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드래곤 고기
드래곤에게 억압받던 권능과 노예같은 삶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정신적인 외상이 남기 마련이다.
당장 정령왕들이 엘프들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간 겪어온 수모와 끔찍한 기억을 조금이라도 잊게 해주게 도와주는 것이다.
헌데 이 드워프라는 이종족은 대장장이 얘기에 눈을 빛내며 자부심을 드러낸다.
태생적으로 정신력이 강하고 다부지다는 뜻이다. 루터는 늙은 드워프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정신이 강하고 꿋꿋하면 험로도 뚫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외에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는군.’
엘프와 같이 마나에 친숙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앞으로 두고 봐야 할 일이고 지켜 볼 만 한 가치가 있었다.
새로운 이종족은 언제나 환영이다.
루터가 늙은 드워프에게 물었다.
“이름이 뭔가?”
“고르딘입니다.”
“좋아. 고르딘. 이제부터 자네가 이들 드워프의 대표를 맡게. 앞으로 할 일이 있으면 자네를 부르지.”
고르딘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하라.”
“그 악독한 드래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드래곤은 없고 루터 등이 나타났다.
고르딘은 필시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루터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블루 드래곤 제레이라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는 죽었다.”
충격을 받은 고르딘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말보다 보여주는 게 낫다.
그는 아공간에서 드래곤 시체를 꺼냈다.
두 동강 난 제레이라의 시체가 나타나자 사방이 시끄러워졌다.
“으악! 저게 뭐야!”
“드래곤이다!”
“맙소사! 몸이 절단 났어!”
까무러치는 사방의 반응은 잠시였다.
루터가 경악하는 고르딘에게 넌지시 제안했다.
“너희 드워프 종족은 모두 대장장이라 하였으니 직접 보기를 원한다. 어떤가? 한 번 실력을 증명해 보이지 않겠나?”
붕어처럼 뻐끔거리던 고르딘이 고개를 홱 돌렸다.
실력을 증명하라는 말이 불편한 지, 그가 못마땅한 반응을 보였다.
“저희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실력에 따라 중한 일을 맡기려 한다. 그러니 눈으로 봐야 하지 않겠나?”
얼마나 실력에 자부심이 있으면 이제 막 드래곤의 권능에서 벗어난 상태에서도 제 자랑이다.
‘과연 자부심만큼 실력도 있는지 한 번 보자.’
만약 실망스럽다면 끝이지만 좋은 결과를 보여준다면 뛰어난 장인들을 얻는다.
시간을 두고 투자하고 지켜 볼 가치가 있었다.
고르딘이 팔을 걷어 붙였다.
수북한 털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가늘었다.
“일을 시키기 전에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저 망할 놈에게 고문당하다 보니 체력이 말이 아닙니다.”
잘 먹어야 힘을 쓴다.
특히나 대장장이들의 일은 더욱 더 그랬다.
루터가 턱짓했다.
“음식이라면 저기 풍족하게 있다.”
정령왕들이 캐고 따온 과일과 야채들이 중앙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고르딘이 고개를 저었다.
“저런 풀떼기로는 망치 질 하나 못합니다. 든든한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쓰죠.”
앓는 소리에 루터의 시선이 드래곤 시체에 향했다.
그가 물었다.
“드래곤 고기를 먹어 본 적 있나?”
고르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드래곤 고기요?”
“그래. 어떤가?”
“무슨 맛입니까?”
“몰라. 하지만 이 참에 경험해 보는 것도 좋겠지.”
얼떨떨한 고르딘을 뒤로한 루터가 키아라에게 손짓했다.
“드래곤의 가죽을 발라줘야겠다.”
“가죽을? 왜?”
“드래곤 고기를 먹어 보게.”
어리둥절하던 키아라가 루터의 등 뒤를 힐끔 바라봤다.
고르딘이 그 새 얘기했는지, 드워프 종족들이 눈을 별처럼 빛냈다.
“쟤들 때문이야?”
“얘기를 나눠보니 손재주가 제법 있는 것 같다. 어느 정돈지 시험해 보고 싶은데, 힘쓰려면 고기가 필요하다 하니 먹여 줘야지.”
“그래서 드래곤 고기를 먹이려고?”
“안될 거 있나.”
키아라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루터의 말대로 안 될 건 없었다.
과거엔 아무리 호풍환우하는 존재라지만 지금은 그저 죽은 시체일 뿐이다.
“재밌겠네.”
흥미를 붙인 키아라가 드래곤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손을 들자 오러가 검의 형상이 되어 나타났다.
