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서클 영주님-157화 (157/185)

#157화 사냥

루터가 깨어나자 모두가 찾아왔다.

정령왕들은 신색을 찾은 루터를 향해 으쓱였다.

“그러면 그렇지. 평범한 인간이 아니긴 했어.”

샐리온의 너스레에 엘라임이 핀잔을 주었다.

“다급하다고 할 때에는 언제고.”

“내가 그랬나?”

대화를 나누는 정령왕들의 표정이 밝다.

그들은 나름대로 루터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루터는 정령왕 모두와 계약을 맺었다.

그가 죽으면 정령왕은 더 이상 세계에 간섭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할 일이 많았다.

정령과 계약을 맺은 이들을 늘리며 부활의 신호탄을 쏴야 했다.

잘 가던 와중에 루터의 사경은 그들의 생존권에도 큰 문제였다.

콕스가 루터를 이리저리 훑으며 물었다.

“대체 어둠의 힘은 어떻게 걷어낸 거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둠의 힘이 전신에 가득 묻어 있었다.

어느 존재건 어둠의 힘에 오염되면 타락하기 마련이다.

콕스는 루터가 이겨내리라 짐작은 했지만, 물에 씻은 것처럼 어둠의 힘을 지울 줄은 몰랐다.

몸살 걸린 것처럼 한참을 끙끙대리라 여겼는데, 순식간에 쾌차한 게 의아할 정도였다.

돌켄 등은 신색을 차린 루터를 보며 가슴을 쓸었다.

인간들은 정령왕들보다 더 다급한 심정이었다.

루터는 그들의 버팀목이었고, 든든한 의지 처였다.

그런 그의 부상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하기도 싫었다.

무사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좋았다.

모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모두의 안도 속에 루터가 말했다.

“내가 쓰러지는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구나. 이제 괜찮다.”

“그 말을 꼭 듣고 싶었습니다.”

루터가 괜찮다고 하면 정말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칼루아가 울상을 지었다.

“마스터의 빈자리가 너무 컸어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래.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마스터께서 그리 말씀하셔도 사실 조금 불안해요. 마지막에 마스터를 공격했던 그놈 말이에요. 낙사노르의 마왕이라는 게 사실인가요? 마왕이면 엄청 강력하잖아요.”

마왕은 강력한 정도가 아니다.

에네르 소울을 두른 그들의 권능은 절대적 의지를 갖는다.

쉽게 말해 걸리면 끝장이다.

칼루아의 불안감에 루터는 모처럼 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왜요?”

“내가 이겨.”

루터의 진솔한 대답에 칼루아가 활짝 웃었다.

“정말이에요?”

“언제 내가 빈말 한 적이 있느냐. 믿어도 좋다.”

“그럼요. 마스터를 믿어요.”

루터의 자신감은 호기심을 불렀다.

정령왕들이 하나, 둘씩 끼어들었다.

“정말 낙사노르의 마왕들을 물리칠 수 있겠나?”

노아스의 물음에 루터가 차갑게 말했다.

“물리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애버릴 것이다.”

단호한 대답에 듣던 모두가 흠칫했다.

콕스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낙사노르의 마왕은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야.”

그가 루터의 창조 세계를 가리켰다.

“그러지 말고 일단 이곳에 머무르는 게 어떻겠나. 정령왕에게 듣자니 자네가 직접 만든 세계라며? 아직 전체를 둘러보지 않았지만 정말 좋은 세계인 것 같아. 한동안 여기서 몸조리 하며 쉬는 게 어떻겠나?”

그는 루터가 낙사노르의 마왕과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차라리 당분간 푹 쉬며 안정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루터가 있어야 그가 창조한 세계를 확장할 수 있다.

콕스는 창조 세계를 마주했을 때부터, 루터와 자신의 역량의 차이를 알았다.

그래서 그가 남아야 했다.

루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나는 낙사노르를 제거해야 한다. 부서진 세계를 지배하는 마왕과 약속했다.”

루터는 마왕에게 빚이 있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

게다가 역량도 충분히 되니, 수고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부서진 세계를 내버려 둘 수 없어.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을 테고.”

루터는 자신을 주위로 모여든 이들을 바라봤다.

누군가는 다시 원래의 세계고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부서진 세계를 구해야 한다.

칼루아가 물었다.

“마스터.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고 있어요. 지금 저희들이 탈출한 세계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모인 김에 다 같이 보자.”

