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서클 영주님-151화 (151/185)

#151화 뜻밖의 조우4

괴물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이름을 알려주었다.

질리언은 얼떨떨했다.

왜 그가 자신에게 이름을 알려주었을까.

심지어 곧 아카데미에 퇴학당할 처지에 놓였다.

이유가 너무 궁금했다.

묻고 싶었지만 루터는 바빴다.

루터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물을 추궁했다.

“자, 다시 묻겠다. 널 소환한 장본인이 누구냐?”

“모, 몰라!”

“보기보다 충성심이 있구나. 그래. 언제까지 견디나 지켜보겠다.”

루터는 고문을 재개하려 하자 마물이 악다구니를 썼다.

“정말이야! 정말 몰라! 누가 날 소환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걸 보아 거짓 같지는 않았다.

루터는 인상을 찡그렸다.

“낙사노르의 마물이 자신을 소환한 장본인을 모른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저, 정말이야. 갑자기 소환의 문이 열렸고 그대로 들어갔을 뿐이야 그리고 소환의 문을 연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그 후엔 어떻게 했지?”

“일단은 살아남아야 해서 모습을 숨기고 동태를 살폈다. 단지, 그뿐이야.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제발 살려줘.”

마물의 애원에 루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수가 있나?”

이상하다 여겼다

루터는 마물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제는 그 어떤 존재도 범용 가능한 전투력 측정 수치가 마물의 상태를 확인시켜 주었다.

고작해야 50만 내외.

물론 적은 수치는 아니지만 이제까지 호풍환우 하는 그간의 낙사노르 출신 마물을 감안해 보면 터무니없이 적다.

이 세계에 나타나도 질리언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사로운 문제를 일으킬지언정 세계에 위험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다.

“질리언을 농락한 이유가 무엇이냐?”

“지, 질리언? 그게 누군데.”

루터는 마물을 들어 올려 질리언을 보여주었다.

“일순간 광기에 휩싸였다. 네 짓인데, 왜 그랬느냐?”

“그, 그건.”

마물이 얼버무리려 하자 루터는 다시 고문을 가했다.

백열이 그의 전신을 달궜다.

“끄아아악! 그만! 그만해!”

“자, 이유는?”

“끄으으윽. 나, 나는 증오를 먹고 산다. 대게의 마물이 그래. 대상의 증오를 먹고 힘을 키운다.”

“네 짓은 문제가 된다는 걸 알고 있느냐?”

“아, 알아. 잘못했어. 그러니 용서해줘!”

“바랄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지. 너는 날 잘 모르는구나.”

루터는 마물을 잡아당긴 뒤, 사납게 을러댔다.

“멋대로 건너와 쥐 죽은 듯 지내도 모자랄 판국에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될지 생각도 못했다. 네 죽음은 누구의 탓도 아닌 네가 저지른 업보다.”

“잘못했어! 살려줘!”

루터는 애원하는 마물을 그대로 불태웠다.

백열을 넘어 청색 불꽃이 그를 뒤덮었다.

“끄아아악!”

마물이 단말마와 함께 전신이 타올랐다.

그와 함께 그동안 지탱해 온 책 속의 새로운 세계가 균열을 일으켰다.

쿠구구궁!

천장과 바닥이 갈라지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루터는 질리언에게 손짓했다.

“가자.”

“아, 예.”

질리언은 그의 옆에 찰싹 붙었다.

루터는 질리언의 어깨를 짚고 바닥을 때렸다.

콰아아앙!

세계가 부서지고 두 사람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겪었던 과정이 꿈만 같다.

얼떨떨한 질리언에게 루터가 진실을 알려 주었다.

“나는 올렌도 출신이 아니다.”

질리언이 그를 쳐다봤다.

“올렌도가 아니라고요?”

“그래. 올렌도에 대해서 나중에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극단적인 속성을 익히게 될 경우 서클의 성취가 턱없이 낮아진다. 올렌도 마탑은 빙계 속성을 주력으로 다루지만 성취는 낮다. 잘해봐야 6서클이 최대일 거다.”

“그렇군요. 어쩐지 빙계 마법사시면서 화염계 마법을 다루는 게 이상하다 했습니다.”

“마도사는 속성을 가리지 않는다.”

“저도 마도사가 될 수 있을까요?”

희망 섞인 질문에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너는 가능성이 있다.”

