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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클 영주님-135화 (135/185)

#135화 등용3

바네사의 남동생. 에릭은 바네사의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결국 독대보단 남매와 대화를 청했다.

에릭은 바네사의 어린 호위였다.

허튼짓을 할 경우 가만있지 않겠다는 듯 엘레나를 향해 눈에 힘을 주었다.

엘레나는 빙그레 웃어 보이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허름한 외부는 내부라고 다를 것 없었다.

낡은 탁자와 의자는 간신히 앉을 수준이었고, 내부 구석이나 집기 등은 낡고 허름했다.

엘레나는 바네사 가문의 세간살이를 보더니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동안 많이 어려우셨나 봐요.”

바네사가 힘없이 말했다.

“보다시피 맞아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버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저희 남매밖에 남지 않았어요.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여기저기 일을 알아보려 했지만, 알다시피 가진 것 없이 재주 없는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요.”

“밖의 도리스라는 상인은 어떻게 된 거죠?”

“아버님이 그에게 빚을 지고 있었어요. 다 갚지 못해 돌아가셨고 그는 빚 대신 저와의 혼약을 요구하고 있었고요.”

“그렇군요.”

사정이 눈에 보였다.

엘레나는 힘없는 바네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기운이 없어 보여요. 어디 편찮으신가요?”

“며칠 전에 몸살을 앓은 여파가 아직까지 이어지나 봐요.”

“그래요?”

수척한 얼굴을 보니 단순한 몸살 기운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바네사의 사정을 파악한 엘레나는 이제 자신의 용건을 드러냈다.

“제가 왜 바네사 양을 찾아왔는지 아나요?”

“아니요. 전혀 모르겠어요. 혹시 기적의 마법사께서 저희 아버님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렇지 않아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바네사 양에게 관심이 있어요.”

바네사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눈치다.

“대체 절 왜 찾는지 알아도 될까요?”“3년 전에 제국 수도의 상하수도 공사에 관여한 걸로 알고 있어요. 맞나요?”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아버님을 도와 드렸던 기억이 있어요.”

“원래 아버님의 일이었나요?”

“네. 아버님은 황실의 행정관이셨어요. 상하수도의 설계를 맡으셨는데, 일을 어려워하셔서 잠깐 도와드렸어요.”

“그 과정을 자세히 듣고 싶네요.”

엘레나의 관심에 바네사가 의아했다.

“그게 왜 궁금하신 거죠?”

“어쩌면 그 일이 지금의 바네사의 양의 인생에 전환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흠칫한 바네사는 고민하다 설명을 시작했다.

“수도 근처에 있는 베이츠 수원에 배수관을 연결해 물을 길고 하수도는 상수도에서 유입되는 물을 통해 외부로 반출되게 했어요. 간단한 방법이죠.”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따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수도는 하수 시설이 부족해 도처에 똥, 오줌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상수도를 비롯하여 하수 시설 처리까지 완벽하게 해결했다.

이는 보통 능력이 아니다.

“간단해 보이지가 않는데요? 따로 독학이라도 하셨나요?”

“네. 공부하는 걸 좋아해서 책을 자주 읽었어요.”

“바네사 양은 아버님을 따라 행정관이 될 생각은 없었나요?”

바네사가 빙그레 웃었다.

“여자는 행정관이 될 수 없답니다.”

“안타깝네요. 눈앞에 오랫동안 똥 냄새나는 제국의 골칫거리를 해결한 장본인이 여자라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게요.”

“제가 거든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해요. 전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요.”

“겸손할 것 없어요. 정보 길드에서 굳이 바네사 양의 이름을 올렸다는 건 그만큼 능력 있는 재원이라는 뜻이죠.”

정보 길드가 언급되자 바네사가 어리둥절했다.

“정보 길드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엘몬트는 능력 있고 수완 좋은 인재가 턱없이 부족해요. 그래서 수도에서 가진 능력에 비해 홀대받는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어요. 바네사 양. 당신도 그중 한 명이에요.”

“제가요?”

눈을 동그랗게 뜬 바네사를 향해 엘레나가 정식으로 요청했다.

