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변절자3
루터도 의아하긴 했다.
악령은 스스로를 낙사노르에서 중급 정도 되는 수준의 존재라고 칭했다.
그런데 그 대단한 낙사노르의 마물도 해내지 못 한 사해를 건넜다.
이유가 뭘까.
마물은 악령을 노려봤다.
“대답해. 어떻게 사해를 넘었는지.”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눈빛이 집요했다.
악령은 어깨를 으쓱였다.
“알려줄 이유가 전혀 없지.”
“호호호! 소멸 당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는 게 좋을 걸? 지금 네가 서 있는 이 장소는 내 지배를 받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널 산산조각 낼 수 있거든.”
농담이 아니라는 듯 마물이 손가락을 튕겼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난 듯 땅이 흔들리며 이내 균열을 일으켰다.
갈라진 바닥 위로 뜨거운 수증기가 튀어 올랐다.
천장이 무너지자 사람들이 깔렸다.
“끄아아악!”
“살려줘!”
돌덩이가 주저앉고 짓이겨진 사람들의 시체가 육편처럼 흩어졌다.
필로아가 외쳤다.
“여기가 꿈속이라고 우습게 생각하지 말아라. 칼리사 님의 정신세계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는다!”
“마물이 칼리사라는군. 아나?”
“낙사노르의 마물은 부서진 세계의 모든 생명체를 합한 것보다 더 많아. 그러니 알 턱이 있나.”
“내친김에 하나 더 묻지. 저 칼리사가 말하기를 사해를 넘어서는 게 힘들다고 하는데, 너는 어떻게 넘어 온 거냐?”
“일단 끝장낸 뒤, 얘기하자고.”
악령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몸이 예전 도적 떼의 동굴에서 그랬던 것처럼 늘어지기 시작했다.
뱀처럼 길어진 목에서 얼굴을 내민 악령이 입을 벌렸다.
악어처럼 벌어진 입이 당장에라도 필로아와 칼리사를 삼킬 것 같았다.
“흥!”
코웃음을 친 칼리사가 채찍을 던졌다.
피를 머금은 채찍의 끝자락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며 투망처럼 벌어졌다.
벌어진 채찍이 악령의 길어진 목을 칭칭 감았다.
칼리사가 웃었다.
“내 무기는 영겁의 족쇄와 같아. 영원히 묶여 고문당하느니 진실을 토해라!”
악령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너와 싸우는 건 나 혼자가 아니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악령을 포박하던 채찍이 찢어졌다.
속박이 풀린 악령이 긴 혀를 내밀었다.
칼리사가 물러나는 사이 필로아가 바닥을 때렸다. 그러자 바닥에서 뾰족한 돌기둥이 치솟았다.
루터는 돌기둥을 부수며 전진했다.
마력을 발휘하지 못해도 에네르는 활용이 가능했다.
그리고 에네르는 칼리사가 이제껏 본 적 없던 힘이었다.
루터도 에네르를 지닌 아네스를 상대로 곤욕을 치렀다. 낯선 힘을 알지 못하니 대처 할 방법이 없다.
루터의 에네르는 칼리사의 채찍을 찢고 동시에 필로아의 돌기둥을 부서 버렸다.
루터를 가로막은 필로아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 정도론 우릴 막을 수 없다!”
“막으려는 게 아니다. 영원히 소멸 시키려는 거지.”
루터의 모습이 흐릿해짐과 동시에 필로아의 뒤로 이동하더니, 어깨를 짚었다.
놀란 필로아의 얼굴을 본 루터가 나직이 말했다.
“너는 마왕의 에네르를 배우지 못한 모양이구나.”
마왕을 배신한 수하들은 권능 외에는 배운 게 없었다.
필로아가 싸늘히 대꾸했다.
“그는 우릴 배신했어.”
“서로가 배신했다고 하는 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 하지만 지금에서야 그런 게 중요하진 않지.”
루터는 필로아의 어깨 죽지를 뜯었다. 고통스러워 할 줄 알았던 필로아는 내색이 없었다.
루터는 뜯겨진 팔을 들어 올렸다.
검은 모래가 된 팔이 바닥에 흘러내렸다.
두드득!
뽑힌 어깨 부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재생을 완료했다.
루터가 물었다.
“마왕의 권능이냐?”
“그래. 하지만 쓸모없지.”
“지금은 유용하게 썼군.”
“더 유용한 게 뭔지 보여줄까?”
필로아가 웃더니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몸에서 붉은 빛이 너울거렸다.
두 팔을 들어 올린 필로아가 거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리사님이 내게 준 힘을 보여주겠다. 권능을 능가하며 또한 압도적이다. 이제 마왕조차 날 업신여기지 못하리라!”
부르짖은 그녀의 드레스가 산산조각 찢겨졌다.
알몸이 된 채로 변이가 일어났다.
우드드득!
