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수색2
검문을 통과하고 내성으로 진입하는 동안 루터는 사피엔트 남작 가문과 헤어졌다.
혹시 선별 자격에 떨어진다면 자신의 가문을 찾아 달라는 당부를 뒤로하고 알음알음 물어 기사를 선별하는 모집소로 향했다.
모집소는 이미 기사들로 북적였다.
루터는 순서를 지켰다.
기다리는 기사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앳되고 어려 견습을 갓 마친 기사부터 시작하여 한 눈에도 범상치 않은 풍모를 자랑하는 기사들까지.
그들 모두 스스로를 증명하여 소른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기사들이었다.
선별 작업은 간단했다.
간단한 대련으로 실력을 평가한 뒤, 직급을 제안한다.
수용하면 소른의 기사가 될 것이고 거절하면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그조차 제의받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모집소 내부는 평가를 기다리는 기사들과 그런 이들을 시험하는 소른의 기사들로 이루어졌다.
루터는 한창 시험에 열중인 기사들을 훑었다.
훈련용 목검으로 소른의 기사의 시험 속에서 평가를 받는데, 대부분이 변변찮았다.
어중이떠중이들의 집합소 같았다.
그 때문인지 시험을 진행하는 소른의 기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시험을 끝난 기사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그런 실력이라면 전장에서 비명횡사할 걸세.”
“강단은 좋지만 검술이 받쳐주지 못하는군. 그런 솜씨로는 소른에 들어올 수 없다.”
“자네는 평가할 가치조차 없군. 갈 데 없는 천박한 용병 검술을 다루다니. 썩 나가게!”
“차라리 병사로 자원하지 그랬나? 자네 솜씨는 잘 봐주어야 병사 수준이야.”
시간이 흐를수록 평가하는 소른 기사가 짜증을 남발했다.
그럴 만도 했다.
도저히 봐줄 만한 솜씨가 아니었다.
평가에 떨어진 기사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낙담하거나 두고 보자며 저주를 퍼붓거나.
합격은 스물에 한 명이 될까 말까 했으니, 선별 작업이 꽤나 만만찮았다.
분위기가 갈수록 험악해질 때, 루터의 차례가 되었다.
생김새를 보는 소른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외관은 합격점이었다.
용병만 얼굴이 험악하게 생겼다고 후한 평가를 받는 게 아니었다.
루터가 새긴 흉터의 자국은 지난 실전의 경험을 입증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먼저 오게.”
기사가 루터를 맞이했다.
루터는 스텝을 밟아가며 기사를 공략했다.
시험을 진행하는 소른의 기사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바로 루터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검술을 보였기 때문이다.
상대를 분석했으니, 공략은 눈 감고도 한다.
넓은 포물선을 그린 목검이 소른의 기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선 부드러운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당하는 입장에선 정신이 없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와중에 갑자기 급소를 찌르니, 당황이 이어졌다.
허둥지둥 대던 기사가 외쳤다.
“그만!”
루터는 스텝을 멈추고 목검을 거두었다.
앞선 후보들과 달리 기사들의 표정이 예의 발랐다.
“보통 솜씨가 아니시군요. 어디 소속이셨습니까?”
“제이콥 백작 가문이었습니다.”
“그렇군요.”
기사가 웃었다.
“루터 경은 합격입니다. 안내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안내인을 따라가니 작은 방에 도착했다.
안에는 협상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처럼 말쑥한 중년인과 책상이 놓여 있었다.
일어선 중년인이 맞은편의 빈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착석한 루터의 서류를 훑은 중년인이 스스로를 소개했다.
“저는 영입한 인재 기사의 직책을 담당하는 에르손 팔빈입니다. 앞으로 소른을 위해 원하는 직책이 있으면 추천을 드리겠습니다.”
영입이 잦다 보니 관련 작업이 체계적이었다.
루터는 두고 볼 것 없이 자신이 원하는 직급을 밝혔다.
“치안을 맡고 싶습니다.”
에르손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의외시군요?”
보통의 기사들은 대부분 기사단 소속을 희망한다.
헌데 루터는 치안을 원했다.
에르손이 물었다.
“이유라도 알 수 있겠습니까?”
이유는 당연히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어디든 활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루터는 속내를 감춘 채, 사연을 만들어냈다.
“제이콥 백작 각하의 휘하에 있을 때, 내부의 첩자를 발각하지 못해 전쟁에 패했습니다. 그때의 죄책감이기도 하고, 책임감 때문입니다.”
