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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클 영주님-95화 (95/185)

#95화 변절자2

필로아가 마물을 소환했다.

그리고 언제 소환했는지는 몰라도 마물은 수도 전체를 타락시키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루터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동안 무도회의 죽은 귀족 시체들을 지나며 조사하던 키아라가 다가왔다.

“미이라처럼 말랐고, 눈이 까매.”

“생기를 흡수했고 영혼을 삼켜서 그렇다. 산채로 영혼이 빨리면 그렇게 된다.”

루터는 방금 전, 필로아가 귀족들에게 벌인 상황을 간파했다.

음욕에 중독 당한 귀족들을 어둠의 힘으로 그 생기를 빨아들인다.

“마왕의 방식을 버렸어. 아마도 이게 낙사노르의 마물들이 대상을 사냥하는 방법이겠지.”

마왕의 부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결별했다고 봐야 한다.

낙사노르의 마물인 악령은 대상을 통째로 삼키고 지금의 경우에는 생기와 영혼을 빨아들인다.

절대적인 믿음을 통해 에네르를 수확하는 마왕의 패턴과 달랐다.

루터는 기감을 확장했다.

그의 파장이 무도회를 넘어 궁전. 그리고 수도 전체에 퍼져 나아갔다.

긴밀히 주시하던 루터는 턱을 쓸었다.

“이것 참 어렵군.”

“왜?”

“놈들이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은데 흔적을 찾지 못하겠다.”

키아라는 단 한 번도 루터가 막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물었다.

“루터가 못하는 것도 있어?”

“그러게 말이다. 사실, 어둠의 힘은 나도 잘 알지 못해. 아무래도 전문가의 손을 빌려야겠어.”

“전문가? 누구?”

“낙사노르의 마물 주제에 스스로 부하를 자처했던 녀석이지.”

악령. 그 놈이 필요하다.

루터가 손을 내밀었다.

“악령에게 가자.”

“꼭 그 녀석의 도움이 필요해? 난 걔가 싫어.”

노골적으로 싫은 척을 했으나 이내 루터의 설득에 말려들었다.

“우리 중 어둠의 힘을 가장 잘 아는 녀석이니 어쩔 수 없다.”

“쳇, 알았어.”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텔레포트를 이용해 악령의 거처로 이동했다.

악령은 현 상황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주변에 타락시킬 인간들이 즐비하다.

그러니 시간이 날 때 마다 갈등을 조장하고 분란을 일으켰다.

뒷담화를 하거나 거짓을 하여 오해를 하게하고 증오하고 미워한다.

악령은 황제의 곁에 있으면서 귀족들이 일으키는 분열을 즐겁게 관찰했다.

허나 그 고상한 취미도 거기까지였다.

악령의 집무실.

루터는 노크를 하지 않고 문을 열어 제켰다.

“어머!”

악령 앞에서 나긋한 몸짓을 벌이던 하녀가 얼굴을 붉히며 종종 걸음으로 빠져 나갔다.

루터는 하녀와 악령을 번갈아봤다.

악령이 투덜거렸다.

“찾아 올 때에는 미리 연락이라도 해 달라고.”

“방금 여자는 뭐냐?”

“출세욕에 눈 먼 불나방.”

“출세욕?”

“귀부인으로 살고 싶어 하니 도와주려던 참이다.”

“네가 친절을 베풀리는 없고, 의도가 뭐냐?”

“황제에게 바치는 선물이다. 밤 일 하나 만 큼은 요부가 따로 없어서 한 동안 기력이 나가 떨어질 거야. 그래도 좋아서 헤어 나오지 못하겠지.”

루터는 그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키아라가 경멸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 사는 게 즐거워?”

“나만 보면 인상 쓰는 아가씨군. 키아라. 나는 너와 친해지고 싶은데, 너는 어째 나만 보면 죽일 듯이 노려보는 구나.”

악령의 넉살에도 키아라는 딱딱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루터는 고개를 저었다.

둘은 성향이 너무 다른지라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기 어려웠다.

“할 일이 있다.”

“무슨 할 일?”

“엘버린 왕국에 마물이 나타났어. 찾으려고 하는데,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질 않아. 대신 좀 찾아 주어야겠다.”

악령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마물? 낙사노르의 마물을 말하는 거야? 설마 나처럼 사해를 가로지르고 온 건가?”

“마왕의 부하가 소환했다. 나는 그 부하와 소환한 마물을 제거해야 하는 상황이고.”

“마왕? 부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악령은 자신과 마왕의 전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루터는 설명을 시작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낙사노르의 마물이 있었다. 그가 마왕이야.”

