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서클 영주님-88화 (88/185)

#88화 심연 속으로

“갈매기야 함께 노를 젓자, 육지에 어여쁜 아가씨가 기다린 다오!”

어설픈 뗏목 위에 누운, 피부가 까맣게 탄 중년인이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렇게 해류에 몸을 싣고 나아가던 순간, 엄지발가락에 매듭 짓고 바다에 드리운 낚싯줄이 팽팽해졌다.

중년인이 눈을 빛냈다.

발가락을 당기는 힘이 보통이 아니다.

“월척이로다!”

흥겹게 외친 그가 힘차게 발가락을 잡아 당겼다.

낚싯줄이 치솟고 청새치가 공중에 치솟았다.

“으하하하! 오늘 하루는 속이 든든하겠구나!”

대소한 그가 청새치를 쥐고는 그대로 물어뜯었다.

이빨 자국이 난 채,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먹던 중년인의 뗏목이 어느덧 육지로 흘러갔다.

육지는 사막이었다.

중년인은 대수롭지 않게 원래 왔던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리려다 멈칫했다.

“어라?”

의문 성을 낸 그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원래라면 없었을 거대한 성벽이 눈에 띠었다.

조금 전까지 흥겨워하던 중년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몇 년에 한 번씩 제국의 군대가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사막에 진을 치고는 한다.

헌데 지금 보니 성벽을 쌓고 대대적인 토벌을 벌이는 듯 했다.

“저것들은 뭐야!”

고함을 지른 중년이니 물고기를 내던지고 뗏목에서 뛰어올라 해변으로 헤엄쳐 갔다.

육지를 밟은 그는 소매의 단검을 쥔 채, 성벽으로 향해 달려갔다.

헌데 이상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성벽의 관문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 있는데, 대부분이 비루먹은 자들이다.

끙끙 앓거나 신음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중년인은 어리둥절해하며 관문 앞에 줄 선 사람들에게 물었다.

“여 봐! 저 안에 뭐가 있길 래 사람들이 줄 서고 있나?”

험상궂은 중년인의 서슬 퍼런 질문에 사람들이 겁먹고 슬슬 피했다.

중년인이 인상을 그렸다.

“이것들이 묻는 말에 대답 안 해?”

으름장을 하며 거침없이 나아가던 그가 청년 하나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으윽!”

신음을 흘리는 청년이 지팡이를 떨어트렸다.

중년인이 지팡이와 청년을 번갈아 봤다.

청년이 눈을 맞추지 못하고 허공을 바라돈다.

“너. 눈 병신이냐?”

중년인의 억센 물음에 청년이 벌벌 떨었다.

“그, 그렇습니다. 이, 이 것 좀 놔주십쇼.”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면 놓아주마. 대체 저 성벽은 뭐냐? 그리고 사람들이 여기에 몰리는 이유는 뭐냐?”

청년은 자신이 아는 정보만 대답했다.

“여, 여기에 기적의 마법사님이 계신다고 해서 찾아 왔습니다.”

“기적의 마법사?”

중년인은 어리둥절했다.

“기적의 마법산데 뭐 길래 치료를 받으려는 거냐?”

“치료 능력이 뛰어난데,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호오. 그래?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니 꽤 실력이 있는 모양이다.”

“소문으로는 황제 폐하도 치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중년인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황제를 치료한다고? 그놈이야 말로 월척이었군.’

오늘 잡은 청새치가 사실은 미끼였다. 신이 난 중년인은 제대로 된 정보를 주워 담지 않고 본진으로 돌아갔다.

본진은 바다에 있는 바위섬이었다. 그는 즉시, 부하들을 소집했다.

엘몬트 해안 일대의 해적들을 규합하여 스스로 해적왕에 오른 마르테의 명령이니 순식간에 일 만에 이르는 해적들이 집결했다.

한 곳에 집결시킨 그가 일장 연설을 펼쳤다.

“동부 해안에 기적의 마법사라는 놈이 있는 모양이라 하더라. 소문으로 황제도 치료할 정도로 솜씨가 좋다 하니 우리 같은 놈들이 이용해 먹기 딱 좋은 녀석 아니냐!”

“오오오오!”

고무된 해적들에게 마르테가 비릿하게 웃었다.

“환자 놈도 공짜로 치료하고 있다 하니 마법사는 치료사로 써 먹고, 환자 놈들은 노예로 팔아넘기자. 계집도 많았으니 이참에 아랫도리 한 번 시원하게 놀려 보자꾸나!”

“우와아아아!”

해적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날 밤. 속전속결로 해적들이 본진에서 출발해 기적의 마법사가 있다는 도시로 향해 나아갔다.

이때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루터는 더 이상 첨탑에 머무르지 않았다. 환자를 치료하는 방식에 더는 제약이 없었다.

그의 의지가 곧 실현이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에네르를 내포한 치유력이 있으면 누구든 가능했다.

그런데 이 과정이 놀라웠다.

루터가 슬쩍 쳐다보기만 해도 그야말로 병이든 외상이든 씻은 듯이 나았다.

너무 간단해서 믿기지 않았고, 또한 놀라운 모습이다.

루터는 환자들에게만 놀라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침이 되고 밖으로 나선 그는 관문으로 향했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가득한 인파는 사막의 뙤약볕도 꿋꿋하게 견뎌가며 인내하고 있었다.

루터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선 한 청년이 루터를 쳐다봤다.

새하얀 로브에 신비로운 외양.

귀가 닳도록 루터의 모습을 전해 들은 청년이 확신하며 목청껏 소리쳤다.