몸이 부풀고 근육이 돋아났다.
긴 꼬리가 자라고 양 팔과 다리에는 갈퀴 같은 손과 발이 생겼다.
살가죽이 벗겨졌고, 전신에는 울부짖은 영혼의 얼굴이 촘촘히 박혔다.
괴물이 된 필로아가 엄숙히 선언했다.
“나는 끝없이 삼키리라. 그리고 영원할 것이다!”
읊조린 필로아의 안면이 뒤틀리더니 타원형의 거대한 머리가 되었다.
벌린 입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히 박혔다.
필로아가 웃었다.
“이제 진짜 싸움을 시작해 볼까?”
쾅!
말을 마친 필로아가 루터를 후려쳤다.
튕겨나간 루터가 벽에 부딪혔다.
필로아가 움직였다.
사라졌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빠르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쾅!
사나운 발톱을 잡아 챈, 루터가 무심한 눈으로 물었다.
“왜 마왕에 대적하려 하지?”
“넌 아무것도 몰라.”
필로아가 입을 벌렸다.
벌린 입이 루터를 삼킬 것 같았다.
루터는 악령을 쳐다봤다.
악령과 칼리사는 이미 서로 간의 전투에 몰입 중이었다.
“사해를 건넌 방법을 말해!”
“싫은데?”
사납게 몰아붙이는 칼리사와 빙글거리는 악령의 전투 양상을 보니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릴 듯 하다.
루터가 말했다.
“그만해라.”
“널 죽이면 그만하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에네르를 익혔어. 네가 모르는 그 힘을 말이다. 그런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여긴 칼리사님의 영역이야. 그 분의 영역에서 에네르를 발휘해봤자 소용없어.”
“과연 그럴까?”
반문한 루터가 필로아를 밀어냈다.
슬며시 민 것 같은데, 필로아의 몸이 반대편으로 당겨져 나갔다.
콰가가가강!
바닥을 긁고 뒹군 필로아의 몸이 피투성이다.
어느새 루터가 필로아의 앞에 서 있었다.
“칼리사의 영역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결국 거기까지야. 에네르는 곧 의지의 발현이다. 내가 원하면 꿈속이라도 이뤄진다. 그게 설령 마물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흐흐흐. 너는 칼리사님의 진정한 힘을 모르고 있어.”
쓰러진 와중에도 필로아가 웃었다.
루터는 코웃음을 쳤다.
“죽어서도 깨우치지 못하겠군.”
펑!
필로아의 몸이 터져나갔다.
산산 조각난 필로아가 있던 흔적을 무심히 보던 루터가 몸을 돌렸다.
악령 역시 칼리사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콰직!
악령이 기어이 칼리사의 팔을 물고 사방에 흔들고는 바닥에 내팽개쳤다.
악령이 비웃음을 담으며 그 위에 섰다.
“소환된 마물이 형편없군. 고작 그런 실력으로 우릴 어쩌려 할 생각이었나?”
큰 부상을 입은 칼리사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물었다.
“사해는 어떻게 건넌 거지?”
“너는 알려줘도 못해.”
콰직!
머리를 부순 악령이 시체가 된 칼리사를 입에 넣었다.
돌연 악령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거 뭐야?”
“왜?”
“흡수한 느낌이 전혀 없어.”
“가짜였군.”
쨍그랑!
유리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새하얀 공간이 나타났다.
루터와 악령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필로아와 칼리사를 바라봤다.
칼리사는 옥좌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선 필로아는 득의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칼리사가 물었다.
“어때? 내 환영이?”
악령이 혀를 찼다.
“당했다.”
어쩐지 쉽게 처리되는 가 싶더니, 모두 진실 같은 가짜였다.
감쪽같이 속았다 생각하자 악령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실체와 같은 환영을 구사하면 만만한 상대가 아냐.”
루터도 악령도 설마 환영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필로아가 비웃음을 띠었다.
“아직도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너희들은 끝났어. 필로아님의 영역에 들어 온 이상 너희들은 영영 이 곳에 갇히게 될 거야. 풀리지 않는 영원한 환영 속에 갇히게 되겠지.”
칼리사가 여지를 남겼다.
“우리는 지치지 않겠지만, 너희들은 지친다. 그리고 결국은 죽게 되겠지. 하지만 기회를 주겠어. 너. 어떻게 사해를 건넜는지 알려주면 놓아주도록 하마. 어떻게 할 테냐?”
악령이 칼리사의 제안을 경청하다 루터를 쳐다봤다.
“그렇다는데?”
“알려줘라.”
“그럴까?”
대수롭지 않아 하는 루터의 태도에 악령은 묘하게 웃었다.
상대의 위협에도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악령이 말했다.
“내가 사해를 건널 수 있었던 건 집요함 덕분이지.”
“집요함?”
