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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클 영주님-138화 (138/185)

#138화 대가를 치르다

‘루터 님. 도와주세요.’

엘레나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그녀의 위치가 좌표로 전송되었다.

돌연 그가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심각해진 그의 표정에 콕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부하가 위기에 처했다.”

“나도 따라가도 될까?”

“마음대로.”

콕스에게 좌표를 알려준 루터는 즉각 순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콕스가 에고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을 플랑베르라고 부르마. 룬어로 기묘하다는 뜻이지. 네 능력이 독특하니 말이야.”

[감사합니다. 마스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 이제 재미있는 일에 끼어들어 볼까.”

루터가 출발한 이상, 위기 따윈 존재하지 않으리라.

콕스는 루터가 알려준 좌표를 따라 뒤이어 순간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땅 계열 마법이 쏟아졌다.

가볍게 물리친 루터는 피투성이인 엘레나를 내려 봤다.

혼절한 그녀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장내를 둘러봤다.

반파된 여관 내부와 함께 시체들.

그리고 전면에 서 있는 마법사와 후방의 두 사람.

꼼꼼히 살피던 루터는 마법사를 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는 얼굴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잡혀 있는 돌켄은 엘레나와 마찬가지로 혼절해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의아해하는 사이 루터를 발견한 마법사가 외쳤다.

“너는 누구냐!”

그 외침은 또 다른 외침이 대답했다.

“엘몬트 백작이다!”

“기적의 마법사!”

“저자가 기적의 마법사라고?”

놀람과 탄성 사이로 루터는 흙무더기의 바닥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 마법이 땅 계열이었다.

‘역시 맞아. 내 눈이 틀릴 리 없지.’

혹시나 했지만 확실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과거를 회상했다.

호되게 가르치던 마법사들과 성장하는 자신을 질투하고 질시하던 자들.

루터는 자신의 어리석은 스승이었던 노인을 바라봤다.

전면에 선 노인. 제르페스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고집스러워 보였다.

‘하나도 변한 게 없군.’

여전해 보였다.

루터가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 뒤따라 텔레포트로 쫓아 온 콕스가 엉망이 된 주변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이미 한바탕 치른 모양이야.”

둘의 등장에 사방이 긴장감에 차올랐다.

고위 마법인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한 명은 기적의 마법사였고, 다른 한 명은 정체를 알 수 없다.

베르뉴 마탑이 가시를 세웠다.

과거 루터의 스승이었던 제르페스가 눈을 번뜩였다.

“당신이 기적의 마법사로군.”

루터는 감흥 없이 제르페스를 바라봤다.

한때, 스승이었으나 그에게 어떠한 존경심도 없었다.

오히려 원수라면 원수였다.

자신의 재능을 시기한 제르페스는 전장에서 자신을 암습했다.

덕분에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고마움은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제르페스는 자신의 적이었다.

조우하게 된다면 당연히 죽여야 할 상대였다.

과거를 곱씹던 루터는 일단 엘레나를 치료했다.

몸에 박힌 돌의 파편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상처가 아물었다.

지켜보던 몇몇 마법사들이 신음을 흘렸다.

캐스팅 없이 순식간에 치유했다.

기적의 마법사의 치유 능력은 사제들보다 우월하다는 소문이 빈말이 아니었다.

제르페스가 고집스러운 눈으로 일갈했다.

“네 부하들이 베르뉴 마탑 소속의 마법사를 빼앗아 가려 했다! 당연히 찢어 죽여도 용서 못 할 일이지!”

“소속 마법사? 그게 누구냐?”

“흥! 뒤에서 작당을 벌여놓고 이제 와 모른 척을 하는군. 더러운 가식은 집어치워라!”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

루터는 마법사들을 시시각각 살피더니 혼자 달뜬 표정을 짓고 있는 마법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마치 열병에 빠진 것처럼 볼이 상기 되어 있었는데 몰골이 좋지 않았다.

루터가 물었다.

“자네가 그 마법사인가?”

기적의 마법사의 치유 마법을 본 고든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치료 마법입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치유 마법학에 대해 관심이 쏠린 고든이다.

그런데 고든이 질문을 마치자마자 제르페스가 돌연 그의 뺨을 때렸다.