만들어 낸 사연이 감동을 일으켰다.
에르손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드릴 테니, 앞으로 소른을 위해 힘 써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소른에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루터는 에르손과 악수를 한 뒤, 거처를 배정받고 머물렀다.
이틀 뒤, 기사 서임이 이루어졌다.
영입한 기사의 서임은 중요한 일이다.
소른 공작이 직접 자리를 빛내 검을 내려트린 뒤, 충성의 서약을 맺었다.
루터는 소른 공작을 보며 이상 징후를 살피려 했으나 멀쩡하자, 아쉬움을 삼켰다.
아직 공작에게까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보다.
그는 곧장 내성의 치안 기사의 업무를 맡았다.
치안 일은 누구도 하려 하지 않는다.
일의 강도 보다는 기사들의 자존심 때문이다.
어렵게 기사가 되었는데 기사단이 아닌 일개 좀도둑이나 잡으러 다닐 순 없는 노릇이다.
치안 기사가 된 루터는 일단 휘하의 병사를 확인했다.
그가 부릴 수 있는 병사는 총 서른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의미에서 술자리를 마련했다.
왁자지껄 떠드는 와중에 한 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터 경. 헌데,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저희가 맡은 구역에 문제가 생길 경우 말입니다.”
“원래는 어떻게 처리했나?”
“이야기가 잘 오고 갔습니다.”
“뒷돈을 받고 그랬단 말인가?”
병사들이 흠칫했다.
모두가 뜨끔한 눈치이자 루터가 손사래를 쳤다.
“눈치 볼 것 없네. 공작가에서 주는 노임으로는 형편 어려운 것을 모르지 않네. 적당히 눈감아 줄 터이니 큰 문제는 일으키지 말게.”
뒷돈에 대해 적당히 용인하자 그제야 병사들의 표정이 밝았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기사는 제법 융통성이 있었다.
루터는 인사를 빌미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목적은 당연히 변절자 수색이었다.
그런데 변절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종교의 영향도 전무했다.
소른 공작은 종교의 영향력을 지양했다.
그래서 치료나 신심에 따른 활동을 제외하곤 소른에 큰 영향을 끼치지도 않았다.
루터는 그래도 뭔가 건질 게 없을까 하여 외성을 샅샅이 뒤졌다.
허나 어느 누구도 발각 되지가 않았다.
루터는 스스로에게 의구심이 생겼다.
‘다른 방법으로 모습을 숨기는 건가?’
완벽하게 모습을 차단해도 루터에게 발각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흔적이 전혀 없으니 이상할 노릇이다.
정작 중요한 변절자 수색은 지지부진했으나 치안은 이상하게 성과가 있었다.
대개는 우연이었다.
혹시 몰라 뒤진 곳에서 외부의 대척하는 영지와 밀통하는 첩자를 발견했고, 우연히 붙잡은 행인이 사실 알고 보니 내부 첩자였다는 것이 그랬다.
이렇게 쓸데없는 성과만 나오자 루터는 슬슬 내성 수색을 원했다.
허나 내성 수색은 현재 그의 직급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지금보다 더 실적을 내거나 아니면 신뢰를 쌓는 법이 우선이었다.
허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두각을 드러내면 곧 눈에 띄기 마련이다.
가능하면 조용히 일 처리의 진행을 원했으니 괜히 돋보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심하는 사이 살인 사건이 터졌다.
현장을 찾아가니 온통 피투성이다.
루터는 먼저 도착한 병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패밀리들의 다툼입니다.”
“중간에서 잘 조율하고 있다 그러지 않았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병 중에 패거리의 뒷돈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다.
루터는 용인은 하되, 잘 관리하다 일렀지만 결국 사달이 났다.
경비대원이 고개를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일단은 어떻게 된 건가?”
“치정 싸움입니다. 제이슨 패밀리의 대장인 제이슨의 여자를 빌리온 패밀리가 눈독 들이다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사정을 잘 아는군.”
“그 때문에 갈등의 골이 깊어 알 만한 자는 다 알고 있죠.”
“그래서 결과는?”
“여기 있는 시체 대부분이 제이슨 패밀리입니다. 아마도 빌리온 패밀리가 기습한 게 분명합니다.”
과정을 들어도 내막을 깊숙이 들여다보긴 어려운 법이다.
