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변절자4
엘버린 왕국을 통제하던 필로아가 소멸됐다.
국왕은 정신을 차렸고, 마약과 욕망에 취하던 시민들도 깨어났다.
당장은 혼란스럽겠지만, 곧 안정을 되찾으리라.
루터는 지도를 들어 올렸다.
현재 그들이 있는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할루인 공국이었다.
그리고 할루인은 마왕의 변절자들이 둘이 있었다.
악령이 하품을 내쉬었다.
“이제 나는 돌아가도 될까?”
처음엔 적극적이었던 악령은 루터의 위력 행사에 흥미가 시들해졌다.
어차피 그가 간섭하면 모든 게 정리된다. 굳이 자신까지 나설 필요가 없었다.
루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돌아가라.”
“그럼 수고하라고. 여전히 날 싫어하는 어여쁜 아가씨도 마찬가지고.”
악령의 윙크에 키아라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가 돌아가고 키아라가 물었다.
“이제 어디가?”
“할루인 공국. 그 곳에 두 명이 있다.”
“그들도 마물을 소환했을까?”
“두고 보면 알겠지.”
루터는 키아라의 손을 잡고 곧장 텔레포트로 이동했다.
할루인 공국에 도착한 두 사람은 얼굴을 감추고 이동했다.
할루인은 광맥이 풍부한 산맥을 끼고 있다. 철기 생산지로 유명했고, 당연히 모시는 신도 철과 관련되어 있다.
강철의 칼독스, 산의 모신 오펜.
이 둘은 할루인의 대표적인 종교지만, 지금은 마왕을 배신한 변절자들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산맥 위에 나타난 루터는 공중에 둥둥 뜬 채, 지도를 살폈다.
“함께 있군. 위치는 이 근처고.”
수도에 있던 필로아와 다르게 이들은 산맥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두리번거리던 루터가 유난히 우뚝 솟은 돌산을 바라봤다.
돌산을 보는 루터의 시선이 차갑다.
키아라가 귀를 기울였다.
“비명 소리가 들려.”
“가 보자.”
둘은 돌산을 향해 나아갔다.
돌산의 남쪽 방향에는 거대한 철문이 있었는데, 광산이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가 거대했다.
“신전이었군.”
신전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게 이상했다.
둘은 입구에 섰다.
견고한 철문은 미세한 빈틈을 두고 열려 있었다.
루터는 문을 잡아 당겼다.
그르르릉!
돌산의 표면을 깎아 만들어 거대하고 웅장했지만, 루터가 열려고 하자 쪽문처럼 힘없이 벌어졌다.
키아라가 웃었다.
“힘이 장사네.”
루터는 별 거 아니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빛 한 점 없는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닐던 두 사람은 지하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아래에서 나는 소리 같아.”
“지상엔 인기척이 없다. 아마도 전부 밑에 있나 보군.”
“뭘 하고 있는 걸까?”
“정상적인 일은 아닐 거다.”
루터는 바닥을 때렸다.
콰아아아앙!
돌산 전체가 흔들리며 그가 내리친 바닥에 구멍이 생겼다.
구멍 아래로 뜨거운 빛이 일렁였다.
내려다 본 루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산이 아니라 화산이었군.”
구멍 아래로 뜨거운 용암이 일렁이고 있었다.
루터가 손짓했다.
“가자.”
“용암 속으로?”
“저건 위장용이다. 그 밑에 기척이 느껴진다.”
못마땅한지 키아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더운 건 싫은데.”
“열기를 차단해주마.”
그는 예언자 해파리가 했던 것처럼 투명한 막을 만들어 키아라 주변에 씌워주었다.
키아라가 미소를 띠었다.
“고마워.”
“별 말을.”
둘은 뚫어버린 지하 구멍을 향해 내려갔다.
내려가니 용암 위로 울부짖는 사람들이 보였다.
용암에 녹아내린 채, 비명을 질러댄다.
“끄아아악!”
“으아아악!”
찢어지고 갈라지는 비명에 키아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통로처럼 생긴 지하 바닥에 흐르는 용암의 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절규하고 있었다.
키아라가 물었다.
“왜 죽지 않지?”
키아라는 사람들의 비명보다 의문이 더 떠올랐다.
닿자마자 한 줌으로 녹아벌리 것 같이 뜨거운 용암인데, 사람들은 녹지 않고 비명만 질러댄다.
