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시간이 흐르다
루터는 마왕의 충격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신색을 회복한 마왕이 물었다.
“대체 어떻게?”
“운이 좋았습니다.”
마왕의 시선이 착 가라앉았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텐데?”
공허를 다루는 건 불가능의 영역이다.
어쩌면 신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루터의 설명이 이어졌다.
창조 룬어를 통한 공허의 존재를 증명하여 자신에게 흡수했다는 과정이 이어졌다.
듣던 마왕은 기가 찬 눈으로 중얼거렸다.
“룬어? 룬어로 공허의 존재를 이끌었다고? 그건 불가능해.”
“이제 불가능하진 않겠군요.”
마왕이 인상을 그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
“어떤 기분입니까?”
“불쾌하다. 화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게 부러움으로 인한 마음의 상실이다. 제길! 공허를 얻다니!”
마왕은 땅을 치고 울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게 줄기차게 구애하고 성의를 보여도 꿈쩍 않던 공허가 루터에겐 기다렸다는 듯이 팔 벌려 환영해 주었다.
질투심이 폭발하다 못해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끙끙대던 마왕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보면 불가능이 아닐지도 모르지. 넌 단 한 번에 공허에서 소울을 얻었다. 굳이 빗대어 표현하자면 공허의 축복을 받았다고 봐야겠어.”
루터는 마왕의 허탈함을 게속 받아 줄 수 없었다.
시간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허무함에 잠기기 일보 직전이다.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
루터가 재촉했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내게서 공허를 다루는 방법을 배울 겁니까? 아니면 지금 가는 길을 고수할 겁니까? 빨리 결정하세요.”
마왕은 인상을 그렸다.
“왜 그렇게 재촉해?”
“공허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허무함이 의식 속에 녹아들었습니다.”
“허무함? 그럴 수도 있겠어. 애당초 공허는 활발한 성격이 아니니까. 그게 공허의 힘을 얻은 대가인가 보군.”
“감상은 거기까지. 당신의 대답은 뭡니까?”
“이 녀석아. 그렇게 간단하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인상을 그린 마왕은 자신의 현 처지를 토로했다.
“내가 고수하는 방식은 수 만 년 동안 지속 유지되어 왔다. 그리고 계단을 밟듯 차근차근 결실을 보이고 있어. 그런데 네 방식대로 하면 이 모든 걸 다 포기해야 한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공허를 얻은 것은 신을 뛰어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차피 신도 공허에서 파생된다.
고심하던 마왕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저히 내가 터득한 것들을 포기할 수 없다. 게다가 허무함이라니. 선택을 물리게 하는군.”
마왕은 신이 되고 싶었지 공허가 되고 싶지 않았다.
루터는 마왕의 절실함을 읽고 물었다.
“공허는 신이 되는 것보다 위대합니다.”
“알아. 하지만 난 신이 되고 싶어.”
“왜 그렇게 신이 되는 것에 집착하는 겁니까?”
“존재의 미래와 과거. 그리고 현재를 알 수 있고 또한 간섭할 수 있으니까.”
“공허에서도 가능합니다.”
“그래. 하지만 허무하다며? 넌 모르겠지만, 나는 지난 삶을 보내는 동안 모든 존재의 인연과 의미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소중하게 여겼어. 그러고도 나는 지치지 않았다. 공허를 익히는 건 활동에 제약을 걸어. 활발한 나와 어울리지 않지.”
“그게 신이 되는 이유였군요.”
“그래. 나는 덧없이 바스러진 지난 내 부하들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에네르로 들여다보고 소울을 통해 간섭을 하려 해도 존재의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 언제나 변칙적이고 통제 불능의 현상이니까.”
“미래에 간섭하는 건 위험합니다. 시공간이 일그러지면 어둠의 힘이 도래할 겁니다.”
“일그러진 세계가 되길 바라진 않는다. 그저 추구할 뿐이야. 적당히 제어도 할 거다.”
루터는 마왕의 신념을 존중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작별이군요.”
“허무함은 결코 가벼이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얼마나 쉴 생각이냐?”