“이 미친놈! 감히 적과 내통하려 해! 이 찢어 죽일 놈!”

바닥에 쓰러진 고든이 놀란 눈으로 제르페스를 쳐다봤다.

제르페스의 광기 어린 시선에 벌벌 떠는 고든을 보며 루터가 한마디 했다.

“장본인의 입에서 직접 사실을 듣겠다. 그러니 한 번만 더 손찌검을 한 면, 그때는 그 휘두르는 팔이 몸통에서 분리되는 광경을 보게 될 거야.”

루터의 조용한 경고에 제르페스가 흠칫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살벌하게 부딪혔다.

관망하던 콕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거슬리는 것들은 다 치우지 그러나?”

루터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는 이 사회의 구성원이다. 내키는 대로 하면 반발만 일으켜. 적당히 타협할 줄 알아야 해.”

“그래서. 저들을 살려 줄 텐가?”

“전후 사정을 듣고 결정할 생각이다.”

루터는 제르페스의 흥분한 언동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마탑은 폐쇄적이고, 내부의 배신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제르페스의 언사를 보니 저 뺨 맞은 마법사가 배신을 저지른 모양이다.

그러니 일단 내막을 파헤쳐야 했다.

루터가 고든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예, 예. 제가 엘몬트로 간다하니, 베르뉴 마탑에서 절 배신자로 규정지었습니다.”

고든이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공식적으로 베르뉴 마탑에 추방된 상태입니다. 그런 제가 다른 마탑도 아닌, 제 능력을 인정한 엘몬트로 간다는 걸 문제 삼고 있어요. 억울합니다.”

고든의 외침에 제르페스의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이 노옴! 어디서 거짓을 호도하느냐! 너는 베르뉴 마탑의 기밀 정보를 갖고 있다. 그걸 전부 토해내고 마탑에 평생 공헌해도 모자란데, 감히 거짓말을 지껄여!”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저는 마탑에 추방된 마법사가 아닙니까. 제가 어째서 추방당한 마탑에 배신자로 몰려야 하는 겁니까!”

“너는 추방되지 않았다. 유예기간이 있었을 뿐이야.”

“제르페스님이 직접 추방이라고 제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왜 이제 와서 말을 돌리시는 겁니까.”

제르페스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한 번 소속된 마탑은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네 행위는 배신이야!”

말이 통하지 않는다.

루터는 제르페스의 모순을 꼬집었다.

“찬밥 신세 취급하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니 구실을 붙여 잡아 두려는 거로군.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 데? 저 마법사. 자네 이름이 뭔가?”

“고든입니다.”

“그래. 고든. 그대는 베르뉴 마탑이 놓쳐서는 안 될 정도로 내부 기밀을 알고 있나?”

“결단코 전혀 없습니다. 저는 20년 동안 베르뉴 마탑에 출입 허가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추방당한 뒤로는 마탑과 멀어지려 바스코 제국까지 왔습니다. 그런 제가 베르뉴 마탑에 무슨 중대한 정보를 알고 있겠습니까.”

베르뉴 마탑의 주 활동 영역은 남부였다.

그런데 북부의 바스코 제국까지 거슬러 올라와 버렸던 고든에게 배신자 취급을 하고 있다.

루터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베르뉴 마탑이 언제부터 제국에 있었지?”

“제국의 초빙을 받고 활동을 개시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인 듯했다.

루터는 그제야 제르페스의 행동을 깨달았다.

“이제야 네 의도를 알겠다. 너희들은 나 때문에 고든을 배신자 취급하려는 게 아니라, 제국에서의 활동을 위해 고든을 전면에 내세우려 했구나? 그런데 이용하려 보니 마침 내 영지로 가려 하는 걸 깨닫고 구실을 붙여 묶어 두려는 거였어.”

루터는 마탑의 속성을 잘 알았다.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라면 지푸라기라도 제 것이라 주장한다.

고든이라는 마법사에 대해 자세히는 몰랐지만, 능력 있는 자는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의 까다로울 수 있는 조건에 그가 포착될 리 없다.

루터가 물었다.

“자네는 어느 분야에 자신이 있나?”

고든은 그 질문에 어리둥절했다.