루터의 꿰뚫는 시선이 이유를 찾았다.
“인위적인 어둠의 힘에 결박되었는데, 끊임없이 피부가 재생되고 있다. 용암의 녹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야?”
“비명을 지를 때마다 어둠의 힘이 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군.”
키아라는 보지 못했지만, 루터는 현상을 즉각 파악했다.
“아마도 사람들의 비명을 통해 어둠의 힘을 축적하는 것 같군.”
키아라는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잔인 해. 루터. 저들을 해방시켜 줘.”
“알았다.”
루터는 용암에 발을 딛었다.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지만, 그의 발바닥에서 더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수로처럼 흐르던 용암이 순식간에 얼어붙고 딱딱해졌다.
루터는 그 용암 위에 갇힌 사람들을 꺼내어 어둠의 힘을 거뒀다.
순간, 키아라가 고개를 돌렸다.
용암에 몸을 담근 사람들의 하체가 사라져 있었다.
끈처럼 연결된 어둠의 힘을 잘라내자 줄 끊어진 인형처럼 사람들이 고꾸라졌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구나.”
“영혼만 묶어둔 것 같다.”
육신은 죽되 영혼을 고문하고 있었다. 잔인하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냉정하게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야 할 때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찾아오겠지.”
영혼을 쥐어짜며 얻어낸 어둠의 힘을 잘라 냈으니, 상황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찾아 올 것이다.
키아라는 차갑게 식어 단단히 굳은 용암 위에 섰다.
바닥에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누가 오는데?”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겠지.”
콰가가강!
한쪽 벽이 부서지며 겉면이 가공되지 않은 광물로 구성된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골렘이 몸을 돌렸다.
얼굴 부위에 시뻘건 빛이 일렁였다.
“너희들은 누구냐?”
골렘의 물음에 키아라가 그의 위아래를 훑었다.
“저게 뭐야?”
“마왕의 부하거나 마물. 둘 중 하나겠지. 아마도 할루인 공국이 종교 중 하나인 강철의 칼독스나 산의 모신인 오펜 둘 중 하나 일 거다.”
루터의 추측에 골렘의 두 눈에 일렁이는 불빛이 강렬해졌다.
“우리의 정체를 아는구나. 너희들의 정체는 뭐냐?”
“보아하니 강철의 칼독스 같은데, 맞나?”
“내 질문이나 대답 해!”
칼독스가 고함을 지르자 산이 흔들리고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진동하는 위용 속에서도 둘은 태연자약했다.
“나머지 한 마리는 어디에 있을까?”
“지하에 있다. 존재가 느껴져. 그런데 이상하군.”
루터가 인상을 찌푸리자 키아라가 어리둥절했다.
“왜 그러는데?”
“강한 마력이 느껴져. 드래곤이 이 근처에 있는 듯 해.”
최소 9서클의 마력이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루터는 호기심을 느꼈다.
“드래곤이라. 이거 점점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는 군.”
혹시 콕스일까.
그러기에는 마력이 강렬하다.
루터는 존재감을 발산했다.
숨어 있던 마력의 파장을 퍼트리자 신호를 느낀 건지, 지하 밑에서 반응이 나타났다.
콰가가강!
이번에는 바닥에서 돌기둥이 치솟으며 두 존재가 나타났다.
하나는 전신에 나뭇가지가 붙어 있는 존재였고, 다른 하나는 인간 형태이나 귀가 쫑긋 솟아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쫑긋 솟은 귀.
키아라가 옆에서 속삭였다.
“엘프 아냐?”
“겉모습만 따라 했을 뿐, 엘프는 아닐 거다.”
세 존재가 루터와 키아라를 포위한 형태가 되었다.
칼독스는 자신을 내내 무시하는 둘에게 노여움을 드러냈다.
“죽어라!”
접근한 칼독스가 거대한 몸체를 이용해 주먹을 휘둘렀다.
루터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콰아아아앙!
폭발음과 함께 힘의 차이를 극복 못하고 칼독스가 바닥에 튕겨 떼굴떼굴 굴렀다.
그를 밀어낸 루터가 몸을 돌렸다.
루터가 물었다.
“드래곤이 여긴 어쩐 일이냐?”
엘프가 인상을 쓴 채,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옆에 있던 고목나무 형태의 오펜이 물었다.
“마왕의 부하구나.”
“그러는 넌 오펜이로군.”
