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서클 영주님-142화 (142/185)

#142화 흔적

수포에 얼굴이 뒤덮여 얼굴이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포츠 후작의 눈썰미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포츠 후작은 반신반의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비슷하게 생긴 것뿐이다.’

그가 애써 희망을 붙들 때, 루터가 말을 이었다.

“입마개를 풀라.”

봉한 입마개가 열리자 얼굴의 전면이 드러났다.

포츠 후작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얼굴의 생김새가 명확했다.

‘로시와 페비벤이 왜 저기에 있는 거냐. 대체 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임무를 떠난 자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흉측한 몰골로 서 있는 거란 말인가.

그의 의문이 허공에 떠돌 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루터는 물었다.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로시는 제르페스와 처지가 다르지 않았다.

입이 멋대로 나불거렸다.

“포츠 후작가의 레드 드래곤 기사단의 기사단장 로시 아레츠 자작이다.”

신분을 밝히자 좌중이 떠들썩했다.

“맙소사!”

“포츠 후작가의 일원이다!”

“포츠 후작가의 기사가 흑마법사다!”

모두의 경악 속에 시선이 절로 포츠 후작에게 닿았다.

벌떡 일어난 그가 고함을 질렀다.

“나는 그와 일절 상관없소! 전혀 모르는 일이오!”

포츠 후작의 항변에 루터는 재차 로시를 심문했다.

“포츠 후작의 말이 사실이냐?”

로시는 체념하는 얼굴로 포츠 후작을 바라봤다.

“후작 각하. 우리의 원대한 숙원이 여기까진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그와 동시에 로시의 입가에 선혈이 흘렀다.

기사가 다급히 로시의 입을 벌렸다.

혀가 잘렸고 동시에 로시의 목숨이 끊겼다.

“자살했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모두가 입을 벌렸다.

로시의 마지막 유언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숙원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귀족들 사이로 포츠 후작이 사색이 된 채, 목소리를 높였다.

“저놈이 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절대 흑마법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의 구구절절한 항변에도 황제의 시선은 차가웠다.

오스틴이 황제의 뜻을 대신했다.

그가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포츠 후작을 체포하라.”

기사들이 포츠 후작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난 아니야! 전혀 모르는 일이란 말이다!”

포츠 후작은 처절히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로시의 유언이 상황을 종결시켰다.

“그를 구금하라!”

“제발 믿어 주시오! 나는 아무 관련이 없단 말이오!”

끌려가는 포츠 후작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가 사라지자 몇몇 귀족들의 표정이 창백했다.

삼황자파의 귀족들이었다.

포츠 후작은 삼황자의 최측근이다.

그런 그가 흑마법과 관련이 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끌려가는 그의 모습이 삼황자의 몰락과 겹쳐 보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포츠 후작의 억울함을 대변하지 않았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흑마법과 관련 있냐는 추궁을 면치 못한다.

가라앉은 분노는 이내 공포로 뒤바뀌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루터의 장내를 훑었다.

어느 누구 하나 제대로 눈이 맞추는 자가 없었다.

괜히 추궁을 받기라도 하면 포츠 후작 꼴이 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긴장 속에 루터가 입을 열었다.

“일단 포츠 후작이 흑마법사들과 결탁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만 아직 끝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과 결탁한 귀족들이 더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차고 넘치지. 흑마법사들과 손잡은 자들이 또 있을 것이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자칫 이대로 손을 놓게 되면 흑마법사들의 종적을 놓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을 찾아야겠군.”

죽이 맞는 둘의 대화는 끝이 없는 것 같았다.

귀족들은 긴장된 시선으로 숨을 죽였다.

황제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강제 수사권을 늘려야겠네. 언제 어디서든 귀족들의 동태를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을 늘리겠네.”

귀족들의 감시를 제한 없이 확장하겠다는 말에 어느 누구 하나 반발하지 못했다.

흑마법사가 출몰했다.

가벼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준비가 되었다는 듯 유창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제국은 비상시국을 선포하겠다. 모든 귀족들을 감시할 것이며 반발은 허락지 않는다. 또한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거나 수상한 낌새를 보일 경우 가차 없이 개입하겠다. 이는 모두 흑마법사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니 모두의 협조를 바란다.”