“하루, 이틀 가지곤 안 되겠죠.”
“허무함은 결코 가벼이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어쩌면 그 허무함에 스스로가 공허에 잠식될 수 있어.”
마왕의 경고에 루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전 공허 그 자체니까요.”
“뭐? 설마 너 자신을 공허와 동화시킨 것이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은 마왕의 황당한 반응에 루터는 몸을 돌렸다.
“나중에 보죠.”
“그게 언젠가?”
“모르죠. 하지만 우리는 범인과 다릅니다. 인간에겐 10년이 긴 세월이라도 우리는 찰나에 불과하니까요. 그러니 언제 볼지는 그때 가서 알겠죠.”
이미 루터와 마왕은 시간의 이미를 초월한 존재들이었다.
마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훗날 보자. 그때에는 적당히 변화해라. 볼 때마다 다르니 좀체 적응이 안 되는군.”
“이제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루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왕과 기약 없는 작별을 했다.
다시 창조 세계로 모습을 드러낸 루터를 수많은 이들이 환영했다.
루터는 자신을 초롱초롱하게 바라보는 이들을 보며 무미건조한 감정을 느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허무함의 영향이었다.
마왕의 말대로 공허를 흡수한 대가로 얻은 허무함은 녹록지 않았다.
모든 게 덧없이 느껴진다.
루터는 반기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간섭은 여기까지다.’
떠날 시간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루터는 고민하다 솔직하게 밝히기로 했다.
무책임하게 홀연히 떠나고 싶지 않았다.
짊어진 책임감이 흐릿해지기 전에 모두를 납득시켜야 했다.
그래서 모두 모인 자리에서 루터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빈민 출신의 고아였다. 어렸지만, 빈민의 삶은 세상의 현실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생존을 하려면 구걸이나 도둑질을 하는 것보다 번듯한 안전처가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 그래서 허드렛일을 시작했다.”
아무도 몰랐던 루터의 과거였다.
모두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그의 이야기에 경청했다.
“운이 좋아 마법사의 시동이 되었다. 그런데 마법사는 치매 끼가 있었어. 일어나면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고 강짜를 부리는 일이 잦았지. 폭언에 시달렸고, 심하면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마법을 난사해 소동을 피우기도 했지. 죽는 시동도 있었지만 난 살아남았다. 그리고 어느 날 마법사가 갑자기 마법을 가르쳤다.”
몰랐지만 시동이었던 루터는 마법의 재능이 뛰어났다.
글자를 떼고 룬어를 익히는데 걸리는 기간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천재성은 곧 두각을 드러냈다.
루터의 재능을 알아본 마법사가 본격적으로 재능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을 가르친 대가로 전쟁터로 떠밀었다. 수많은 전쟁을 반복하면서 생과 사의 경계선에 있던 날이 잦았고, 하루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마도사가 되었고 나는 삶의 탈출구를 발견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룬어에 대한 이해도와 마법 학문의 재능이 갖춰져야 했다.
루터는 고루고루 갖췄고 그래서 시도했다.
과거로 돌아갔다는 루터의 이야기에 모두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특히나 루터와 초창기 여정을 함께 했던 돌켄 등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자크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앳된 마법사인데도 완숙함이 느껴지더라니. 그런 이유였어.”
용병의 관찰력은 비상하다.
그리고 그들은 루터를 잘못 보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가 평이하게 돌아갈 것 같았던 루터의 삶에 다시 굴곡이 찾아왔다.
사해, 드래곤, 마물.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쳤던 마왕의 존재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아득한 존재들이다.
아연실색하는 사람들 사이로 루터의 이야기는 마침내 끝에 이르렀다.
“그리고 공허라는 강력한 힘을 얻었다. 이를 통해 현 세계에 침입한 낙사노르의 마왕들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허무함을 얻었다 공허의 허무함은 당연한 현상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지만 그 근원은 비었으니까. 공허가 된 내게 찾아온 자연스러운 과정이지. 그리고 나는 지금 허무함으로 인해 긴 잠에 들 생각이다.”
루터의 설명이 끝났다.