이제 굳이 검을 찾지 않아도 되었다.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니 무기를 매개체로 활용하지 않는다.
키아라가 드래곤의 피부를 벗겼다.
단단한 피부였지만 오러 블레이드 앞에선 무색했다.
키아라의 작업을 모두가 묘한 눈으로 관찰했다.
정령왕들이 루터에게 다가갔다.
“뭐하는 중이지?”
“드래곤 시체로 요리를 할까 한다.”
“뭘 한다고?”
정령왕들은 잘 못 들은 것처럼 반문했다. 그 사이 목 주위의 껍질을 벗겨낸 키아라가 짙푸른 속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먹을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독을 머금고 있는 것 같다. 고민하던 키아라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루터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덩치가 크니 살은 많았다.
크게 한 덩이를 벤 키아라가 루터에게 다가갔다.
“가져왔어.”
“수고했다. 그런데 상태가 영 별로군.”
공중에 둥둥 뜬 살덩이에서 푸른 피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치이이익!
산성 독을 머금었는지, 바닥이 녹아내린다.
그 모습을 본 루터에게 미네르바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드래곤의 신체에는 독 그 자체야. 요리를 한다든가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세상에 불가능한 건 없다.”
루터는 살덩이를 자신의 앞에 내려놨다. 유심히 살펴보니 다행이도 살덩이 자체가 독이 아니라 흐르는 피가 독물이었다.
‘그렇다면 얘기가 쉬워지지.’
피를 제거하면 된다.
루터가 엘라임에게 말했다.
“핏기 좀 빼줘야겠어.”
엘라임이 설마하며 물었다.
“정말 먹을 생각은 아니지?”
“먹을 거다.”
단호한 대답에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노아스가 혀를 내둘렀다.
“인간은 전부 너와 같나? 정말 질리게 만드는 호기심을 가졌어.”
정령왕과 엘프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루터는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채, 엘라임을 빤히 쳐다봤다.
엘라임이 고개를 살레살레 저으며 물을 일으켰다.
순수한 물이 새어 나오며 살덩이를 담갔다. 그리고 유속이 거세지더니 핏물을 빼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물이 오염되고 엘라임은 몇 번이나 다시 갈아주어야 했다.
루터가 그 과정을 지켜보며 지나가듯 흘려 말했다.
“드래곤들은 강한 힘을 얻기 위해 동족을 잡아먹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더군. 우리도 드래곤을 먹으면 강해질까?”
처음 듣는 드래곤의 생리에 모두가 관심을 기울였다.
“드래곤을 먹으면 강해져? 그게 정말인가?”
“그래.”
“놀라운 정보군.”
정령왕들이 탄성을 지르다 이내 혀를 내둘렀다.
“드래곤은 정말 징그러운 존재들이야.”
“놈들을 모조리 박멸해야 해.”
지독한 놈들이라며 차후의 전투를 다짐하는 사이 엘라임이 자신의 임무를 마쳤다.
“전부 제거했어.”
짙푸른 핏물이 가시자 새빨간 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터는 샐리온을 쳐다봤다.
“구워야겠다.”
“그러지.”
샐리온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드래곤 고기의 맛은 어떨지 궁금했다.
불의 정령왕인 그가 나서자 거대한 살덩이가 노릇노릇 익혀지기 시작했다.
루터가 드워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드워프들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든 채, 코를 벌렁거리고 있었다.
익힌 고기의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는 듯 침까지 줄줄 흘렸다.
“풋! 쟤들 뭐하는 거야?”
루터의 시선을 쫓아간 키아라조차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령왕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뒤쫓는 켈라일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워프는 저희들과 다르게 육식을 즐겨 해요. 드래곤에게 갇혀 있는 동안 한 번도 고기를 먹어 본 적 없으니 무척이나 좋아하네요.”
표정을 보니 켈라일은 육식을 즐겨하는 드워프들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루터가 피식 웃었다.
“드래곤에 의해 고기를 먹지 못했다가 그 드래곤의 시체를 통해 고기를 먹게 되는군.”
묘했고 아이러니했다.
샐리온은 고기 굽는 재주가 있었다.
피부는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다.
거대한 훈제 스테이크를 만든 샐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만하면 되겠지.”
“차고 넘치는군.”
드워프의 반응을 보니 먹고 싶어 안달 난 듯 했다.
노아스가 바닥에 흙을 일으켰다.
매끈한 표면의 평평한 흙 접시가 완성되고 루터는 그 위에 살덩이를 내려놓았다.
요리를 마친 루터가 드워프들에게 손짓했다.
“와서 먹어라.”
“우와아아!”