“절 찾아온 분들의 말에 따르면 절 알고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과정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 나는 자넬 모르네.”

고든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그렇군요.”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제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치료학에 조금 재주가 있습니다. 찾아온 분들도 그 부분을 언급했고.”

정말 부끄러운지, 고든이 얼굴을 붉혔다.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뛰어난 치료사는 이목을 집중하기 좋은 조건이지. 제르페스는 고든의 치료학을 탐냈구나. 그걸 이용하려 했고. 게다가 내 부하들인 걸 알고 공격한 것을 보면 일부러 나와 대립하려 했어. 솔직히 말해 보아라. 네 의도대로라면 이 일 이후로 내가 너희 마탑의 치료 마법사를 탐냈다고 소문을 퍼트리려 했겠지? 내 말이 맞나?”

정확히 의도를 간파하자 흠칫한 제르페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디서 밑도 끝도 없는 개 소리를 늘어놓느냐!”

“아니야. 네 놈들이라면, 아니. 베르뉴 마탑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까.”

루터가 그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짚자 콕스가 빙그레 웃었다.

“이거 전부 발가벗긴 모양이야. 역시 인간들은 남다르군. 특히나 자네가 말한 그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설명이 와 닿아. 의도가 생각보다 깊숙한걸?”

“저게 마탑의 본질이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모든 방법을 동원하거든. 아마도 나를 이용하여 세력을 끌어 올리는 자들이 수두룩할 거다. 베르뉴 마탑은 그 의도를 개시하다 내게 발각된 것이고.”

고든과 베르뉴 마탑.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까지의 사정을 모조리 꿰뚫은 루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이쪽에서 대응을 해줘야겠지.”

제르페스가 짜증을 담아 외쳤다.

“언제까지 개소리를 늘어놓을 참이냐!”

“지금부터 내가 무엇을 할지 이야기해주마.”

저들이 계략을 꾸몄다면 자신도 맞대응하면 된다.

루터가 설명을 시작했다.

“곧 소문이 퍼질 거다. 베르뉴 마탑이 흑마법에 손을 데다 기적의 마법사에게 들통났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제르페스를 비롯한 베르뉴 마법사 모두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비웃음을 띠었다.

“그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누가 믿겠느냐?”

“믿게 만들어야지. 그리고 믿을 거다. 기적의 마법사의 명성은 제법 가치가 있거든.”

“그래서? 그 기적의 마법사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누가 믿어 줄 건가?”

“제르페스. 소문을 무시하지 마라. 처음엔 미미해도 눈 깜짝할 새에 걷잡을 수 없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게 소문이다. 약간의 신빙성에 대부분의 과장을 심어주어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소문의 무서움을 깨닫게 해주마.”

루터의 경고는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계획을 세우면 즉각 실행한다.

루터는 주변에 에네르 소울을 펼쳤다.

그 사실을 마법사들이 알 리 없다.

루터는 베르뉴 마법사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실현했다.

돌연 눈을 마주친 제르페스의 몸이 통나무처럼 빳빳해졌다.

“뭐, 뭐야!”

당황한 그를 비롯해 베르뉴 마법사 모두 뜬 눈인 채로 몸이 굳어 버렸다.

“어느새 석화 마법을 펼친 것이냐!”

“차라리 석화 마법이면 다행이라 생각 할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 내 꼭두각시가 되었어. 의지와 다르게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될 것이며, 행동 또한 내 의지에 달려 있다. 차라리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었으면 여기까지 오게 되지 않았을 거야.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해라.”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제르페스의 외침은 거기까지였다.

루터의 말대로 갑자기 누군가 붕대로 입을 막은 것처럼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당황하는 그들을 뒤로한 루터는 엘레나와 돌켄을 깨우고 고든을 치료했다.

부기가 가라앉자 고든이 감사를 표했다.

“놀라운 치료 능력입니다. 계속 옆에서 지켜보고 싶을 정도로요.”

“자네의 치료학에 대한 관심은 알겠네만, 그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지. 지금은 할 일이 있거든.”

루터는 베르뉴 마법사들을 가리켰다.

“꼭 혼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한 고든조차 베르뉴 마탑의 못 된 수작에 분개한 듯 씩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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