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혼돈의 마왕
루터는 꿈틀대는 애벌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외부의 자극에 예민한지, 불에 닿은 것처럼 온몸을 배배 꼬았다.
고통스러워 보였는데 그럼에도 드래곤 로드의 뇌에 꽂은 대롱 같은 입은 빼지 않았다.
‘적어도 공격성은 없어 보이네.’
목적은 분명해 보였다.
뇌를 통해 무언가를 하는 모양새였다.
그게 뭘까.
루터는 일부러 애벌레를 강제로 떼었다. 몸을 잡아당기고 입 부분을 잘라 내었다.
꿈틀거리던 애벌레가 긴 입이 잘리자 시든 잎처럼 색이 변하고 쪼그라들었다.
결국에는 완전히 녹아 없어졌다.
애벌레를 하나 없앴는데, 변화가 일어났다.
루터는 다른 애벌레를 뜯으려다 멈칫했다.
‘드래곤 로드의 마나가 안정되어 간다.’
성난 해일처럼 사방을 휘몰아치던 거친 마나가 안정을 찾고 있었다.
루터의 눈빛이 이채를 발했다.
‘이거 봐라?’
애벌레를 죽이니 드래곤 로드의 마나가 안정을 되찾았다.
그렇다는 얘기는 애벌레가 로드의 광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다.
“설마 했더니, 정말인가? 저 애벌레들이 드래곤을 미치게 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무척 흥미로웠다.
“다른 존재도 아니고 드래곤 로드를 미치게 만들었다면 보통내기가 아니겠군. 아니, 이 녀석을 제공한 원흉이 그렇다고 봐야겠어.”
루터는 이 녀석들이 자연적인 기생충 같은 녀석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드래곤 로드의 머리에 심어 놓은 게 분명했다.
“흥미롭다. 과연 누구의 짓일까?”
루터는 중얼거리면서 다른 애벌레에게 접근했다.
그의 애벌레 제거 작업이 시작되었다.
하나, 둘씩 애벌레들이 사라질 때마다 폭주하는 마나가 가라앉는다.
애벌레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자 외부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크으으윽!”
성난 드래곤 로드가 갑자기 주저앉더니 머리를 감쌌다.
파괴의 갈망에 젖어있던 타성이 사라진 자리로 이성이 되돌아온다.
로드를 압박하던 드래곤들도 전투가 잠시 끊기자 헐떡이며 숨 고르기에 나섰다.
아무리 마나로 이루어진 육체라도 극한의 전투는 극심한 체력 소모를 요구한다.
지친 드래곤들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드래곤 로드를 주시했다.
드래곤 로드가 부르짖었다.
“머리가! 머리가!”
드래곤들이 흠칫했다.
로드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괴로워 보인다.
바이칼이 드래곤 로드를 꼼꼼히 살피다 흠칫했다.
피에 젖은 시뻘건 동공에 황금빛이 차올랐다.
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로, 로드! 정신을 차린 겁니까?”
“크윽! 너, 너는 누구냐?”
“블루 드래곤 바이칼이오. 로드! 날 알아보겠습니까?”
바이칼이 혹시 하며 물었다.
밀려오는 두통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드래곤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억한다. 바이칼.”
“맙소사! 드래곤 로드가 정신을 차렸어!”
바이칼의 외침에 드래곤들이 멈칫거렸다. 그동안 드래곤 로드는 광기에 젖어 대화는커녕 모든 존재를 잡아먹기 급급했다.
이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까.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듯 드래곤 로드가 힘주어 말했다.
“오랫동안 어둠에 갇혀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기억 못하는 드래곤 로드의 모습에서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드래곤 로드가 정신을 차렸다.
바이칼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드래곤 로드. 당신은 그동안 우리에게 포식을 하고 있었소. 기억하시오?”
“포식? 내가 포식을 했다고? 설마. 설마!”
당혹감이 스친 눈동자에 의혹이 떠오르더니 길게 탄식했다.
“그랬구나. 내가 이용당했어!”
“이용당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설명할 시간이 없다. 조금이라도 이성이 돌아왔을 때, 대비를 세워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경계심을 돋우던 드래곤 로드가 갑자기 머리를 쥐어 감쌌다.
“크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에 드래곤들이 흠칫하며 분분히 물러섰다.
드래곤 로드에게 원인 모를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종잡을 수 없는지라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이칼이 외쳤다.
“로드! 당신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 주시오! 그래야 당신을 돕든 말든 할 게 아니오!”
그동안 포식을 자행했지만, 로드는 로드다.
그가 이성을 찾아야만 상황을 안정시키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기 이전에 그의 증상을 알아내야 했다.
