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각자의 길
마왕이 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초조하게 듣던 루터가 얼굴을 찌푸렸다.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루터의 목소리에 실망감이 묻어 나왔다.
“벗어날 수 없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이 세상에 당신을 옭아맬 수 있는 게 있다는 말입니까?”
“나는 강제성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숙명을 말하는 거다.”
“우리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습니까? 에네르 소울을 보고 알았습니다. 우리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야 할 팔잡니다. 초월의 운명은 신도 간섭할 수 없습니다.”
루터는 마왕의 주장에 조목조목 반박했다.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루터에게 마왕이 버럭 화를 냈다.
“이 녀석아! 그놈의 의심병 좀 버려라. 진짜라니까.”
“대체 그 숙명이라는 게 뭐길래, 당신 같은 초월자가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까?”
“우리는 어둠에 의해 태어났어. 그러니까 쉽게 말해 한 뿌리로 이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딜 가도 어둠이 쫓아오기 마련이다. 성가신 어둠을 거둬내느니 차라리 이곳에 남아 무절제한 어둠의 힘을 봉합해 버리는 게 낫다는 얘기다.”
루터는 곰곰이 생각하다 예시를 들었다.
“예컨대, 당신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면 낙사노르의 마물이 찾아온다는 얘깁니까?”
“맞아. 너도 보았다시피 그들은 시공간을 거스를 정도로 강력하다. 또한 무질서하고 파괴적이지. 그런 놈들이 냄새를 맡고 추적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한 가지 목적성을 띠고 있다.”
“그게 뭡니까?”
“뭐긴 뭐야. 드래곤들과 똑같지. 죽여 흡수하는 것이지.”
루터는 인상을 그렸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마왕이 씩 웃었다.
“그래서 숙명이라고 한 거야. 강한 힘은 질시와 견제를 받거든. 특히나 우리 같은 경우에는 아예 잡아먹히지.”
루터는 혀를 내둘렀다.
“지독하군요. 낙사노르 태생은 끝없는 투쟁을 해야 하는 겁니까?”
“어쩔 수 없어.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리고 나는 숙명을 받아들일뿐더러 아예 끝장낼 생각이다. 그래서 낙사노르를 주시하고 있다. 저 세상은 언젠가 끝장내야 할 곳이니까.”
“그래서 당신이 다른 세계로 건너가지 않은 것이로군요. 어차피 마주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래. 기껏 가꿔놓은 화원을 엄한 것들이 뜬금없이 나타나 어지럽히는 꼴이지.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기어이 쫓아와. 낙사노르의 마물이 기어이 이 세계에 오는 이유가 뭔지 아느냐? 바로 나를 노리기 위함이다. 강자의 힘을 빼앗는 것만큼 강해지는 지름길이 없거든.”
“혼돈의 마왕도 마찬가집니까?”
“놈들은 더 하지. 그리고 이제 내 힘을 눈치챈 이상 부득불 이 세계에 오기 위해 안간힘을 쓸 거다. 낙사노르의 마물들은 제정신이 아니라 자신보다 강자가 있으면 도망가는 게 아니라 힘을 빼앗으려고 미친 듯이 들이대거든.”
루터는 생각보다 이 일의 파장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큰 걱정이 들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 급의 힘을 지니지 않은 이상 낙사노르의 마왕급을 불러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혼돈의 마왕은 다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흐흐. 놈들의 말을 믿느냐. 이가 없으면 잇몸이다. 분명히 방법을 찾을 거다.”
루터는 마왕의 확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드래곤을 조사하던 와중에 인간 세상에서 온 자가 그들에게 낙사노르의 마물을 소환하는 마법진을 알려주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당신의 부하들이겠죠.”
처음엔 마왕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오해다.
마왕은 낙사노르의 마물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루터가 자신이 얻은 정보를 알리자 마왕이 심드렁히 말했다.
“그래. 그거 봐라.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다니까. 하지만 이제 앓던 이 같았던 드래곤들을 처리했으니 당분간은 조용해지겠지. 문제는 내부야.”
“아무래도 당신의 부하들이 문제를 일으킬 것 같군요. 빨리 정리해야 합니다.”
“그 얘길 바로 돌려주지. 드래곤을 정리했으면 서둘러 인간 영역으로 돌아와라. 놈들을 처리해야 한다.”