허락이 떨어지자 드워프들이 함성을 지르며 득달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선두에 도착한 고르딘이 가장 먼저 살을 물어뜯어 입에 넣었다.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고 입에서 탄성이 흘렀다.
“이게 얼마만의 고기더냐.”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드워프들이 너나할 것 없이 고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지독한 모습에 키아라가 혀를 내둘렀다.
“고기 엄청 좋아하네.”
루터는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솔직하니 좋군. 앞으로 구슬리기 편하겠어.”
시킬 일이 있으면 고기로 보상해 주면 될 것 같았다.
키아라가 발라낸 살덩이는 워낙 큰 데도 양이 급속도로 줄었다.
지켜보던 키아라가 입맛을 다셨다.
“괜히 먹어보고 싶어지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없던 허기도 생겼다.
“나도 먹어 볼까?”
루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흔치 않은 기회니 한 번 접해봐라.”
“루터도 먹을래?”
“마다하진 않으마.”
키아라가 고기에서 일정량을 떼어내 가져왔다.
한 덩이를 떼어낸 키아라가 먼저 루터에게 권했다.
루터는 주저 않고 입에 넣었다.
고기는 부드러웠다.
거기에 씹는 순간 육즙이 흘러나오니 고소하기 까지 했다.
인간 세상에서도 접하기 힘든 상등급 육질의 고기였다.
헌데 루터의 표정이 묘했다.
“맛있기는 한데, 향이 독특하군.”
“왜? 이상해?”
“바다 향이 난다.”
“블루 드래곤이라서 그런가봐.”
“그런가?”
루터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키아라도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거. 정말 괜찮은데?”
“그래?”
“이제까지 먹어 본 고기 중에 제일 맛있어.”
딱히 간도 치지도 않았는데, 맛이 일품이었다.
둘이 음식 평을 하는 사이 어느새 흙 접시의 고기가 모조리 동이 났다.
식사를 마친 드워프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감동이 일었고 우는 드워프도 있었다.
폭발적인 반응에 루터는 갑자기 묘한 생각이 들었다.
“드래곤을 사육해 볼까?”
“사육한다고?”
“그래. 지능을 떨어트린 뒤에 가축처럼 기르는 거지. 어때?”
키아라가 냉큼 받아들였다.
“당장 실행하자. 루터. 내가 세상에 많은 요리를 먹어보진 않았지만 이 드래곤 고기는 정말 맛있어.”
루터는 우는 드워프를 보며 중얼거렸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나 보군.”
즉석에서 가볍게 요리했을 뿐인데, 풍미가 남다르긴 했다.
“죽이지 말고 가축으로 기를 방법을 연구해 봐야겠어.”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정령왕들은 기가 찬 눈으로 바라봤다.
그들의 입장에선 강력한 적수였고, 오랫동안 자신들을 고통에 빠트린 원수였다.
그런데 루터와 키아라의 대화를 듣노라면 단순 먹이 취급이다.
괴리감에 노아스가 한 마디 했다.
“대체 평상시에 무슨 생각을 하면 드래곤을 가축으로 다룰 계획을 짤 수가 있는 거냐?”
머릿속이 어떻게 된 지, 들여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가 막힌 정령왕들을 보며 루터가 단호히 말했다.
“모든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쓰임새가 있다. 어쩌면, 낙사노르에서 건너온 이 드래곤들은 가축으로 쓰이기 위한 것일지도 몰라. 그렇지 않다면 고기가 이렇게 맛이 있을 리가 없지.”
정령왕들이 할 말을 잃었다.
미네르바가 탄식하듯 말했다.
“역시 세상은 다 살고 봐야 해. 드래곤을 가축 취급할 줄 누가 알았겠어.”
“기가 막힐 노릇이군.”
“말이 안 나온다.”
“그나저나 정말 궁금하긴 하군.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저런 생각을 하는 걸까?”
정령왕들이 한 마디씩 할 때, 고르딘이 다가왔다.
발걸음은 활기찼는데, 표정은 예의바르고 몸짓은 공손했다.
루터가 물었다.
“이제 준비는 되었나?”
고르딘이 겸손히 말했다.
“분부만 하시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루터는 고르딘의 태도를 보곤 피식거렸다. 속이 훤히 보였다.
아마도 드래곤 고기에 제대로 빠진 모양이다.
루터가 그의 가려운 속을 긁어주었다.
“솜씨만 제대로 부리면 앞으로 원활히 드래곤 고기를 제공해주마.”
고르딘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를 따라 멀리 있던 드워프들이 몸을 숙였다.
드래곤 고기가 일으킨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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