듣던 악령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젠장, 내가 부서진 세계의 최초의 마물인줄 알았더니 이미 임자가 있었군.”

“혹시라도 그와 접촉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는 낙사노르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니까.”

그 외에 마왕을 배신한 부하가 낙소노르의 부하를 소환했다는 등의 전말을 들려 주었다.

악령의 표정이 묘했다.

“재미있군. 낙사노르의 마물을 자청해서 소환하다니 말이야. 좋은 현상이 아닐 텐데.”

“어째서?”

“소환자보다 마물이 더 강하면 상황이 심각해지지. 예를 들어 주종 관계가 바뀌는 거야. 소환자가 소환수를 섬기게 된다는 거지.”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좋게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수습해야 하니 바로 출발하자.”

“좋아. 나도 궁금해지는군. 과연 어떤 마물을 소환했을지 말이야.”

악령이 옷을 여미며 일어섰다.

루터는 키아라와 악령을 잡고 다시 원래의 궁전으로 되돌아왔다.

피 냄새가 진동해도 여전히 수습하는 사람 하나 없다.

악령이 코를 킁킁 거렸다.

“익숙한 어둠의 냄새로군. 낙사노르의 마물이 맞아. 헌데, 불안정해. 제대로 된 마물의 향기는 매우 진하고 달콤한데, 이건 탁하고 써. 소환이 제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나?”

“나도 찾아 봐야지. 일단 전후 사정을 좀 알아야겠는데.”

루터는 무도회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현상을 알려주었다.

마약초를 거침없이 피우고 대놓고 욕정을 드러냈던 사람들의 상황을 가만히 듣던 악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는 알겠다.”

“정체를 안다고?”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어느 소속의 마물인지는 알겠다는 말이야.”

“소속? 마물도 소속이 있나?”

“당연한 것 아닌가? 서로 비슷한 힘을 추구하면 결집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대장이 나오기도 하고. 뭐, 앞서 말한 것처럼 마왕이나 수장으로 부르기도 하지.”

“그래서? 해당 마물은 누구냐?”

“보지 않고서야 모르겠지만 쾌락을 지향하는 중급 수준의 마물이야. 그 이상이었으면 아마 도시 전체가 비명으로 들끓었겠지.”

중급이면 어느 정도일까.

루터는 악령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너 정도 된다 이 말인가?”

“맞아. 대장 정도라면 눈 감고도 손 쉽게 처치할 수준이지.”

“그런데 왜 보이지 않는 거냐?”

쉬운 상대라면서 수색이 안 된다.

악령이 웃었다.

“그야 이 녀석들의 대부분 형체가 없기 때문이지. 없는 걸 찾으려니 보일 리가 있나.”

“형체가 없다고?”

“놈들은 굳이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어. 녀석들의 무대는 따로 있거든.”

“거기가 어딘데?”

“여기야.”

악령이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쾌락의 마물들을 잡으려면 꿈속으로 들어가야 해.”

“꿈속?”

“그래. 이들은 정신이 일궈 낸 환상에 머물러 대상을 타락시키거든. 그러니 쾌락에 취한 사냥감의 정신에 스며들어 놈들을 찾을 수 있지.”

“그랬군.”

루터는 손을 뻗었다.

쨍그랑!

창문이 깨지고 궁전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에 찢겨 피범벅이 된 기사의 뒷목을 잡아 챈 루터가 악령에게 내밀었다.

“이 녀석이라면 되겠나?”

악령은 기사의 풀린 눈을 유심히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에 취했군. 적당해.”

“이제 들어가는 일만 남았군.”

그런데 상대의 꿈속에 들어가는 건 자신의 능력으론 불가능하다.

그가 악령을 쳐다봤다.

악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가능하지만 대장은 불가능해. 애초에 나는 영체로 구성된 존재지만 대장은 그게 아니잖아.”

갑자기 일이 막히자 루터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영혼이라.”

말이 영혼이지 귀신이 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악령의 말대로 영체가 아니니 남의 정신에 접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악령이 팔을 걷어붙였다.

“내가 처리하고 오지.”

타인의 꿈에 접촉하는 건 영혼체인 악령에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루터는 손 놓기 싫었다.

이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런 자잘한 부분에서 손 놓기 싫었다.

“나도 한다.”

루터의 고집에 악령은 두 팔을 들었다.

“마음대로 해 보라고. 하지만 쉽지 않을 걸?”

“기다려 봐.”

루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총동원했다.

마나를 이용했고, 에네르, 그리고 마나를 변환한 어둠의 힘까지 끌어 올렸다.

하지만 무슨 수를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존재를 영혼으로 바꾸는 건,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게 있다.