“아주 오래 전부터 낙사노르에서 탈출하려고 했었다. 조금씩 사해의 안개를 거뒀고, 나아갔지. 그 햇수가 수 천 년은 되었을 것이다.”
악령은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낙사노르에서 탈출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오랜 시간을 공들였던 것뿐이다.
칼리사가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낙사노르에서 벗어나려고 했지?”
“위험하니까. 나는 나 자신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거든.”
칼리사의 눈에 경멸이 떠올랐다.
“한심한 놈이었군.”
힐난에도 악령은 개의치 않아 했다. 오히려 그는 웃었다.
“그래. 한심해도 나는 이게 좋아. 적어도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자, 이제 네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방법을 알려준 악령이 물었다.
“이제 날 무사히 보내 줄 텐가?”
칼리사가 냉소를 띠었다.
“사해를 건너간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아. 차라리 안 듣는 것만도 못해.”
“그럴 줄 알았다.”
악령이 루터를 쳐다봤다.
“비밀이 새나갔어. 저 녀석이 낙사노르로 이 사실을 퍼트리면 머잖아 부서진 세계에 마물이 득실될 거야.”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건 그렇지.”
필로아가 냉소를 띠었다.
“이제 영원한 환영의 감옥에 갇히게 될 시간이다. 마음의 준비는 되었나?”
루터는 둘을 향해 다가갔다.
“믿을 수 없는 현상이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일어나게 되면 어떻게 받아들일 텐가?”
칼리사가 웃었다.
“정신이 미쳤어? 그게 무슨 소리야?”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사라진 루터가 칼리사의 면전에 섰다. 칼리사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눈 깜빡 할 새가 아니었다.
발걸음 한 번으로 코앞이다.
칼리사의 표정이 굳고, 필로아는 곧장 반격을 가했다.
욕망의 결정체로 이루어진 시뻘건 광채가 루터를 삼켰다.
루터가 필로아를 쳐다봤다.
팔을 뻗던 필로아가 석상처럼 굳었다.
칼리사가 벌떡 일어났다.
“너. 어떻게 한 거지?”
묻는 목소리가 자못 심각했다.
루터의 목소리가 무미건조했다.
“너는 궁금한 게 많구나. 소환 될 때 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겠지. 하지만 네가 마음대로 활개 치기에는 이 세계가 그리 만만치 않다.”
칼리사는 너무 까불었다.
그래서 마왕이 자신을 부른 게 분명했다. 칼리사의 조급함이 결국 이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준비도 대책도 세워놓지 않고 무작정 일을 벌인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나?”
“너, 너는 대체 누구야?”
“실체를 드러내라.”
루터는 칼리사를 향해 에네르를 전달했다.
칼리사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 어라?”
자신의 몸을 더듬고, 양 손바닥을 들어 올린 칼리사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루터가 물었다.
“왜? 실체가 되니 이제야 두려움이 생기나?”
“어, 어떻게? 어떻게 한 거지?”
믿을 수 없었다.
이 꿈속은 그녀의 것이었다.
환영을 통해 자신의 분신을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갑자기 분신이던 자신의 몸이 본체가 되어 버렸다.
루터는 굳은 필로아와 믿을 수 없는 현상에 공포심이 떠오른 둘에게 조언을 했다.
“에네르는 세계의 규칙을 무시하고 존재에게 절대적으로 간섭한다. 너희들 같은 조무래기들이 상대할 수 있는 힘이 아니야.”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꿈속에 들어온 것은 에네르를 믿었기 때문이다.
놀란 칼리사가 더듬거렸다.
“에, 에네르? 그게 대체 뭐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너는 자격이 없으니까.”
칼리사를 일별한 루터는 필로아를 쳐다봤다.
눈 하나 깜빡 못한 채, 몸이 굳어버린 그녀에게 루터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정은 몰라도 마왕과 대척하는 건 큰 실수였어. 소멸이 곧 깨달음이니 때 늦은 뒤구나.”
루터가 소멸을 운운하자 칼리사가 다급해졌다.
“자, 잠깐만 기다려. 내가 졌다! 시키는 대로 하겠어! 그러니 소멸은 하지 말아줘!”
“악령의 비밀을 들었으니, 이미 살려둘 수 없다.”
호기심이 화를 불렀다.
루터는 두 사람을 향해 완전한 소멸을 시행했다.
에네르가 전신을 파고 들고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지켜보던 악령이 물었다.
“대체 에네르가 뭐야?”
“나는 이게 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너도 배우고 싶으냐?”
루터의 제안에 악령이 눈을 빛냈다.
“나도 배울 수 있나?”
“아니. 못 배운다.”
단호한 대답에 악령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럼 왜 물어본 거야?”
“네가 좋아하는 말장난을 나라고 못하란 법은 없지.”
악령이 째려봤으나 루터는 무시했다. 필로아와 칼리사를 제거한 그들은 기사의 꿈속에서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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