귀족들은 군말이 없었다.

태풍이 휘몰아쳐 그들의 혼을 쏙 빼버렸다.

경황이 없으니 앞뒤 잴 여력이 되지 못했다.

새벽에 벌어진 대회의의 결과는 귀족들에게 처참했다.

앞으로 귀족들의 동태 감시가 강화되고, 언제 어디서든 개입할 명분을 내주었다.

오스틴이 총 감시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루터는 흑마법사의 정체를 밝힌 대가로 백작에서 후작 위로 신분이 상승했다.

작위 승급은 전쟁이나 큰 공로를 세운 자에게 수여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백작 신분까지였다.

후작급의 고위 신분은 황제와 귀족들 간의 내부 토론으로 승급 여하를 결정짓는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루터의 직급 상승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파격적이니 반발이 있는 것이 당연했지만, 루터의 공과가 워낙 컸다.

반대는 적었지만 불만은 늘었다.

루터가 두각을 드러낼수록 입지가 좁아지는 고위 귀족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콕스는 재화를 받았고, 명예 귀족 신분을 얻었다.

동시에 오스틴과 연계해 언제든 귀족을 감시할 수 있는 신분증을 제시해 주었다.

흑마법사를 추적한다는 명목으로 언제 어디서든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휘몰아치던 소용돌이가 끝나고 일행 모두 오스틴의 자택에 모였다.

루터는 잠조차 잊고 뜬눈으로 기다린 엘레나 등에게 경과를 알렸다.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새삼 루터의 추진력에 감탄했다.

그는 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뤄냈다.

부하를 건드렸다고 베르뉴 마탑과 포츠 후작가를 몰락시켰다.

동시에 후작 계급으로 승작 했으니, 성과는 대성공이었다.

“일이 무척 공교롭군.”

악령은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해도 결론은 정확히 꿰뚫었다.

“없는 배후의 적을 덤터기 씌웠어. 마치 정말로 그랬던 것처럼 사건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만들었어.”

새삼 루터의 치밀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모든 게 루터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황제를 기습했고, 치료했으며 없던 적을 만들어냈다.

모두가 그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었다.

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악령의 감상평을 들어주는 건 거기까지였다.

루터는 한 명씩, 독대를 시작했다.

시작은 고든이었다.

“엘몬트로 가게 되면 할 일이 많을 거다.”

“무엇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엘몬트에 마법 아카데미가 있어. 그곳 학생들에게 자네의 치료학을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네를 위한 전담 아카데미를 세울 걸세. 이름은 자네가 짓도록 하게.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훗날 자네의 아카데미를 통해 치료사들이 늘어나길 바라네.”

루터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알았고, 당장 고든의 능력을 활용하고자 했다.

고든은 루터의 계획이 썩 마음에 들었다.

“가르치는 건 자신이 없지만 제가 아는 것들을 활용할 자신은 있습니다.”

“그리고 마법과 치료학을 결부시키는 것에 대한 연구를 중점적으로 해 주게. 곧 엘몬트에 마법사들이 늘어나게 될 거야. 마법과 생활이 결합하게 되겠지.”

“생활 마법 말입니까?”

“아직은 먼 얘기지만, 난 그때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네.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거야.”

“절 인정해 주시니 몸돌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역할을 맡은 고든은 한결 편안해졌다.

“전 아무래도 이런 게 맞는 가 봅니다.”

그의 말뜻을 읽은 루터가 진지하게 충고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정치에 일절 관심 갖지 말게. 자네와 어울리지 않는 세계야.”

고든이 웃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와의 대화를 마칠 때 즈음에는 아침이 되었다.

루터는 깨어난 바네사를 대면했다.

바네사는 수면 약에 취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니 엘몬트의 영주가 갑자기 나타나 무척이나 놀랐다.

루터는 그녀와의 독대를 길게 이어가지 못했다.

그는 할 일이 많았고, 바네사는 그중 일부분이었다.

“듣자니 수로 공사를 능숙히 해냈다 들었네.”

“과찬이세요.”

“지금은 겸손할 때가 아니다.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이 있어야 해. 바네사. 자네는 자신의 능력을 믿나?”

루터는 겸손한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다.

부족하다고 말하는 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다.

