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뜻밖의 조우
영지는 굳이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원활히 돌아가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방향을 짚어주면 잘 쫓아갔고, 그런 아이들을 콕스가 옆에서 잘 보조해 주고 있었다.
도시 내의 발전 계획은 어느새 바네사의 전담 분야가 되었다.
바네사는 수로 외에도 도로 확충에도 손을 댔다.
그녀는 능력이 있었고, 혼자서 역량을 끌어안기에 충분했다.
엘레나와 돌켄도 기지개를 켰다.
그들은 바스코 수도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로 치밀한 사전 조사와 진행을 위해 조직을 창설했다.
본격적인 엘몬트 정보 조직의 탄생이었다.
그 외에도 바르코즈나 케인이 영지의 살림을 잘 끌어나가고 있다.
모두가 각자의 영역에서 부지런히 활동하니 걱정할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몬트에 라피드 대사제가 방문했다.
그는 전처럼 루터를 쉽게 응대하지 못했다.
그는 수도에서 루터가 일으킨 파장을 알고 있었다.
흑마법의 출현을 알렸고 황제 암살 시도의 배후로 포츠 후작가와 베르뉴 마탑을 지목했다.
그로 인해 지목당한 두 세력 모두 풍비박산이 났다.
거센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황제는 감시 체계를 공고히 했고, 덕분에 중앙 권력이 강해졌다.
파벌 싸움에 치열했던 귀족과 황자들은 몸을 사렸다.
이 모든 게 엘몬트 백작이 일으킨 과정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 일을 회자하며 엘몬트 백작의 공헌을 칭송했지만 몇몇 이들은 달랐다.
대부분이 사건의 내막을 훑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엘몬트 백작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의심했다.
사건이 극적이고 공교로웠기 때문에 당연한 의심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지금에 이르자 감히 그를 모함할 생각을 못했다.
어찌 되었건 엘몬트 백작은 흑마법사의 존재를 밝혀낸 공신이다.
의심을 하다 괜히 엄한 돌에 맞을 수도 있었다.
라피드 대사제는 엘몬트 백작을 의심하는 위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말을 결코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현 대륙의 정세는 엘몬트 백작에 대한 믿음이 강력하다.
그가 길가에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아 흑마법사라고 규정 지으면 모두가 철석같이 믿는다.
그러니 행동거지에 주의해야 했다.
다시 나타난 라피드 대사제는 전보다 더 예의가 발랐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엘몬트 백작 각하.”
태도조차 윗사람을 대하듯 극진했다.
“어서 오시오.”
루터는 공손한 라피드 대사제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자신이 수도에서 벌인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생각이라는 게 있으면 자신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뻔했다.
라피드 대사제는 가볍게 안부 인사를 나누고 용건을 꺼냈다.
“엘몬트의 선량한 시민들을 위하여 바다에 축복을 기원하는 신성력을 가져왔습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설명을 시작하고 듣던 루터는 흡족했다.
바다의 날씨는 함부로 측정하지 못한다.
아네스 교단도 그 사실을 알기에 바다의 날씨를 다스리려는 시도보다 사람들의 안전을 위한 축복이 대부분이었다.
특히나 마음에 드는 축복이 있었다.
“위험에 처하면 봉화의 빛이 나타난다는 게 마음에 드는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다의 등대 같은 역할인 셈이다.
루터는 라피드 대사제의 결과물을 치하했다.
긍정의 바람이 흐르자 라피드 대사제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이제 한고비를 넘겼다.
그가 조심스럽게 신전 건립을 입에 담았다.
“그러면 신전을 세우는 것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부지만 결정되면 바로 시작합시다.”
시원시원한 대답에 라피드 대사제의 얼굴에 기쁨이 차올랐다.
“감사합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다 수용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시지요.”
“엘몬트에 세울 신전의 설계도는 저희가 맡지요. 그리고 책임자 역시 제가 지목한 인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를 대사제의 지위로 올리세요.”
라피드 대사제가 신음을 흘렸다.
역시나 쉽게 넘어가는 게 없었다.