“먼저도 말했지만 숨어 버려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신이 건넨 지도에도 표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마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숨어 있을 거다. 번거롭더라도 발로 뛰며 수고를 해줘야겠어. 낙사노르를 정리하려면 내부 정리가 우선이다. 내버려 두면 썩다 못해 곪아 터질 거야.”
“조만간 깔끔히 처리해야죠.”
루터의 대답에 흡족하게 보던 마왕이 기지개를 켰다.
“이제 당분간 내 역할은 끝났군.”
“앞으로 뭘 할 겁니까?”
“소울의 힘을 보았지? 꾸준히 노력해서 확장에 힘을 써야지.”
“당신의 소울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칩니까?”
“흐흐. 그건 비밀이다. 하지만 꽤 넓다.”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알았다.”
떠나기 전, 마왕이 루터를 쳐다봤다.
“이제 넌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냐?”
“무슨 뜻입니까?”
“액면 그대로다. 너는 이제 에네르 소울을 다룬다. 그렇다는 말은 네 능력이 낙사노르의 마왕 정도의 수준은 된다는 뜻이다. 이제 이 세계를 비롯하여 낙사노르에서도 네게 대적할 상대는 없을 거다.”
현재 루터의 수준에 대해서 평가를 내린 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초월의 영역은 곧 절대의 경지다. 굳이 세계를 만들 필요가 있겠느냐?”
루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좀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
“여지를 남기겠다는 거로군. 뭐, 이것저것 해보는 것도 좋겠지. 원래 직접 경험을 하지 않는 이상 모르는 법이거든.”
모호한 말을 남긴 마왕이 떠났다.
루터는 그가 하는 말을 곱씹었다.
‘대체 무슨 소리지.’
마왕은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한 번에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을 하나라도 흘려들어선 안 된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자신의 계획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인데 이유를 모르겠다.
루터는 생각하길 포기했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마왕의 말대로 자신은 이제 초월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니 미래를 걱정하기에는 쓸모없는 시간 낭비였다.
혹시 몰라 혼돈의 마왕이 남긴 어둠의 씨앗을 수색했다.
철두철미하게 수색을 진행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루터는 에고를 만들었다.
개미처럼 작았는데, 자체 은신 능력에 탐지 기능이 장착되어 있었다.
“어둠의 힘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내게 곧장 알려라.”
찌르르르!
에고 생명체가 울음소리와 함께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렇게라도 해야 안심이 되었다.
그가 보기에 현재 잠재된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혼돈의 마왕이 뿌린 어둠의 씨앗이었다.
마왕이 굳이 계약을 통해 들어오지 않아도 되니 당연히 억제를 해야 한다.
태초의 섬뿐만 아니라 드래곤 영역 전체에도 추적 에고를 뿌렸다.
그렇게 대비를 마친 루터는 키아라에게 돌아갔다.
키아라와 정령왕들은 여전히 그린 드래곤 알렉시아의 영역에 남아 있었다.
블루 드래곤 제레이라의 영역이 일종의 전초 기지였다면, 알렉시아의 영역은 이종족들의 삶을 복구하는 터전이었다.
버섯 숲을 제거하고 다양한 묘목을 심으며 복구가 시작되었다.
동식물이 생겨나니 모두가 안정을 찾았다.
엘프는 정령왕의 도움에 힘입어 공동체를 형성했고, 수인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흥미로운 점은 수인족이 키아라를 상당히 따른다는 점이다.
다시 찾은 키아라는 수인족과 함께 마을을 건설하고 있었다.
루터는 수인족이 키아라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녀가 칭찬하면 꼬리를 흔들고, 쓰다듬으면 좋아 죽는다.
‘대체 키아라의 어느 점을 보고 따르는 걸까.’
그리고 왜 자신은 경원시하는 걸까.
루터는 그 입증을 확인코자 수인족의 앞에 섰다.
늑대 귀의 성인 수인족이 루터를 보더니 경련이 이는 것처럼 벌벌 떨었다.
“깨개갱!”
건들지도 않았는데, 아픈 소릴 내며 후다닥 달아난다.
키아라가 다가와 훈계를 늘어놓았다.
“괴롭히면 안 돼.”
루터는 인상을 그렸다.
“아무것도 안 했다.”
“인상 쓰고 있었잖아.”
“인상 안 썼다”
“겁주지 마.”
