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해방
일단 트인 벌판보다 밀폐된 장소가 필요하다. 루터는 굳이 동굴이나 협소한 지형을 찾지 않았다.
그의 옆에는 땅의 정령왕 노아스가 있었다.
루터가 요청했다.
“조용히 쉴 수 있는 지하 공간이 필요하다.”
“고맙다.”
허드렛일을 시키는 데 노아스는 고맙다고 말한다.
각 4대 정령왕은 루터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음을 또한 알았다.
하지만 드래곤과 싸우기로 결심한 이상 현세에 머무르며 자신들의 필요성을 부각시켜야 한다.
루터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일을 맡겼고, 정령왕들은 앞으로 자신들의 쓰임새를 활용하겠다는 의사 표시로 받아들여 고맙다고 말한 셈이다.
노아스는 자신이 왜 땅의 정령왕인지 확실히 몸소 보여주었다.
일정 크기의 바닥이 꺼진 듯이 주저앉았다. 매몰된 바닥과 흙벽은 장인이 다듬은 것처럼 매끄러운 석재로 변형되었다.
순식간에 지하의 아늑한 공간이 완성 되었다. 정찰을 마치고 온 미네르바가 루터에게 알렸다.
“저 앞에 넓은 호수가 있는데,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져.”
샐리온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제 도마뱀을 도륙 낼 시간이군.”
루터는 정령왕들의 분분한 분위기를 바꿨다.
“일단 자세한 내막을 알고 가야지. 무턱대고 들어갈 순 없다.”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리 넷의 힘이라면 드래곤 따위 처치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 하지만 드래곤 한 마리만 잡고 말 건 아니잖나. 너희들이 원하는 진정한 복수는 드래곤의 몰락이 아닌가? 그걸 바라면 일단 전후사정을 파악하고 계획을 짜는 게 중요해.”
루터는 설득하면서도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복수심이 보통이 아니군.’
요동치는 감정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중간에서 맺고 끊는 역할을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았다.
루터는 지하로 내려갔다.
키아라가 엘프를 들쳐 업어 뒤따랐다. 석실은 아늑했지만 쾌쾌했다.
나이아드가 바람을 일으켜 주변을 환기시켰고, 샐리온이 내부를 비추기 위해 석실 벽 곳곳에 불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노아스가 관 뚜껑 닫듯, 천장을 단단한 바위로 닫자 그럴 듯한 밀폐 공간이 완성 되었다.
바닥에 누운 엘프는 잠시 후에 정신을 차렸다.
모두가 엘프를 주시했다.
엘프는 넋 나간 것처럼 멍하니 있다가 자신의 손과 얼굴을 더듬었다.
키아라가 루터에게 귀엣말을 했다.
“왜 저러는 거야?”
“오랫동안 드래곤의 권능에 잠식당하다 자신의 의지를 되찾았으니 모든 게 생소할 거다.”
그의 설명이 맞는 지, 엘프는 정신을 추스르지 못했다.
겨우 마음을 붙잡고 나서야 겨우 주변을 돌아봤다.
엘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동족처럼 보이는 루터와 키아라를 제외하곤 전부 낯설었다.
엘라임이 슬픈 미소를 띠었다.
시선이 마주친 엘프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어? 어?”
가슴 깊이 복받치는 감정을 이해 할 수 없는지 엘프는 의아해하면서도 눈물 흘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엘프가 엘라임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엘라임이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다.”
“정, 정령왕?”
더듬거리며 되묻던 엘프는 그제야 자신의 눈물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사라져 있었던 정령을 만났다.
엘프는 그제야 정령왕을 보며 복 받친 눈물을 흘렸다.
“왜 이제야 오셨나요.”
우는 엘프를 보며 정령왕들은 슬퍼하거나 입술을 깨물었다.
루터가 말했다.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잠시 자리를 비켜주마.”
오랜 해후를 방해되고 싶지 않았다.
루터는 정령왕과 엘프를 놔두고 석실을 빠져 나갔다.
평원을 보는 키아라가 물었다.
“엘프와 정령은 어떤 관계야?”
“영혼의 동반자라고 부르면 될 거다. 마음을 서로 주고받는 사이이니 애틋하겠지.”
엘프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수천 년간 헤어진 정령과 엘프였으니 남다른 감정이 이해가 되었다.
키아라가 씁쓸히 말했다.
“드래곤이 그런 둘을 떨어트렸네.”
상대적으로 약자인 정령과 엘프는 드래곤에 의해 강제로 헤어졌다.
키아라는 생각할수록 드래곤이 괘씸했다.
“나쁜 드래곤을 혼내줄 거야.”