“바네사 양. 당신을 엘몬트로 모셔가고 싶어요. 엘몬트를 위해 유능한 행정관이 되어 주길 바랍니다.”

휘둥그레 뜬 바네사는 얼떨떨한 눈치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당황스럽네요.”

“원래 행운은 갑자기 뚝 떨어진다고 하잖아요. 제가 볼 땐, 바네사 양의 능력을 원 없이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을 믿으세요. 당신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지금 수도는 여전히 길바닥에 똥들이 널브러졌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주저할 때가 아닐 텐데요.”

눈을 게슴츠레 뜬 그녀가 넌지시 물었다.

“설마 저 느끼한 메기 같이 생긴 남자와 혼약을 맺을 생각은 아니겠죠?”

바네사가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조용히 경청하겠다던 에릭이 입을 열었다.

“저기. 우리 누나가 그렇게 능력 있어?”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찾아오지 않았을걸?”

“만약에 엘몬트에 가면 도리스 같은 그 나쁜 놈들을 떨어트릴 수 있을까?”

“도리스는 절대로 엘몬트를 건드릴 수 없어. 그곳의 영주가 누군지 아니?”

“알아. 기적의 마법사. 황제를 치료했다면서.”

“황제를 치료한 기적의 마법사가 저 밖에 있는 도르시를 무서워할까?”

알기 쉽게 힘의 차이를 설명하는 엘레나를 향해 힘주어 고개를 끄덕인 에릭이 바네사를 쳐다봤다.

“누나. 이건 정말 좋은 기회야. 반드시 잡아야 해.”

“하지만 우리에겐 빚이 있어. 그걸 갚기 전까진 쉽지 않을 거야.”

“그건 걱정 마세요. 저희 영주님은 돈이 많아요.”

바네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다면 설마 빚을 갚아 주시게요?”

“물론이죠. 그깟 돈 때문에 인재를 놓친다면 영주님이 크게 화를 내실 거예요.”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에 빚도 갚아 주겠다고 장담한다.

바네사는 에릭의 간절한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도움이 된다면 최선을 다할게요.”

엘레나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해요. 엘몬트는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거든요. 많은 이들이 영주님의 허락을 얻기 위해 매일 같이 엘몬트의 성벽을 간절히 바라보죠. 그런데 당신은 오히려 초대를 받았군요.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이란 걸 인지하고 자신감을 갖길 바라요.”

“네. 고마워요.”

맞잡은 바네사가 엘레나를 따라 웃음을 띠었다.

안절부절 한 모습으로 초조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는 도리스가 기어이 참지 못하고 석상처럼 선 돌켄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얘길 하는 겁니까? 당신들의 용건은 대체 뭐고?”

돌켄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것 같다.

숫제 없는 사람처럼 대하자 도리스는 잔뜩 뿔이 났다.

그는 돌켄의 기세에 눌려 말은 못했지만 속으로 잔뜩 앙금을 품었다.

‘두고 보자. 여긴 니들이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엘몬트가 아니란 걸 보여주마.’

이미 머릿속에는 그가 평소 공들여 뇌물을 바쳐 온 귀족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두고 보자며 이를 가는 동안 드디어 닫힌 문이 열렸다.

도리스는 상인답게 나타난 세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즐거워 보이는데, 어쩐지 그는 그 사실이 석연찮았다.

순간 에릭과 눈이 마주친 도리스가 흠칫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향해 적대적이던 어린 꼬맹이가 엘몬트의 사람과 대화를 하고 나온 뒤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저게 무슨 의미일까.

혼자 속으로 끙끙댈 일이 아니다.

도리스가 물었다.

“바네사. 그들과 무슨 얘길 나눴소?”

바네사는 도리스를 쳐다봤다.

순간 그녀의 미모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띠는 도리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여기 계신 분들이 제 빚을 갚아주신다고 했어요.”

“뭐, 뭐? 뭐라고? 방금 뭐라 했소?”

에릭이 당당하게 말했다.

“이제 너는 끝이라는 거야! 이제 우리 누나를 건드리지 못할걸!”

도리스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닿았다.

그가 외치듯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무슨 용무기에 내 아내의 빚을 갚아준다는 거냐?”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바네사를 자신의 아내로 여기고 있었다.