그는 얼떨떨해하는 사람들에게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나는 공허로 떠나야 한다. 우리는 이제 작별해야 한다.”
듣던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장 루터가 필요한 부분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루터는 이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허무함에 대해 설명했다.
“모든 게 덧없다 느껴지면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어쩌면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존재가 될지 모른다. 나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그가 구하는 이해에 사람들은 붕어처럼 입을 뻥긋거렸다.
안된다고 떠나지 말라 하고 싶지만 루터의 터놓은 이야기에 무어라 말하기 어려웠다.
칼루아가 근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마스터. 전혀 다른 존재가 되면 어떻게 되나요?”
“모든 게 무감각해진다. 너희들에 대한 내 감정과 추억 또한 잊거나 아무 느낌도 들지 않겠지.”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현재의 의식은 그대로 남겠지만, 그렇다고 존재에 대한 감흥은 식어버리다 못해 사라진다.
칼루아의 눈에 슬픔이 어렸다.
“너무 슬프네요.”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내 계획 대로 한다면 내 안의 감정이 사라질 일은 없을 거다.”
루터는 모두를 돌아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게 최선이다. 모두 내 뜻에 따라다오.”
콕스가 쓰게 웃었다.
“누구도 바라마지 않을 힘을 거머쥐었지만, 정작 중요한 건 잃을 판국이군.”
정령왕들은 루터의 의견에 찬성했다.
“추억은 그리 많지 않지만, 당신의 기억 속에 우리들이 좋은 감정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대는 초월자. 자비는 축복이고, 무관심은 저주에 가까울 테니까.”
강력한 존재에게 긍정적인 면을 남길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키아라는 정령왕들과 생각이 달랐다.
“루터는 언제나 한계를 돌파했잖아. 그 허무함이라는 것도 이겨낼 수 있지 않아?”
“키아라. 나는 이미 공허 그 자체가 되었다. 지금 내게 찾아온 현상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겨내는 문제가 아니야.”
“그래도 떠나는 건 싫어.”
울 듯한 키아라의 말에 루터가 쓰게 웃었다.
“완전히 떠나는 건 아니다. 육신은 이제 덧없지만 그래도 그리워하는 너희를 위해 이곳에 남겨두마.”
공허 그 자체가 된 루터에게 육신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허나 자신을 기억해주는 이들에겐 그나마 위안이다.
키아라는 흐릿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언제 돌아올 건데?”
“기약할 수 없어. 하지만 날 부르면 찾아가마.”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공허는 의식을 잡아먹어. 버티지 못할 거다.”
“부르면 돌아올 수 있어?”
“그래. 어차피 영원히 잠들 순 없으니까. 여기에 남겨둘 육신을 통해 날 부르거라. 하지만 가능하면 권하지 않으마. 허무함을 잠재우기 전에 날 찾으면 너희들에 대한 감정이 지워질 수도 있으니까.”
키아라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세상 다 산 표정에 루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영영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우울할 건 없다.”
“하지만 이별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필요한 일이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라.”
루터는 키아라를 달래가며 마지막 정리를 시작했다.
부서진 세계는 이미 마왕에 의해 복구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시간을 거스르고 낙사노르의 잔당을 정리했다.
인간들은 다시 엘몬트로 돌아갈 때이고, 이종족들도 원래의 터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루터는 현 창조 세계는 남겨 두기로 했다.
여기에 자신의 육신을 남겨 놓을 테니, 가끔 그리움에 찾는 이들을 위해 남겨 두었다.
육신 주변에 시간 정지를 걸어둘 생각이니 오랫동안 썩지 않고 보존을 유지할 것이다.
마침내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다.
질리언은 조금 더 루터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에게서 배운 것들을 습득하고 자신의 것으로 다듬으려면 아직도 먼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가 건넨 사명감은 가슴 속에 꼭꼭 박혀 있었다.
질리언은 아쉬웠지만 일부러 당차게 말했다.
“루터 님이 바라는 대로 성장하겠어요. 나중에 꼭 다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켜보마. 넌 잘할 것이다.”
질리언을 필두로 일행들과 이별을 나눴다.
모두가 슬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 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