“크아아악!”
하지만 드래곤 로드는 대답 없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장내의 모든 드래곤이 그런 로드를 심각하게 바라봤다.
여전히 드래곤 로드의 뇌를 관찰하던 루터는 안정되어진 마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정을 찾았어.”
아군이면 다행이라고 박수칠 일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루터의 임무는 드래곤 로드의 안정이 아니었다.
“유감이지만 전후 사정을 알아봐야겠어.”
그는 드래곤을 위하고자 애벌레를 제거한 게 아니었다.
광기를 제거해야 의식이 수면 위로 떠 오른다. 루터는 그 의식을 통해 과거를 헤집어야 했다.
드래곤 로드의 입장에선 겨우 안정을 되찾았는데, 알고 보니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광기를 지웠으니 자신의 차례다.
루터는 창조 룬어를 이용해 드래곤 로드의 기억을 들여다봤다.
부드러운 의식의 흐름에 루터가 개입하자 드래곤 로드가 비명을 질렀다.
원래는 의식을 잃은 채, 병행해야 하는데 현재를 보고 있는 상태에서 강제로 진입하니 고통스러운 게 당연했다.
루터는 그렇다고 로드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원흉이 누구일까.’
기억을 비집고 들어간 루터는 드래곤 로드의 과거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거울처럼 나타난 기억의 잔상이 과거를 비추기 시작했다.
나타난 기억은 드래곤 로드의 포식이었다.
‘많이도 잡아먹었네.’
기억을 보니 로드에 의해 죽은 드래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드래곤들이 꺼려하는 낙사노르의 마물 소환에 절박하게 매달렸는지 알 수 있었다.
루터는 드래곤을 사냥하는 부분은 건너뛰었다.
‘분명 계기가 있었겠지.’
미치게 된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한참을 지나치다 보니 드디어 실마리가 나타났다.
드래곤 로드의 시점에서 날아다니는 장면이 나타났는데, 그의 중얼거림이 루터의 시선을 붙잡았다.
“얼쩡거리지 말라 했거늘. 감히 내 땅을 넘보는 수작인가? 빌어먹을 괴물 같으니라고. 불온한 수작을 품으면 나 또한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경계 어린 중얼거림에 루터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여기서 시작이로군.’
분노하는 드래곤 로드의 태도를 보니 경계심이 역력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던 그가 도착한 곳은 절벽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그를 담기에는 동굴의 입구는 작았다.
하지만 드래곤에겐 폴리모프라는 고유의 용언이 있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엘프로 변한 드래곤 로드가 동굴 입구에 도착한 뒤, 손가락을 튕겨 아공간에서 전신 거울을 꺼냈다.
전신 거울에서 환영이 나타났다.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예상대로였어.’
나타난 환영의 인물은 루터도 익히 아는 존재였다.
마왕이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여어! 드래곤 로드! 잘 지냈나?”
빙그레 웃는 마왕을 향해 드래곤 로드가 사납게 외쳤다.
“마왕!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 네 놈으로 인해 결계가 깨졌다. 내가 뭐라 경고했나! 다시는 드래곤 영역에 얼씬하지 말라 안 했나!”
마왕은 반가워하는데, 드래곤 로드는 적개심으로 가득하다.
루터는 둘의 태도를. 정확하게는 드래곤 로드의 입장을 이해했다.
‘가까이하기에 마왕은 두려운 존재지.’
마왕은 신의 힘을 지녔다.
그런 그와 같은 대륙에 있는 드래곤 종족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불안하고 초조한데, 자꾸 얼굴을 비추니 신경질이 날 수밖에 없다.
마왕은 드래곤 로드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서운한 표정을 띠었다.
“이거 섭섭하군. 나는 그대가 무척이나 반가운 데 숫제 원수 취급이야.”
“네 놈의 시답잖은 말장난에 장단 맞춰 줄 생각 없으니 결계를 부순 이유나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나 원 참. 별수가 있겠나. 자네를 부르려면 신호를 보내야 하는데, 나를 감지하는 결계를 만든 채, 눈 가리고 귀 닫고 있으니 무슨 수로 대화를 할 수 있겠어. 어쩔 수 없던 거니 이해해 달라고.”
“우리가 대화할 이유는 없을 텐데.”
“이런. 숫기 없는 친구 같으니라고. 그렇게 갇혀 지낸 채, 세상 돌아가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큰코다칠 거야.”
마왕의 조언은 흘려 넘길 수 없다.
드래곤 로드가 경계심을 돋우며 사납게 외쳤다.