질리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사이 도서관 사서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놀란 목소리를 듣자니 마물의 세계가 붕괴되면서 소리가 외부에 들린 모양이다.

“조용한 곳으로 가자.”

루터는 그를 붙잡고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헉!”

질리언이 눌린 신음을 터트렸다.

공간 이동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충격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루터의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이 세계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를 잡으러 왔다. 원래는 인재를 찾으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 단지, 아카데미에 머무르려는 목적이었을 뿐이지. 그러던 와중에 널 발견했다.”

질리언의 눈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절 보고 마음에 드셨나요?”

“그래.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게 가능성이 있어. 네 자신감은 결코 자만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

“가, 감사합니다.”

감격한 질리언에게 루터가 정체를 밝혔다.

“나는 바스코 제국에서 활동한다. 엘몬트 영지의 주인이기도 하지.”

“엘몬트? 엘몬트요?”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다급히 물었다.

“그럼 혹시 황제의 병을 치료한 기적의 마법사이신가요?”

“그렇게 불리고 있지.”

“세상에 맙소사.”

떠오른 충격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황제를 치료한 기적의 마법사라니.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질리언이 말을 더듬었다.

“뵈, 뵙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겸양은 됐다. 이제 네 처지를 알아야겠다. 나를 따르고 싶으냐?”

루터의 질문에 질리언은 두고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기적의 마법사께 마법을 배운다는 건 정말 큰 기회니까요.”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한 게 오히려 호재다.

싱글벙글한 질리언에게 루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넌 내게서 마법을 배우지 않는다.”

“네? 그, 그럼.”

“질리언. 나는 마도사다. 재능을 알아보지만,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내가 보는 기준은 상당히 높아. 자, 여기서 묻자. 내가 원하는 기준이 무엇일 것 같으냐?”

“모, 모르겠습니다.”

“마나의 축복을 받았으며,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를 바로 내가 보는 기준이다.”

설명을 들은 질리언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루터의 의도를 눈치 챘다.

“제 길을 스스로 만들라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만한 역량이 있으면 이끌고 나가야지. 시켜서 배우고, 이미 개척한 길을 따라가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개척하는 건 힘든 일이지. 너는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

얼핏 무책임해 보일 수 있지만 질리언의 눈은 별처럼 빛났다.

“절 높이 평가해 주시네요.”

“할 수 있겠느냐?”

“자신 있어요. 언젠가 반드시 루터 님 못지않은 마도사가 되고 말겠어요!”

당찬 질리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너의 강점은 그 자신감일 거다. 포기하지 말고 불굴의 의지를 새겨라. 그렇다면 너는 누가 떠밀지 않아도 스스로 올라설 것이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네요.”

“엘몬트로 보내주마. 그곳에 아카데미가 있고 나 못지않게 뛰어난 마법사가 있다. 그는 자유로우며 제멋대로지. 너와 죽이 잘 맞을 거다.”

“엘몬트에도 아카데미가 있었나요?”

“그래. 그곳에 가서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뭔가요?”

“아카데미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배우는 학생들은 모두 어리고 순진하다. 네가 그들을 이끌어 주어라. 앞으로 엘몬트 마법 아카데미는 사명감을 띄어야 한다. 그 책임감을 네가 안고 가줬으면 좋겠구나.”

루터는 자신의 차세대로 질리언을 점찍었다.

주저하는 법이 없고 망설이지 않는다.

자신감에 차 있으며 뚝심이 있으니 이보다 좋은 후계자가 없었다.

질리언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제가 그들을 이끌어갈게요.”

“그래. 잘 할 거다. 이제 이곳 생활을 정리해라. 곧 떠나겠다.”

“알겠습니다.”

엘몬트에서 기회를 잡아 가슴이 벅차지만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

‘반드시 올라서겠어.’

자신을 믿어준 루터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

결연히 다짐한 질리언은 서둘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질리언의 퇴학 수순은 빠르게 결정을 지었다.

지도 마법사를 죽이려고 했으니, 옥살이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루터의 옹호와 지도 마법사의 동의가 이뤄지고 학장의 결정을 내림으로써 최종 처벌은 퇴학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루터는 떠나는 질리언의 자신감을 세워주고 싶었다.

떠나는 질리언은 아카데미의 기억 속에 낙제점에 불만을 품어 살인을 저지르려 한 학생으로 기억될 것이다.

허나 그렇게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도 잊고 싶은 기억보다는 자부심을 세워 줄 수 있는 추억이 되면 좋을 것이다.