루터는 진취적인 사람을 선호했고, 그래서 바네사에게 충고했다.

바네사는 엘레나와의 대화를 상기했다.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는데, 지금이 그때였다.

그녀의 태도가 돌변했다.

“저는 뛰어난 행정관이 되고 싶어요. 한 번 본 것은 쉽게 잊지 않고 어떤 분야에서든지 활용할 자신이 있어요.”

“마음에 드는 자세로군. 좋아. 그럼 일을 맡기겠다. 엘몬트에 내가 조성한 수로가 있다. 문제점을 찾고 개선할 점을 알아내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준비해 두어라.”

“네. 맡겨 주세요.”

바네사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이제 말보다 행동할 차례다.

그녀를 물린 루터는 이번에는 악령과 대면했다.

이번 주제는 조금 심각했다.

“곧 낙사노르에 가게 될 거야.”

악령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정말 끔찍한 이야기야.”

“악령. 한 가지 묻자. 너는 장차 뭐가 되길 원하나?”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독특하다. 그래서 이제까지 살아남은 것이지. 해서 묻겠다. 너는 일반적인 낙사노르의 마물처럼 욕망과 파괴를 추구하며 살아갈 테냐? 아니면 지금처럼 조용히 지내겠느냐?”

“솔직히 말하면 자유를 갈망하지. 그게 내 희망이고.”

“그 자세면 충분하다. 낙사노르로 돌아간다면 네 생존을 최대한 보장해주겠다.”

“그건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하는데?”

“이번 낙사노르의 원정은 절대 가볍지 않다.”

루터는 악령이 이번 기회를 호재로 여기길 바랐다.

“너는 낙사노르의 마물을 흡수하며 힘을 키운다. 지금보다 더 강해지려면 부서진 세계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야. 낙사노르에서 힘을 키워라. 널 밀어주겠다.”

“대체 왜 그러는데?”

“용도가 있으니 도와주는 거다.”

“용도? 날 어디에 써먹게?”

“천국이 있으면 지옥도 있는 법이지.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겠다. 하지만 이건 네게 기회일 거다.”

루터의 조언에 악령이 씩 웃었다.

“만약 내가 대장보다 강해지면 어떻게 할 건데?”

루터는 냉소를 띠었다.

“평생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는 공허의 세계에서 소울을 만들었다.

능력은 낙사노르에서도 최상위인 마왕급에 준한다.

악령이 그런 자신을 쫓아오려면 다시 태어나도 어림없는 일이다.

대면을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 그의 앞으로 아네스가 홀연히 나타났다.

그녀의 표정이 차갑다.

“또 일을 벌였구나.”

루터는 그녀의 등장에 당황하지 않았다.

“이번엔 또 무슨 시비를 걸러 왔느냐?”

“명령을 전달하러 왔어.”

“명령?”

“그래. 신께서 징벌을 내릴 존재의 흔적을 찾으셨어. 가서 죽여.”

아네스는 마왕을 신이라 부른다.

루터는 말의 의미를 해석했다.

“변절자들을 찾았나 보군. 그래. 장소는 어디냐?”

“남부의 로스트 왕국에 있는 몰란 영지야. 그곳에 변절자들이 있어.”

“위치만 알려주고 끝이냐? 구체적인 인물이나 장소는 언급이 없나?”

“이것도 찰나에 발견한 거야. 찾는 건 네가 알아서 해.”

“알겠다.”

루터는 아네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전보단 덜 신경질적이었다.

“흑마법사를 강제로 출현시킨 게 마음에 드나 보지?”

아네스는 바스코 제국을 자신의 영역이라 여겼다.

그러니 루터가 활보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제 밤. 제국을 뒤집어 놨는데 별말이 없다.

루터는 이유를 알았다.

흑마법사가 출몰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로 피신하기 마련이다.

이번 흑마법사의 등장이 사람들을 아네스 신전으로 이끌 것이다.

“어떠냐? 내 선물이?”

루터의 물음에 아네스는 냉소를 띤 채, 그대로 사라졌다.

그녀의 싸늘한 반응에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와 맞지 않아.”

좋게 흘러가긴 글렀다.

내키지 않았지만, 언젠가 아네스와 결판을 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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