키아라는 수인족 돌봄에 푹 빠져 있었다.
루터는 혀를 내둘렀다.
“이래가지고서는 말 한 번 제대로 못 붙이겠다. 왜 나를 겁내는 거지?”
“수인족은 본능적인 감각이 뛰어나. 그래서 루터를 무서워하는 거야.”
“기세를 완전히 갈무리했는데도 그걸 감지하나?”
“그런 것 같아. 그렇지만 루터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본능적으로 위압감을 느끼게 돼.”
루터는 키아라의 설명을 한 귀로 흘렸다.
그가 찾아온 용건은 수인족의 습성이나 알자고 온 게 아니었다.
“인간 영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벌써? 드래곤은?”
“모두 정리했다. 이제 이곳은 텅 비었다.”
“빠르구나.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드래곤을 사냥하는 것보다 수인족을 돕겠다고 선택했으니 어쩔 수야 있나.”
“사실 이게 더 가치가 있는 것 같아.”
루터는 고개를 끄덕인 뒤, 손짓했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작별을 알리고 가자.”
“아, 그게.”
키아라가 주저했다.
루터는 의아했다.
“왜 그래?”
“사실은, 나. 수인족의 족장이 되었어.”
“뭐? 족장?”
반문한 루터가 기가 찬 눈으로 물었다.
“어쩌다가 족장이 된 거냐?”
“내가 없으면 많이 힘들어해. 저길 봐.”
키아라가 마을을 가리켰다.
목재나 석벽 뒤에 숨은 수인족들이 귀를 세우고 털을 빳빳하게 하며 경계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나 키아라가 다칠까 걱정하는 모습이 가득하다.
“수인족은 우두머리를 통해 사회를 건설하고 유지해. 만약 우두머리가 없으면 혼란스러워해. 그래서 당분간은 이곳을 떠나기가 힘들 것 같아.”
곤란하다는 키아라의 말에 루터가 지적했다.
“너무 정을 주었어. 그래서 널 따르는 것 같다.”
“응. 그런 것 같아.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나는 당분간 수인족을 돌보고 싶어.”
의외의 대답이었다.
루터가 물었다.
“정말 그걸 원하는 거냐?”
“응. 생각해보니 나는 루터의 인정을 받고 싶어 검사의 길을 걸었어. 물론 지금도 그 길을 포기하진 않았지만 둘러보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다는 걸 알았어. 지금의 수인족을 돌보는 것처럼 말야.”
키아라의 솔직한 심정에 루터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녀가 루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래?”
“키아라. 솔직히 말하면 감동했다.”
루터는 흐뭇한 표정을 띠었다.
“누군가를 보살필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 성숙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나는 수인족처럼 네가 스스로 원하는 걸 찾은 것 같아 무척 기쁘다.”
이제까지의 키아라는 자신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루터는 그런 키아라를 염려했다.
인생은 자고로 스스로 개척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키아라의 인생은 자신을 주체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인족을 위해서 스스로를 헌신하려 한다.
키아락 물었다.
“그럼 나 여기 있어도 돼?”
“키아라. 내가 언제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말린 적이 있더냐. 등 떠밀어도 요지부동인 네가 드디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는구나.”
자식이 날개를 펴고 세상에 나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루터는 자식같이 생각한 키아라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키아라. 원하는 삶을 살아라. 그리고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다오. 만사 제치고 도와주마.”
“응. 고마워. 하지만 지금은 우리들만으로도 충분해.”
빙그레 웃은 키아라가 이내 팔짱을 끼며 당당히 말했다.
“그렇다고 영영 떨어진다는 생각은 하지 마. 다시 돌아갈 테니까.”
“네 자리는 언제든지 남겨 두마. 키아라. 그때까지는 행복한 삶을 살아라.”
“응. 그런데 루터는 앞으로 뭐할 거야?”
드래곤도 모두 끝장냈으니 이제는 좀 한가하지 않을까 싶었다.
키아라가 물었다.
“루터도 여기에 남지 않을래?”
“글쎄다.”
그는 다시 키아라의 등 뒤를 보다 실소를 흘렸다.
신경이 곤두선 수인족들에게 남겠다고 하면 경기를 일으킬 것이다.
‘괜히 분란만 일으키겠지.’
맞지 않으면 헤어져야 한다.
그게 맞았고, 그래서 남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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