루터는 학장과 대면했다.

“학생을 선택했소. 그를 데려가겠습니다.”

학장이 화색을 띠었다.

“축하드립니다. 그 학생이 누굽니까?”

학생을 빼가는 일이지만, 학장은 양팔 벌려 환영했다.

마탑이 아카데미 학생을 지목하면 막대한 기부금을 내밀어 준다.

또한 유명한 마탑에 들어갔으니 아카데미의 명성도 오른다.

루터는 속으로 웃으며 학생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 학생은 질리언이요.”

“아, 질리언이라는 학생이군요. 아, 아니. 잠깐만.”

웃던 학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해졌다.

질리언이라는 이름이 익숙했다.

바로 어제부로 아카데미에서 퇴학시킨 학생이었다.

그런데 마탑에서 데려가겠다고 한다.

학장이 당황했다.

“그, 그는 퇴학당한 학생입니다.”

“그렇지. 그러니 우리 마탑에서 당신네 아카데미에 기부금을 낼 이유가 없어졌지.”

루터는 일어나며 말했다.

“안타깝게 되었소. 지도 마법사가 조금 더 너그러웠으면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을 텐데. 편협한 지도 마법사를 둔 당신의 책임이기도 하겠군.”

“아, 아니. 잠깐만요.”

“조언 하나 하자면, 그가 로스트 마법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내세워 자랑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학생의 재능을 볼 줄 모르는 아카데미라고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이 될 테니까.”

학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루터는 말을 못 잇는 그를 지나 마지막 수업을 진행했다.

공교롭게도 질리언의 강의실이었다.

루터는 벌써부터 짐을 한가득 등에 멘 질리언에게 말했다.

“퇴학당하긴 하지만 말도 없이 떠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동안 동문수학한 친구들에게 인사는 하고 가자.”

“전 친구가 없어요.”

“사교성이 부족하구나.”

“본인들보다 앞서가면 괴롭히고 싶어 안달 난 놈들과는 친해지고 싶지 않아요.”

“엘몬트에 가면 그곳 학생들에게 네 경험을 알려주어라. 항상 그 점을 경계하도록 하고.”

“명심할게요.”

“어차피 떠나는 마당이니 한 마디 해주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너는 선택 받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음.”

고민하던 질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스대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깨닫게 해주고 싶어요.”

“그래. 잘 생각했다. 가자.”

루터는 이제는 떠나게 될 질리언의 강의반에 들어갔다.

웅성대는 학생들이 짐을 등에 멘 질리언을 쳐다봤다.

루터가 말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는 이 아카데미에서 재능 이는 수습 마법사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찾았으며 이제 작별하겠다. 보다시피 질리언이다.”

“맙소사!”

“말도 안 돼!”

모두가 놀라는 와중에 한 학생이 따지듯 물었다.

“질리언은 화염 속성 마법을 다루는데, 어떻게 빙계 속성을 다루는 올렌도 마탑에 들어갈 수 있죠?”

루터가 그 말에 대답했다.

“맞다. 그래서 질리언은 바스코 제국의 엘몬트에 가게 될 것이다. 기적의 마법사가 그를 선택했다.”

모두의 얼굴에 경악성이 떠올랐다.

“말도 안 돼요!”

“거짓말! 거짓말이야!”

충격의 해일이 좌중을 휩쓸었다.

루터가 차갑게 웃었다.

“거짓말이든 아니든 두고 보면 알겠지. 질리언. 떠나는 마지막에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거라.”

이 순간을 기다렸다.

질리언은 자신을 괴롭힌 학생들의 놀라는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나는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는데, 남은 너희들은 내려갈 일만 남았네. 내 기억 속에 너희들은 능력은 없는데 시기, 질투만 많은 무능력한 바보들이었어. 너희들도 날 기억하겠지. 지금은 너희들보다 작지만 언젠가 난 큰 사람이 될 거야. 내 이름이 대륙을 진동하고 명성이 퍼질 거야. 그때가 되면 너희들은 날 부러워하겠지.”

질리언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눈에 불을 켰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질투나 하며 감정 소모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게 좋을 거야. 그게 아니면 영영 뒤처질 테니까.”

질리언은 놀란 학생들을 뒤로하고 루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터는 질리언과 함께 나란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물었다.

“속 시원해 보이는구나.”

질리언은 말없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로스트 마법 아카데미를 벗어났다.

#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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