“지금 날 위협하는 거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한 반응에 마왕이 혀를 찼다.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며 그가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얘기라네. 너무 민감한 것 아니냐?”
“네 놈과 대화하고 싶지 않으니 간단히 용건이나 말하라.”
“몸집은 산 만 한데, 담은 콩알보다 작군. 뭐, 자네가 원하는 대로 용건을 꺼내지. 마물 소환 작업을 즉시 중단하게.”
드래곤 로드가 흠칫했다.
그가 얼굴을 굳히며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마물 소환을 하지 않았다.”
“결계를 쳤다 하더라도 내 눈을 피할 수 없어. 이유는 알겠지만, 내가 간섭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게 좋을 거야.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마물을 소환하면 그대나 나나 서로 좋을 게 없어. 게다가 다른 드래곤은 그렇다 하더라도 자네가 작업을 벌이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 발생해. 그러니 내 충고를 새겨듣게나.”
마왕의 충고에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마왕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얼굴을 굳히며 진지하게 충고했다.
“협약을 잊지 않았겠지? 마물을 소환하지 않는 대가로 자네와 자네의 종족 모두를 건드리지 않은 거야. 하지만 협약을 깨는 순간, 모든 건 파멸에 이를 걸세. 그대도 나도.”
“명심하겠다.”
“그 말. 믿어주겠다. 부디 내 당부를 잊지 말게.”
마왕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러자 드래곤 로드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협약? 웃기는 소리 하고 있군. 네 놈이 중립 지역에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 뻔히 아는데, 날 갖고 놀려고?”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린 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놈이 야금야금 나와 우리 종족을 잡아먹으려는 게 눈에 보인다. 결코 그렇게 둘 수 없지.”
다짐한 그는 동굴 안쪽으로 진입했다.
마법진을 타고 지하로 공간 이동하자 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그는 야광석에 의해 비춰지는 중앙으로 이동했다.
중앙은 무쇠로 만들어진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드래곤 로드가 중얼거렸다.
“마왕의 농간에 놀아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 그의 말대로 내가 소환하는 마물은 범상치 않을 거야. 마왕을 잡고 이 세계를 통치하겠다.”
결심은 잠깐이었다.
그는 마법진에 마나를 쏟아부어 발동을 일으켰다.
검은 공간이 일어나고 어둠이 밀려와 사방을 잠식했다.
잠시 후, 드래곤 로드와 똑같이 생긴 엘프가 마주 보며 서 있었다.
드래곤 로드가 물었다.
“그대는 마물인가?”
엘프 형상을 한 마물이 빙그레 웃었다.
“마물? 재미있는 소릴 하는구나.”
여상한 목소리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흠칫한 드래곤 로드가 되물었다.
“그럼 정체가 뭐지?”
“알아서 뭐하게?”
낙사노르 소환에 응했으면 스스로가 마물이 아니라 주장하는 자의 반응이 시원찮다.
드래곤 로드가 차갑게 말했다.
“너는 내 소환에 응해 이 세계에 나타났다. 태초부터 시작된 소환의 법칙은 알고 있겠지? 너는 지금부터 내 명령에 따라야 한다.”
“너는 한 가지 큰 실수를 했어.”
마물이 유령처럼 스르륵 드래곤 로드의 전면에 나타났다.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낙사노르의 마물이 로드의 볼을 매만졌다.
“수많은 낙사노르의 마왕들 중에 하필이면 내가 걸리다니. 너는 정말 운이 안 좋아.”
드래곤 로드의 몸이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불길한 느낌이 감돈다.
그가 물었다.
“당신은 낙사노르의 마왕인가?”
스스로를 마왕이라 칭한 존재가 빙그레 웃으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래. 나는 혼돈의 마왕이다. 축복과 저주. 파괴와 창조를 병행하는 위대한 혼돈의 산물 그 자체이니라.”
드래곤 로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왕이라도 소환의 법칙을 어기지 않겠지?”
혼돈의 마왕이 혀를 찼다.
“어리석은 존재여. 내게는 규칙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태초의 맹약을 언급해도 나는 간섭받지 않는 존재다.”
대답한 그가 드래곤 로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네가 불쌍한 거야. 소환을 시행했는데, 하필이면 법칙을 초월하는 나를 만났으니 말이야.”
드래곤 로드의 머리에 손을 얹은 마왕이 빙그레 웃었다.
“자, 이제 재미있게 놀아볼까.”
“으윽!”
그와 함께 드래곤 로드가 쓰러졌다. 의식을 잃었으니 기억이 끊겨야 한다.
그런데 기억이 끊기지 않았다.
혼돈의 마왕이 고개를 돌렸다.
지켜보던 루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왕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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