“다른 건 다 수용하겠지만, 대사제를 책임자로 내세우는 건 조금 곤란합니다. 저 혼자만 결정할 수 없으니까요.”
“콜론 후작령의 테베 사제의 명성이 제법 높다더군요.”
루터는 일전에 보았던 테베 사제의 이름을 언급했다.
라피드 대사제의 표정이 일변했다.
“정말 그를 원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테베 사제 외에는 누구도 고려하고 있지 않으니 그대로 추진하시길 바랍니다.”
루터의 일방적인 지시에 라피드 대사제는 군소리 하나 없었다.
테베 사제는 자신의 최측근 중 하나이다.
그를 대사제로 내세울 시도를 하려다 역풍을 맞았는데, 이번 명분은 다시 테베를 대사제로 만들기에 최적의 구실이 될 수 있었다.
“당장 그리하겠습니다.”
라피드 대사제는 엉덩이 가벼운 사람처럼 들썩거렸다.
당장에라도 수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돌연 그의 눈이 휙 뒤집혔다.
루터는 혀를 찼다.
“또 왔군.”
라피드 대사제의 얼굴이 뾰족해졌다.
조심성 많은 그가 루터를 노려볼 리가 없다.
라피드 대사제의 몸에 강림한 아네스가 물었다.
“소른 영지에서 있었던 일은 어떻게 되었지?”
“몸 주인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들락거리는 게 아니냐?”
“이게 편해.”
“네 부하들이 고생이 많구나.”
“그건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대답은 언제 할 거야? 해결했어? 안 했어?”
“알아서 해결했다.”
아네스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정말 해결했어?”
“그래.”
아네스는 한참이나 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는 시선을 접었다.
“알았어. 이제 다른 대상을 잡아야 해.”
“흔적을 찾았나?”
“이번에도 로스트 왕국이야. 이번 대상은 수도의 한 아카데미에 있어. 로스트 마법 아카데미.”
“마법 아카데미?”
“그래.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얼른 제거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네스는 대사제의 몸에서 떠났다.
잠시 후, 대사제가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가 얼떨떨한 눈으로 물었다.
“혹시 제가 정신을 잃었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루터가 말했다.
“라피드 대사제. 몸조리 잘 하시오.”
라피드 대사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게 말입니다. 기회를 봐서 푹 쉬어야겠습니다.”
중요한 자리에 두 번이나 혼절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듯해 요양을 해야겠다.
루터는 대사제가 떠난 자리로 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톡톡 때렸다.
“이러다 오만 거짓 연기를 다 하게 생겼군.”
소른에서는 방랑 기사가 되었고 이번에는 중앙 수도에서 마법 지망생을 자처해야 한다.
“설마 그들도 모종의 사정이 있을까?”
약자는 잘 숨는다.
이번에 건너온 낙사노르의 마물들은 예전처럼 활보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 사이로 숨어 자신들 만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루터는 그 활동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혹시나 이번에도 그런 경우일까.
루터는 떠날 준비를 하다 쓴웃음을 띠었다.
“이러다 익숙해지겠어.”
거짓 삶을 연기하는 게 스스로도 능숙해 혼동이 올 지경이다.
그는 전에도 그랬듯이 가신들에게 공석을 알린 뒤, 다시 로스트 왕국으로 이동했다.
수도에 나타난 루터는 로브를 착용했다.
마법사 의상의 기본은 펑퍼짐한 로브다.
지팡이를 숨기기 좋았고, 로브에 마법진을 새겨 언제 어느 때건 비상이 걸린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가 가능했다.
루터는 도심을 걸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왕을 만났으면 좋겠는데, 신이 되기 위해 바쁜듯하니 그러지도 못하겠다.’
소른에서 조우한 변절자와 마물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필요했다.
허나 마왕은 공석이고, 아네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아네스는 마왕처럼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교류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복귀하면 가장 먼저 이 주제를 두고 대화를 나눠야겠어.’
아무래도 중요한 화두였다.
특히나 낙사노르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현시점에선 더더욱 그랬다.