루터는 공허를 일으켰다.

칠흑의 공허가 일어나 허상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타원형의 환영이 부서진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으음.”

모두가 신음을 흘렸다.

“흐흐흑!”

“으아아앙!”

중년 아낙이 흐느끼고,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대부분의 수심이 어두웠다.

부서진 세계는 불타고 있었다.

하늘은 핏빛 먹구름이고, 바닥은 균열이 났다.

그 위로 마물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마물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고통의 비명을 지른다.

피 냄새가 물씬 풍기는 광기의 향연이 벌어진다.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장내의 이들의 얼굴에 먹구름이 떠올랐다.

루터가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돌아가겠다.”

그의 선언에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인간과 이종족들이 그를 말렸다.

“가지 마세요!”

“위험해요!”

모두의 만류에 루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 신뢰가 없었나?”

키아라가 침착하게 말했다.

“루터에 대한 걱정이 크니까. 한 번 쓰러졌으니 두 번 쓰러지란 법은 없잖아. 솔직히 나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냥 여기 평생 머무르며 행복하게 살자.”

키아라를 필두로 대부분이 반대하는 눈치였다.

루터는 아무리 말로 설득해도 이들이 믿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 그때, 하늘이 크게 흔들렸다.

쿠르르릉!

천둥소리가 일더니 대지가 진동한다.

무슨 일일까.

모두가 의아할 때, 루터는 나 홀로 혀를 찼다.

“왔구나.”

그의 중얼거림에 키아라가 쳐다봤다.

“누가 와?”

“낙사노르의 마왕들. 기어이 날 잡으러 왔어. 지독한 놈들이군.”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장에 유리처럼 금이 가더니 산산조각이 났다.

콰차차창!

깨진 균열 사이로 일전의 귀갑 마왕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가 혀를 날름거렸다.

“내가 다시 돌아온다고 했지?”

“으아아악! 괴물이다!”

귀갑 마왕의 등장에 사방이 혼비백산했다.

루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름 튼실하게 구성했다고는 하지만 낙사노르의 마왕들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었어.”

이제 와 보니 마왕이 자신이 만든 창조 세계에 회의적인 반응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제집 드나들 듯 저리 자유롭게 오간다면 도망가 봤자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귀갑 마왕의 위용은 웅장했다.

드래곤에 버금가는 크기에 몸집은 훨씬 더 육중했다.

그가 창조 세계에 몸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루터는 마침 잘 되었다 싶었다.

“달라진 내 모습을 보여줄 기회겠어.”

사람들의 우려를 종식시킬 좋은 상황이었다.

귀갑 마왕이 광소를 터트렸다.

“발각된 이상 절대 달아나지 못한다. 곧 너희들을 내 먹이로 삼아주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신에서 마물이 쏟아졌다.

마치 사막을 지키는 벌레 떼를 연상시켰다.

마물은 커다란 메뚜기의 생김새에 양팔에 갈고리를 장착했다.

전신에 흘러내리는 진액에서 악취가 풍겼다.

단순한 마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귀갑 마왕의 기생 마물이었다.

사냥감의 몸에 알을 심어 부화를 시킨다.

알에서 깨어난 마물은 숙주에게 고통과 공포를 안겨준다.

그렇게 숙주를 잡아먹은 마물은 다시 귀갑 마왕의 먹이가 된다.

귀갑 마왕이 에네르를 쌓는 방식이었다.

창조 세계를 부수고 나타난 귀갑 마왕이 지상으로 추락하듯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착지를 도우려는 듯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마물 떼가 덮쳐왔다.

긴급한 순간이었고, 콕스와 정령왕들이 방어를 펼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귀갑 마왕과 마물 떼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뭐, 뭐야!”

“없어졌어!”

“어디 갔지?”

두리번거리던 콕스가 흠칫했다.

“루터는 어디 갔지?”

그의 중얼거림에 그제야 깨달은 일행은 어리둥절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혼동이 인 이들은 연유를 몰라 한참을 아연실색했다.

귀갑 마왕은 뭔가 이상하다고 깨달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조금 전까지 포식할 생각에 함지박만 하게 입을 벌리며 즐거워하던 귀갑 마왕은 갑자기 주변의 환경이 뒤바뀌자 어리둥절했다.

주변을 훑은 그의 표정에 불안감이 일었다.

