서 지배당할 뻔했던 과거보다야 훨씬 낫다.”
자신에 의해 바뀐 미래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흡족하게 세계 곳곳을 둘러보던 루터의 만족은 거기까지였다.
돌연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데?”
전체적으로 훑어볼 때는 몰랐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위화감이 들었다.
위화감의 시작은 국경 지대였다.
서로의 영역 부근에 높은 성벽을 쌓아 올렸는데, 마치 전쟁을 대비하려는 것처럼 철통같은 방비를 하고 있었다.
낌새가 좋지 않다.
루터는 국경 위주로 관찰했다.
그리고 소요가 벌어지는 곳을 포착했다.
엘프와 수인으로 이루어진 무리와 인간들로 이루어진 무리가 대치하고 있었다.
서로가 소리를 치기 시작하더니, 돌연 무기를 꺼내 들고 싸우기 시작했다.
루터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피가 흐르고 살벌하게 서로를 공격한다.
엘프와 수인족. 그리고 인간들까지 가릴 것 없이 피를 뿌리며 죽음을 맞이한다.
잠시 후, 지원 병력이 도착하자 서로 신경전과 함께 천천히 물러났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루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전쟁은 여전히 존재하는군.”
거기에 인간과 이종족 간의 전투였다.
어찌 된 일일까.
루터는 의아했지만,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나는 손을 뗀다.”
전쟁을 하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니다.
이제 자신은 완전한 자유다.
“하고 싶은 대로, 나를 위해 살아가리라.”
다시 깨어난 이후 루터의 다짐이었다.
더 이상 여기저기 간섭하며 스스로를 책임과 의무감에 몰아붙이지 않겠다 다짐했다.
“옛 인연이나 찾아보자.”
그는 키아라를 찾기 시작했다.
키아라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다.
굳이 꼼꼼히 수색하지 않아도 존재감을 발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키아라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엔 없군.”
그렇다면 장소는 한 군데밖에 없다.
루터는 고개를 돌렸다.
과거 그가 만든 창조 세계가 보였다.
창조 세계는 룬어에 의해 마나가 충만한 곳이다.
키아라가 어디 있을까.
꼼꼼히 들여다보던 루터는 이내 흠칫했다.
키아라가 자신의 육신 옆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그런데 상태가 심상찮았다.
루터는 즉각 창조 세계로 이동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식을 육신에 주입했다.
육신은 죽었지만, 들어가고자 하면 얼마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마침 시간 정지도 있었기에 육신이 훼손되지도 않았다.
의식 속에 들어간 루터는 천천히 감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멀리서 관찰할 때와 직접 육신에 깃들어 눈으로 세상을 볼 때는 차이가 있었다.
“관리가 잘 되었구나.”
루터가 처음 육신을 내려놓았을 때는 작은 초지였는데, 지금은 우거진 숲이 마치 보호막처럼 그들의 장소를 감싸고 있었다.
일종의 엄폐 장소 같았다.
주변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일어선 루터는 바로 옆에 가지런히 누운 키아라를 꼼꼼히 살폈다.
키아라의 주변에 자신의 창조 룬어가 적혀 있었다.
마법진이다.
루터는 마법진을 해석했다.
시간을 느리게 하고 신체 활동을 멈추는 룬어가 적혀 있었다.
솜씨는 미숙했지만 효과는 그럴 듯했다.
키아라는 마치 숲속의 공주처럼 깊이 잠들어 있었다.
루터는 잠든 키아라를 보더니 슬픈 미소를 띠었다.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나처럼 긴 잠을 선택했구나.”
필요하면 부르라 했으나, 차마 그러진 못했나 보다.
대신 아예 자신처럼 잠들어 있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루터는 키아라의 선택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렀길래 키아라가 이런 선택을 했을까.”
키아라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수인족을 이끄는 무리의 대장이었다.
그런 키아라가 자신을 기다리기 위해 긴 잠을 선택했다.
아마도 자신의 할 일을 마치고 마냥 기다리다 못해 결정한 듯했다.
그럼 그 과정에서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루터는 키아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녀 주변에 드리워진 마법진을 없앴다.
그리고는 키아라에게 다가가 나직이 속삭였다.
“키아라. 내가 돌아왔다. 이제 일어나거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목소리가 신호탄이 된 걸까.
키아라의 눈꺼풀이 흔들리더니 이내 맑은 호수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를 드러냈다.
의식을 차리고 눈앞의 대상을 확인했다.
키아라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루터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오랜만이야.”
“응.”
일어선 키아라는 말없이 루터를 끌어안았다.
해후는 여운이 길었다.
키아라가 진정하길 기다렸는데, 의외로 그녀는 금세 침착했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
다시 본 키아라는 전에 없이 침착했다.
루터는 빙그레 웃었다.
“돌아온다고 약속했으니 반드시 돌아와야지.”
“나는 루터가 돌아올 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내 옆에서 잠든 거냐?”
“내가 해야 할 일을 끝내고 할 일이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림뿐이었어. 그래서 하릴없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기다리느니 차라리 옆에서 같이 잠이 드는 선택을 한 거야.”
“결론적으론 잘한 것 같다.”
“맞아. 하지만 너무 늦게 돌아왔어.”
“늦었다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나도 기다리다 지쳐 잠들었으니 잘 몰라. 하지만 루터가 떠나고 내가 잠들기로 선택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약 백 년이 흘렀어.”
“백 년? 제법 지났구나.”
“그것도 내가 잠들기 전까지의 시간이야. 그 이후로 얼마나 흘렀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마침 오는 저 아이에게 물어보자.”
루터는 자신들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뿐사뿐 걸으며 다가오는 인기척의 주인은 수인족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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