엘레나가 차갑게 말했다.

“당신이 알 필요 없어요. 일단 채무 관계부터 정리하죠. 듣자니 450골드의 빚을 졌다고 했죠? 내일 당신의 상회로 돈을 보내드리죠.”

“아, 아니. 그게 무슨.”

바네사가 돌연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당신과의 혼약은 취소하겠어요.”

“바, 바네사! 이러지 마시오. 내가 어려울 때, 당신을 얼마나 도와줬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 오히려 내가 일을 하지 못하게 뒤에서 방해한 걸 알아요. 이제 당신과는 여기서 마지막이에요.”

“바, 바네사! 그건 오해요! 잠깐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긴히 얘기를 나눕시다.”

“싫어요.”

전과 달리 바네사의 의사 표현이 적극적이다.

그녀가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에릭이 크게 외쳤다.

“이제 다시는 우리 누나한테 엉겨 붙지 마!”

부글거리던 도리스가 에릭을 향해 사납게 외쳤다.

“입 닥쳐라! 꼬맹이! 그 주둥이를 찢어버리기 전에!”

살벌한 외침에 에릭이 움찔했다.

도리스가 놀란 바네사에게 삿대질을 했다.

“내가 이대로 물러날 줄 아느냐! 두고 보아라! 내 반드시 이 일을 되돌려 주겠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고함을 지른 도리스가 몸을 돌렸다.

바네사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엘레나가 그런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세요. 도리스가 아무리 위협을 해도 엘몬트를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그녀는 현 상황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리스는 대륙의 부가 쏠린 제국의 수도에서도 중견 급의 상단이었고 성장하기까지의 무수한 많은 인맥을 쌓아 놓았다.

도리스는 즉각 자신의 인맥을 찾아갔다.

많고 많은 인맥 중에 가장 권세가 높은 포츠 후작가가 시작이었다.

그는 포츠 후작가의 재정관을 찾아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엘몬트에서 온 불한당이 제 아내를 뺏어 가게 생겼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도리스의 간절함과 달리 무료한 표정으로 번거로운 티를 내던 재정관이 엘몬트란 말에 눈을 부릅떴다.

“방금 뭐라고 했나? 엘몬트라고?”

“예? 아, 예.”

“엘몬트 쪽 사람이 수도에 있단 말인가?”

그의 거듭된 질문에 도리스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놈들이 제 아내를 강탈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야? 자네의 아내를 강탈했다고? 그들이 왜?”

“저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안 하고 홀연히 떠나버렸습니다.”

재정관의 얼굴에 짜증이 떠올랐다.

경황없는 도리스의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재정관이 성을 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해를 못하겠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처음부터 자세하게 제대로 설명해라.”

“예, 예.”

도리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재정관은 기가 막혔다.

“듣자니 빚 대신 혼약을 맺는 건데, 어딜 봐서 그녀가 너의 아내더냐?”

“제 아내 맞습니다.”

도리스는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재정관이 채근했다.

“바네사라는 여자에게 무슨 재주라도 있더냐?”

“저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놈들이 대체 제 아내에게 무슨 사정이 있길래 빚도 갚아주고 데려가려는지 말입니다.”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나?”

“예. 사람을 붙여 놨습니다. 그런데 조심하셔야 합니다. 남녀 일행이었는데, 제 호위 말로는 남자가 익스퍼트 검사랍니다.”

“그렇단 말이지?”

재정관이 리드미컬하게 책상을 두들겼다.

“이런 시기에 엘몬트 쪽 사람들이 나타나 웬 여자를 데려간단 말이지? 대체 무슨 일일까?”

수도에서 엘몬트 지방은 뜨거운 감자였다.

화젯거리였고 관심 대상이다.

그런 엘몬트가 움직였다.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아무래도 보고가 필요하다.

재정관이 말했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게. 잠시 다녀올 데가 있네. 아니지. 자네도 동행하게. 아무래도 인상착의나 상황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으니까.”

“예? 어디로 갑니까?”

“어디긴. 후작 각하가 계신 집무실이지.”

재정관은 어리둥절해 하는 도리스를 끌고 포츠 후작을 찾아갔다.

#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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