루터는 오펜과 드래곤을 번갈아봤다.
“마왕의 변절자들과 드래곤의 조합이라. 이거 신선하군.”
엘버린에선 변절자와 마물이더니, 이번에는 색다른 구성이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어둠의 힘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드래곤과 변절자. 그리고 어둠의 힘이라. 대체 셋이서 무엇을 꾸미고 있던 걸까.”
혼잣말 하듯 중얼거림을 못 들을 리가 없다.
침묵하던 엘프가 입을 열었다.
“모른 척 하고 돌아가지 않겠나? 나중에 마왕을 찾아 직접 해명하지.”
“시간 끌기는 소용없다. 내가 왜 찾아왔는지는 너도 잘 알 텐데. 그나저나 죽을 짓을 자처하는군. 마왕은 부하들을 죽일 수 없지만 너는 달라. 마왕이 이 사실을 알면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체 넌 누구냐?”
“어차피 죽을 텐데, 내 정체를 알아서 뭐하나?”
루터는 드래곤이 한심했다.
변절자들과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그가 혀를 찼다.
“보아하니 마물을 소환하려고 어둠의 힘을 끌어 모으고 있었군. 칼독스와 오펜은 어차피 마왕을 배신한 자들이라 막나가는 건 알겠는데, 드래곤이 끼어들 줄은 생각도 못했다. 드래곤이 낙사노르의 마물을 환영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데?”
마왕과의 대화에서 드래곤 로드 역시 낙사노르의 마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낙사노르의 마물은 강하다.
당연히 반가워 할 리가 없다.
그런데 그 드래곤이 낙사노르의 마물을 소환하려는 데, 협조하고 있다.
드래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마도 자신이 지적한 전말이 대부분 맞는 듯 했다.
드래곤이 다급히 변명했다.
“오해야. 나는 이들을 설득하려고 왔다. 그러니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다오.”
“늦었어. 나는 마왕의 눈과 함께한다. 너도 알 텐데. 그는 어디서든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너 역시 발각 되겠지.”
오펜과 드래곤의 몸이 경직되었다.
겨우 몸을 수습하여 흥분한 채, 달려들던 칼독스조차 몸을 우뚝 세웠다.
모두의 긴장된 시선 속에 루터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켜보고 있는 거 다 아니까 이만 나타나시죠.”
“그러지.”
루터의 옆에 어느새 마왕이 나타났다.
키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왕을 접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사실을 마왕도 아는 지라 나타나자마자 키아라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지. 반갑네. 아리따운 아가씨. 루터에게 많이 들었어. 역시나 그의 말대로 미모가 정말로 아름답군.”
마왕의 칭찬에 키아라가 눈을 반짝였다.
“루터가 그랬어?”
“입이 닳도록 자랑하더군. 키아라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말이야.”
“정말?”
키아라가 루터를 쳐다봤다.
루터는 피식 웃고는 드래곤을 가리켰다.
“남은 둘은 제가 처리하죠. 저 녀석은 어떻게 할 겁니까?”
“처리하는 동안 방해 되지 않게 데려 가지.”
마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으아아악!”
갑자기 비명을 지르던 드래곤의 모습이 어디 갔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왕은 앞뒤에 선 칼독스와 오펜을 향해 싸늘히 말했다.
“그렇게 경고했건만 사달을 일으키는구나. 이제 실망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 동안 함께한 정을 봐서라도 자비를 베풀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잘 가거라. 나의 오랜 부하들이여.”
“자, 잠깐만!”
변절자들이 붙잡으려 했지만, 마왕은 듣지 않았다.
그가 루터에게 말했다.
“드래곤 놈을 고문하고 있겠다. 진실을 토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저도 알려주시죠.”
“그러지.”
마왕의 모습이 이내 사라졌다.
오펜이 부르짖었다.
“우린 배신 당한 게 아니라 당신이 버린 거요! 그걸 아시오!”
루터는 그들의 절규를 무시한 채, 팔을 걷어 붙였다.
“빨리 끝내고 가자.”
칼독스가 외쳤다.
“너도 다를 바 없다. 그에게 이용만 당한 채, 버림 받을 거야.”
루터는 그들의 말을 무시했다.
마왕에게 버림 받았다고 인간들을 고문해 어둠의 힘을 갈취했다.
전후사정이 어떻든 간에 상종 못할 것들이라 서둘러 처치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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