“지금의 너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말하면서 루터가 쓰게 웃었다.
“이래서 행동거지에 주의해야 해. 드래곤이 얼마나 난봉꾼처럼 행동했으면 모든 존재가 그들을 싫어할까.”
무지한 인간을 제외하면 드래곤을 좋아하는 존재가 하나 없다.
루터는 교훈을 배웠다.
“앞으로는 착하게 살아야겠어.”
그의 너스레에 키아라가 웃었다.
“루터는 착하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그렇게 말해봤자 설득력이 없다. 너는 내가 뭘 하든 옳다고 믿으니까.”
“사실이 그렇잖아.”
잡담을 나누는 사이, 바람의 정령왕 나이아드가 올라왔다.
그가 손짓했다.
“켈라일이 안정을 찾았어.”
“켈라일이 누구냐?”
“엘프.”
설명한 나이아드가 인상을 그렸다.
“그들은 오랫동안 고통 받았어. 절대로 드래곤을 가만 놔주지 않을 거야.”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얼굴에 분노가 가득하다.
루터는 키아라와 함께 석실로 내려갔다.
안정을 찾은 엘프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루터와 키아라는 엘프의 앞에 섰다.
켈라일이 고개를 숙였다.
“정령왕께 들었습니다. 절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다. 인연이 닿았으니 이렇게 된 것이지.”
“그런데 당신들께선 드래곤의 각인이 새겨져 있지 않으시네요.”
“우린 엘프가 아니야. 그러니 드래곤의 영향에 연관이 없다.”
“엘프가 아니라구요?”
“그래. 나는 인간. 이쪽은 오우거 종족이다.”
켈라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정말인가요?”
믿지 못 하니 루터와 키아라는 변장을 풀었다.
놀란 켈라일이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평범한 엘프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인간과 오우거일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오우거라구요?”
켈라일은 키아라의 생김새를 보고도 믿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오우거의 생김새가 아니었다. 엘라임이 옆에서 부연 설명을 했다.
“단순한 인간과 오우거가 아냐. 여기 인간은 우리 모두와 계약을 맺었어.”
“네? 그게 정말인가요?”
놀라는 그녀에게 샐리온이 못 박듯 말했다.
“평범한 자라면 결코 드래곤의 영역에 침입하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그들을 몰락시킬 계획을 짜지도 않을 테고.”
드래곤을 몰락시킨다는 말에 켈라일이 붕어처럼 입을 뻥긋 거렸다.
간신힌 정신을 붙잡은 그녀가 신음을 흘리듯 물었다.
“그, 그게 가능할까요?”
키아라가 빙그레 웃었다.
“루터에게 불가능한 건 없어. 단지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지. 그리고 루터는 드래곤을 제거할거야.”
켈라일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루터를 바라봤다.
예전의 앳된 얼굴 속에 무시무시한 힘이 도사리고 있었다.
루터가 말했다.
“이제 네 얘기를 들어볼 차례다. 그 동안 어떻게 된 거냐? 벌판에 죽은 엘프들은 뭐고.”
켈라일은 머뭇거리다 얼굴을 감쌌다. 자신들의 사정을 말하는 게 괴로웠다.
“저희들은 드래곤의 꼭두각시였습니다.”
그를 시장으로 켈라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오래 전, 드래곤에게 패한 정령왕들의 정령계가 무너지고 엘프들은 노예가 되었다.
단순한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드래곤의 노리개였다.
괴이하고 기이한 취미를 가진 드래곤에 의해 온갖 수모를 다 겪었다.
실험의 대상이 되었고, 여흥의 희생양이 되었다.
엘프들의 사정이 적나라하게 펼쳐지자 정령왕들은 분개했다.
“진짜 죽일 놈들이군!”
“오만한 놈들의 사냥감이 되었으니 그럴 만 도 하지.”
“저희 뿐 만 아니라 다른 이종족들도 같은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만약 드래곤을 없앤다면 그들 모두 해방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설명을 듣던 루터가 제동을 걸었다.
“다른 이종족? 또 누가 있지?”
“드워프와 수인족입니다. 그들 역시 저희들 못지않게 희생을 겪어 왔어요.”
루터가 어리둥절했다.
“드워프? 수인족?”
전부 처음 들어보는 이종족이다.
루터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키아라가 질문을 던졌다.
“벌판에서 엘프들이 많이 죽어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드래곤의 유희 때문입니다.”
“유희라고?”
“네. 저희들에게 광기 마법을 주입해 서로 죽이게 해요.”
“뭐! 대체 그러는 이유가 뭐야?”
엘프는 그저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키아라가 씩씩 거렸다.
“이 나쁜 놈들! 악랄하고 제멋대로야!”