조금 전까지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어 오던 초원에서 우주의 별 무리 속의 외따로이 서 있는 섬 같은 장소로 바뀌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귀갑 마왕은 혼란스러웠고, 마찬가지로 먹이를 기습하려던 마물들도 당황했다.

루터가 나타났다.

기척도 없이 귀갑 마왕의 안면 앞에 섰다.

거대한 체구 위로 우뚝 선 마왕이 점처럼 작은 크기의 루터를 발견하자 냉큼 물었다.

“너! 네가 그랬느냐!”

루터는 말없이 귀갑 마왕을 바라봤다.

무표정한 시선이 꺼림칙하다.

귀갑 마왕은 불안을 종식시키기 위해 마물을 부렸다.

동시에 에네르 소울로 권역을 확장시키고 방비를 세웠다.

키아아악!

마물 떼가 루터를 향해 쏟아졌다.

그때까지도 루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뒷짐을 진 채, 귀갑 마왕의 눈을 바라볼 뿐이다.

그사이 득달같이 달려든 마물이 루터를 에워쌌다.

순식간에 잡아먹히리라 짐작했지만, 예상은 한참을 엇나갔다.

“어? 어?”

귀갑 마왕은 수상함을 눈치챘다.

자신의 의지에 조종당하는 마물들이 갑자기 행동을 멈추고 허공에서 날개 짓만 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 이 하찮은 것들아! 어서 주인의 명을 받들 어라!”

마왕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마물은 여전히 꼼짝도 안 했다.

그러다 변화가 일었다.

마물이 방향을 틀었다.

루터가 아닌 귀갑 마왕을 향해서였다.

“뭐, 뭐야!”

놀란 귀갑 마왕에게 루터가 나직이 말했다.

“끝났다.”

귀갑 마왕이 번개같이 루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너에 대한 분석이 끝났다.”

루터는 귀갑 마왕의 내면을 관조했다.

공허를 통해 그의 근원을 들여다보았고, 발생의 어원을 찾았다.

“너는 태생이 기생충이었구나. 그러다 어둠의 힘을 접하고 기생 마왕이 되었어. 너는 네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스스로를 팔랑크스라 칭했지만, 원래는 기생충에 불과했어. 어둠의 힘이 놀랍긴 놀랍구나. 한낮 벌레 따위에게 의지를 심어주고 마왕의 위치로 올라서게 했으니 말이다.”

귀갑 마왕은 크게 당황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루터는 싸늘히 말했다.

“더 이상 볼 것 없다. 너는 마왕이지만, 하찮구나. 네 존재는 가치가 없다. 이대로 사라지거라.”

그가 손짓했다.

마물이 일제히 귀갑 마왕을 향해 날아갔다.

귀갑 마왕은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마물의 의지에 간섭하는 한편, 확장한 에네르 소울을 통해 루터를 쥐어짜려 했다.

일전에 사용한 은밀한 손길도 뿌렸고, 압축 능력으로 루터를 찌그러트리려 했다.

그런데 그의 에네르 소울은 작용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놀라는 그에게 루터가 주변을 가리켰다.

“보아라. 이 공간 자체가 내 의지다. 너의 에네르 소울로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더냐?”

“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처음엔 단순히 맛좋은 먹잇감이었다.

상대에게서 에네르 소울을 느꼈지만, 하찮았다.

다른 마왕들이 잡아먹기 전에 얼른 차지해야 했다.

조급함이 있었고 그래서 서둘렀다.

그런데 상대가 만만찮았다.

위기의식은 순식간에 생존 본능으로 뒤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조종한 마물이 자신에게 알을 까기 위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귀갑 마왕은 그들을 치워내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온몸이 꼼짝할 수 없었다.

신체가 의지를 거부한다.

이 현상은 마왕 그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에네르 소울.

상대의 에네르 소울이 훨씬 윗줄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귀갑 마왕이 부르짖었다.

“날 놔줘!”

생존 본능이 일어나자 마왕이 간절하게 외쳤다.

루터는 그가 뭐라 하건 개의치 않았다.

그저 호기심이 있었다.

‘에네르를 얻는 방법이 독특하다.’

대상의 몸에 기생하여 알을 까는 게 특이했다.

그 사이 마물들이 귀갑 마왕의 전신에 달라붙어 알을 까기 시작했다.

자신이 행했던 방식 그대로 최후를 맞이하는 귀갑 마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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