아네스는 친절하지 않았다.
변절자가 마법 아카데미에 있다는 내용만 전달한 채, 그 밖의 사항은 알려주지 않았다.
원래 그것만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골리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로스트 왕국의 마법 아카데미는 하나밖에 없다.
루터는 아카데미를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지도 마법사로 하기로 했다.
수련 마법사는 행동에 제약이 많이 따르니 당연한 결정이었다.
아카데미는 수도 외곽에 콜로세움처럼 둥글게 세워져 있었다.
그는 들어가기 전에 외양과 신분을 조작했다.
마법사는 나이가 많을수록 신뢰감을 형성한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바꾸고 출신은 올렌도로 하였다.
올렌도는 할루인 공국을 근거지로 한 마탑으로 드물게 빙계 마법을 주력으로 한다.
빙계 마법사는 희소성이라는 가치 때문에 어딜 가도 대접받는다.
루터는 자신을 6서클 빙계 마법사로 위장한 뒤 입구의 검문소로 향했다.
검문소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주로 학생 신분이거나 아티펙트를 취급하기 위해 찾아온 상인들이었다.
루터는 그들을 건너뛰고 입구로 향했다.
검문하는 병사들의 태도가 조심스럽다.
노마법사는 그 존재만으로도 대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올렌도 마탑에서 왔다. 학장에게 안내하라.”
“올렌도 마탑!”
근처에서 귀 기울이던 한 청년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외침에 다른 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올렌도 마탑의 마법사래.”
“진귀한 마법사의 등장이네.”
“대체 거기가 어떤 곳인데?”
“모르나? 거긴 빙계 마법을 다루잖아.”
“빙계 마법? 진귀한 능력이네.”
수군거리는 소릴 들은 병사들이 범상치 않다 여기며 부랴부랴 움직였다.
잠시 후, 아카데미 학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추한 곳에 기다리게 하여 죄송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학장의 극진한 안내 속에 루터는 거들먹거리며 그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학장이 물었다.
“올렌도 마탑의 마법사께서 어쩐 일로 저희 아카데미에 방문하셨습니까?”
“우수한 재원을 마탑으로 데려가고 싶은데, 눈에 차는 이가 없소. 로스트 왕국의 마법 아카데미는 인재가 많다 하니 잠시 관찰할 겸 찾았소.”
“그러시군요.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기 바랍니다. 그 전에 염치없지만 한 가지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부족한 저희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하여 잠시나마 빙계 마법을 가르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빙계 마법사는 희귀하다.
학장의 간절한 요청에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대신 아카데미 내에서 내 심기를 건드리는 자가 없어야 할 거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지금 바로 특별 초청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능력이 있으니 자리 잡는 것 또한 빠르다.
루터는 고작 며칠 사이에 치안 기사에서 마법 아카데미 지도 마법사가 되었다.
그는 일부러 신경질적인 마법사 노릇을 했다.
그래야 성가신 일이 없다.
루터는 일단 첫날부터 아카데미 전체를 둘러봤다.
학장이 안내하겠다며 부득불 나서려 했지만, 성가시게 하지 말라는 한 마디로 입을 다물게 했다.
돌아다니는 루터는 금세 내부의 분위기를 파악했다.
‘어디든 마법사 무리는 똑같지.’
착용한 복식 아래로 자신들이 다루는 원소 계열의 표식을 가슴이나 배에 새겨 다른 원소 계열 마법사를 견원시 하고 있었다.
흔한 광경이다.
마탑이든 아카데미든 마법사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무리들로만 어울려 지낸다.
그 기준은 다루는 원소 계열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랐다.
그래서 마탑을 세우면 한 가지 계열을 추구하기 마련이었다.
그곳은 불협화음이 적었지만 아카데미는 모든 것을 총괄한다.
당연히 서로 다른 계열의 마법을 익히는 학생들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같은 계열의 마법 학생들이 서로 똘똘 뭉치며 저들이 최고라고 우긴다.
편협하고 오만한 마법사들은 수습인 꿈나무들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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