루터는 사정을 잘 아는 병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저희가 중재하기엔 선을 넘었습니다. 단순한 주먹다짐이 아닌 살인입니다. 빌리온 패밀리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병사의 대답에 다른 병사가 반박했다.
“패밀리 간의 살인 사건은 으레 그렇듯 단순 세력 다툼입니다. 그 과정에서 피를 흘려도 패밀리 간의 내부 다툼이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끊는 게 낫습니다.”
처벌과 옹호로 갈렸다.
병사들이 다퉜다.
“빌리온 패밀리에게 상납 받은 게 제법 되나 보지?”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건 도를 넘었어!”
“언제는 안 넘었나?”
병사들의 다툼에 루터는 혀를 찼다.
보아하니 서로 상납 받은 쪽이 다르다 보니 병사들도 서로 의견이 갈렸다.
결국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했다.
루터는 각자 다른 패밀리에 상납을 받는 두 병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둘 모두 직접 대면하겠다. 살인사건은 용납할 수 없으니 납득이 가는 선에서 정리하겠다.”
“알겠습니다.”
“예.”
일단 살인이 났으니 매듭을 지어야 한다.
그 간 관대했던 루터지만 살인 사건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자 병사들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제이슨 패밀리의 대장이 방문했다.
바짝 마른 얄팍한 중년이었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는 루터와 독대하자마자 하소연을 시작했다.
“놈이 제 여자를 가로채기 위해 부하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당연히 그 나쁜 놈이 납치했습니다. 제발 제 여자를 되찾고 그 망할 자식들을 모조리 죽여주십시오.”
애원하던 제이슨이 목함을 내밀었다.
“제 성의 표십니다.”
루터는 목함을 열었다.
금은보화가 담겨 있자 그가 물었다.
“어디서 이런 돈을 다 모으나?”
제이슨이 어색하게 웃었다.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도박은 불법이야.”
“그렇긴 하죠.”
당황한 그를 면밀히 주시하던 루터가 손짓했다.
“가 보게.”
“빌리온 패밀리를 반드시 처단해 주십시오.”
“알겠네.”
뇌물을 먹인 제이슨이 물러났다.
빌리온 패밀리의 대장이 나타난 건 야심한 시각이었다.
조용히 찾아온 빌리온은 제이슨과 다른 소릴 했다.
“제이슨의 주장은 다 거짓입니다. 그 여자는 원래 제 여자였어요. 그 망할 자식이 강탈한 겁니다.”
빌리온은 원래 여자가 자신의 것이다 주장했다.
이쯤 되자 루터도 호기심이 들었다.
“자네 여자가 그렇게 미인인가?”
“그냥 그럭저럭 입니다.”
루터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빌리온은 화제를 옮겼다.
“제 성의 표십니다.”
제이슨보다 목함이 컸다.
마찬가지로 금은보화였다.
루터는 목함을 받으며 말했다.
“여자를 직접 봐야겠어. 그녀의 의견을 듣고 결정을 내리겠다.”
“그,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제이슨과 자네의 말이 다르니 객관적인 사실을 입증하려면 그녀의 의견이 필요하다. 내친김에 지금 가 보세.”
루터가 일어나자 빌리온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루터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혹여나 여자를 내 앞에 대령하지 않으면 자네의 처지가 곤란하게 될 걸세.”
엄포에 빌리온이 겁에 질렸다.
아무리 패밀리의 위세가 좋아도 기사에 비할 수 없다.
그의 경고에 빌리온은 입 뻥긋 못하고 루터를 안내했다.
소른의 밤은 향락으로 대변될 수 있다.
외성의 동부 구역 전체가 홍등가였다.
붉은 불빛 아래로 교성과 쾌락을 탐닉하는 신음 소리가 가득하다.
그곳에 루터와 빌리온이 모습을 드러냈다.“여기가 자네 구역인가?”
“극히 일부분입니다. 대부분은 위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위라고?”
“그 귀족분들 말입니다.”
루터가 발걸음을 멈췄다.
“귀족이 홍등가를 관리한다고? 대체 누가?”
빌리온이 작게 속삭였다.
“알면 기사님도 큰일 나니 모른 체하셔야 합니다.”
“괜찮으니 말해 보게. 대체 누군가?”
“소른 공작 각하의 귀부인이십니다.”
“뭐?”
어이가 없었다.
공작의 귀부인이 홍등가를 관리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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