루터는 이종족에 대한 생각을 접고, 드래곤에 대해 물었다.
“드래곤의 종류와 구성. 그리고 어떤 사회성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다.”
“저는 알지 못해요. 한 가지 사실은 각 드래곤마다 영역이 넓다는 것뿐이죠.”
결국 중요한 알짜는 아쉬움으로 끝을 맺었다.
루터는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결국 장본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군.”
정령왕들이 반색했다.
“이제 잡으러 가는 건가?”
“나이아드. 호수로 안내해라. 아마 상대는 제레이라 라는 블루 드래곤일 것이다.”
“어떻게 이름을 알고 있지?”
“켈라일을 치료할 때, 볼에 새겨진 룬어를 봤다. 푸른색의 제레이라라는 이름이었어. 아마 호수의 주인일 거다.”
켈라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금쯤 유희를 끝냈으니 호수에서 쉬고 있을 거예요.”
“환영 마법진에 나타난 그 엘프가 블루 드래곤이었어.”
루터는 일행을 둘러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가자. 드래곤을 죽이러.”
정령왕들이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실을 나온 루터의 일행은 그대로 호수를 향해 나아갔다.
호수는 작은 바다와 같이 드넓었다.
드래곤이라는 거대한 몸체를 담으려면 이 정도 크기는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지, 저수지보다 깊었고 바다처럼 넓었다.
켈라일의 눈에 슬픔이 담겼다.
“호수 깊숙한 곳에 제 동족이 갇혀 있어요.”
“놈을 유인할 테니, 물러나라.”
루터는 켈라일을 호수 변으로 물러서게 한 뒤, 일행을 둘러봤다.
정령왕과 키아라.
드래곤 한 마리 사냥하는 데,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파티 인원이었다.
“시작할까?”
“준비는 됐어.”
“도마뱀을 불태우겠다.”
“그 전에 내가 전신을 조각조각 다져버릴 거야.”
정령왕의 살벌한 다짐을 들으며 루터가 키아라를 바라봤다.
“좋은 공부가 될 거다.”
“알았어.”
루터가 유독 키아라만 여정에 대동하는 이유는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마왕의 변절된 부하들과의 거듭된 대전을 통해서 실력이 향상했으니 드래곤이라면 더 큰 도움이 되리라.
루터는 드래곤을 불렀다.
별 게 없었다.
감췄던 자신의 마력의 파장을 퍼트리면 된다.
쿠구구궁!
그의 전신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오자 산천초목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분출된 마력은 호수 깊숙한 바닥까지 흘러 들어갔다.
바닥에서 유희의 여흥에 취하던 블루 드래곤 제레이라가 즉각 반응했다.
쿠우우웅!
호수 중앙에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으며 드래곤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아라의 눈이 흔들렸다.
나타난 블루 드래곤의 전투력이 900만에 이르렀다.
역시나 보통 내기가 아니다.
드래곤의 본체의 크기가 대략 300미터는 족히 되는 듯 했다.
거대한 드래곤이 나타나자 정령왕들도 움직였다.
콰아아앙!
샐리온이 제 몸을 불렸다.
거대한 불의 거인이 100여 미터에 이르렀고, 그 뒤를 따라 다른 정령왕들도 그에 준하는 크기로 변했다.
블루 드래곤 제레이라가 정령왕들을 내려다 봤다.
거대한 동공의 살짝 흔들렸다.
노아스가 안부를 물었다.
“오랜만이다. 드래곤이여.”
말없던 블루 드래곤이 정령왕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정체를 파악했다.
“이제 보니 정령왕이구나.”
수 천 년이 지난 뒤에야 나타난 정령왕들이다.
낯설던 것도 잠시다. 블루 드래곤 제레이라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담겼다.
“너희들을 기억한다. 아주 오래 전. 우리들에 의해 산산조각 났었지. 그런데 다시 나타난 걸로 보아하니 그때엔 소멸되지 않았구나.”
제레이라는 정령왕들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궁금했지만, 이내 뒤로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놈들이 건방지게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잔재주를 자랑하러 온 것이냐? 아니면 우리에게 굴복하러 온 것이냐? 뭐가 되었든 간에 감히 허락도 없이 내 영역을 침범한 대가를 치러야겠구나.”
드래곤 각자의 개체는 자신의 영역에 매우 민감하다.
그는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자신의 영역을 마음대로 들어온 정령왕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드래곤의 몸에서 마력이 발출되기 시작했다.
전투가 시작되려 하자 정령왕들도 싸울 태세를 갖췄다. 어차피 서로 좋은 감정도 없었다.
복수를 다짐한 정령왕들은 드래곤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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