고민하던 루터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 자신을 가사 상태로 만들면 가능할까?”

키아라가 깜짝 놀랐다.

“그건 너무 위험해!”

“하지만 악령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너도 봤겠지만 필로아도 악령과 비슷한 수준의 전투력을 지녔다. 혼자서 필로아와 소환한 마물을 상대할 수 없어.”

“그래서. 스스로 죽어 버리겠다는 거야?”

“자살하려는 게 아니라 죽음에 근접한 상태에서 영혼을 사용해 보겠다는 거야.”

그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루터가 당부했다.

“악령과 다녀올 테니, 내 신체를 지키고 있어.”

“위험해 보여.”

“걱정 마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시간을 돌린다.”

키아라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무슨 일이 생기면 되돌아가면 된다.

루터가 악령을 쳐다봤다.

“시작하자.”

“좋아. 먼저 가지.”

악령의 몸이 연기처럼 흐릿해지더니 기사의 몸에 스며들었다.

루터는 창조 룬어를 이용해 가사 상태에 진입했다.

눈을 감고 바닥에 드러누워 있은 지, 한참이 지나자 부유감과 함께 루터는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리니 바닥에 누운 자신의 몸은 그대로 있었다.

반 시체가 된 몸은 빠르게 경직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서둘러 돌아가지 않으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리라.

루터는 자신의 전투력을 점검했다.

영혼이 되어서 그런지 마력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에네르는 그대로 남았다.

루터는 바닥 먼지에 글자를 그렸다.

[금방 돌아오마.]

갑자기 바닥에 글씨가 새겨지자 놀랐지만 영혼이 된 루터가 보낸 신호라 생각하자 납득이 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쉽기만 하다.

키아라가 말했다.

“빨리 돌아와.”

루터는 악령이 그랬던 것처럼 기사의 몸으로 움직였다.

물질계와 정신계는 완벽하게 구분 되어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가 다른 것과 같았는데, 영혼의 세계로 세상을 보니 모든 게 뿌옇다.

기사의 몸속에 들어간 루터는 시커먼 암흑 속에 작은 구멍을 찾았다.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한 악령이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성공했네?”

악령은 루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인간 행세를 하면서 다양한 군상을 만나봤지만 루터처럼 대단한 자는 없었다.

그러니 자신의 대장이 되었다.

악령이 전방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저 곳인 것 같은데?”

루터는 기사의 꿈속에서 보이는 성을 눈여겨 봤다.

황무지 위에 오롯이 서 있는데, 피칠한 것처럼 붉다.

먼 발치였는데,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루터가 자리를 옮겼다.

“가자.”

“영혼이 된 기분이 어때?”

날아가는 루터를 옆에서 따라 가는 악령이 물었다.

“별로 유쾌하지 않군.”

“마음만 먹으면 나와 같은 악령이 될 수 있어. 그리고 악령의 힘은 무궁무진하지.”

“헛소리는 그만 하자.”

“정말이라니까.”

대화를 나누며 성에 도착했다.

커다란 입구에 들어서자 발가벗은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뜨거운 입김과 시선 속에 쾌락의 신음이 성을 달궜다.

악령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인간의 욕망이란 정말 대단하군. 낙사노르에 있는 쾌락의 마물들이 군침을 낼 정도야.”

“저 녀석인가 보군.”

루터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상석 계단 위 옥좌에 앉아 있는 존재를 가리켰다.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라붙은 가죽 옷을 입은 매혹적인 여인의 모습이었다.

뱀처럼 긴 혀를 날름거리는데, 눈동자에 정욕이 가득했다.

옥좌에 앉은 그녀의 옆으로 오만한 표정의 필로아가 서 있다.

루터와 악령은 성 내의 대전을 지나 상석으로 이동했다.

옥좌의 마물은 루터 보다 악령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둠의 맛이 느껴져. 너도 나와 같은 부류구나.”

달뜬 목소리에 악령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맞다. 너는 쾌락의 마물이군.”

“너도 소환되었나?”

“아니. 나는 탈출했다.”

“뭐? 탈출했다고?”

반문한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벌떡 일어난 그녀가 고함을 쳤다.

“설마! 설마 사해를 직접 넘어갔다는 거야?”

목소리가 얼마나 쩌렁쩌렁 한 지, 대전 안의 모든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악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됐어.”

“믿을 수 없어! 거짓말!”

부르짖은 그녀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우린 오랜 세월 동안 사해를 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하지만 진실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마물이 뜨거운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사해를 넘었지? 대체 어떻게!”

루터는 마물의 반응에 심상찮음을 느꼈다. 사해를 넘어가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 듯 하다.

#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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