“기적의 마법사시다!”

“우와아아아!”

그의 등장에 함성이 새벽 아침을 깨웠다.

모두가 그에게 몰려들었다.

꾸벅꾸벅 졸아 가며 보초를 서던 돌켄과 자경단원이 헐레벌떡 일어나 루터에게 다가오는 인파를 막았다.

밀고 밀리는 가운데 루터가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조용히 하라.”

거룩한 음성에 흥분이 잦아들고 열띤 눈동자가 그에게 닿았다.

루터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이곳에 정착하기 전까지 생각했던 계획을 떠올렸다.

인구를 늘리고 종교를 차단한다.

영지민들 계몽하여 마법과 그 외 영역을 가르친다.

사람들을 보는 그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지식을 가르친다고 오랫동안 박혀왔던 고정관념이 사라질 리가 없지. 차근차근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일단, 종교를 차단해야 한다.

대륙 어디든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신도가 있고 종교가 있다.

루터는 자신의 도시에 신전이 세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계몽으로 깨우는 것이 가장 간단했으나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다면 대체 해야지.’

뭐가 좋냐고 물으면 뻔하다.

바로 마법.

마법으로 종교를 대체해야 한다.

루터는 서릿발 같은 눈으로 사람들을 쓸어봤다.

굳이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아도 에네르가 보인다.

그는 옥석을 가렸고, 쓸 만 한 사람들을 솎아냈다.

“일렬로 줄을 서고. 호명한 자들은 성 내로 입성 시켜라.”

“예.”

지시를 받은 돌켄과 자경단원이 움직였다.

루터가 직접 나서 진두지휘하니 사람들이 순순히 뒤따랐다.

솎아내기를 시작해야 한다.

루터는 줄 선 사람들을 눈 여겨 보다 돌켄에게 지시했다.

“지금부터 내가 선택한 자들은 따로 분류해라.”

“예.”

루터는 일렬로 줄선 사람들을 선별했다.

선택 받은 자들은 자경단에 의해 빠져 나갔다.

선택 받은 자들의 표정이 밝다.

기적의 마법사가 자신을 선택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반면,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에 먹구름이 꼈다.

자신을 그냥 지나치자 한 여자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들의 반응을 무시하며 솎아내기를 마친 루터는 돌켄에게 선택한 자들을 가리켰다.

“저 자들은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으니 모두 쫓아내라.”

“예? 거둬들이려고 선택하신 게 아닙니까?”

“아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속셈을 가진 자들이다. 저들을 보아라. 돌켄. 선택 받은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모습을.”

루터의 지적에 돌켄이 두 무리를 번갈아 봤다.

선택받은 자들은 대부분 차림새도 깔끔하고 떳떳해 보였다.

반면, 그렇지 못한 자들은 허름한 복식에 주눅이 들었으며 딸린 식솔들이 있었다.

직접 비교를 하니 와닿는다.

그가 물었다.

“간절하지 않은 자와 그런 자들을 분류하신 겁니까?”

“마음을 봤다. 돌켄.”

“마음이요?”

“그래.”

돌켄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게 가능합니까?”

루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화가 단절되자 돌켄은 용무를 시작했다.

“저들을 쫓아내라.”

그가 자경단에게 지시를 내리고 직접 손을 쓰기 위해 팔을 걷어 붙였다.

“너희들은 들어 올 자격이 없으니 모두 여기서 나가라!”

선택할 때 까지만 해도 희희낙락하던 자들이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를 들여보내려고 선택하신 게 아닙니까?”

돌켄이 단호히 말했다.

“기적의 마법사께서 너희들을 거부하셨다.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으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라.”

청천벽력에 그들이 바지자락을 잡고 애원했다.

“안 됩니다! 못 돌아가요! 저희를 거둬주세요!”

“강제로 끌어내라!”

“기적의 마법사님! 기적의 마법사님!”

애원하는 그들을 단호히 뿌리치며 끌고 가는 돌켄 등을 뒤로하고 루터가 남은 자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마법의 도시에 온 것을 환영한다.”

조금 전까지 서럽게 울던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의 도시?”

혼잣말이지만 루터는 대답했다.

“그래.”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흠칫한 여자 아이가 망설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기적의 마법사님. 어째서 이름이 마법의 도신가요?”

“앞으로 이 곳에 많은 마법사가 태어날 테니까.”

그 말에 여자 아이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럼 저도 마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물론이다.”

“저, 정말이세요?”

고개를 끄덕인 루터가 줄을 선 다음 열로 이동했다.

여자 아이가 설레는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마법을 배운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사람들을 솎아 내는 데에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도시에 들어 올 자격이 있는 자.

그렇지 아니한 자들을 분류했고, 저항하는 자들은 과감히 내쫓았다.

저항은 만만치 않았으나, 루터는 선택을 되돌리지 않았다.

그렇게 솎아 내기를 한 뒤, 환자들을 한 데 모이게 한 루터는 기적과 같은 치료를 시작했다.

그는 일부러 시각적인 효과를 위하여 스스로의 몸에 광채를 냈다.

빛이 전신에 일자 모두가 홀린 듯이 바라봤다.

루터는 빛을 사방에 뿌렸다.

황금빛이 몸에 머무르자 조금 전까지 끙끙대던 환자들이 자리를 털었다.

한 사람이 외쳤다.

“이건 기적이야!”

루터는 그에게 대답했다.

“이건 기적이 아니다.”

부르짖은 사람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그럼 기적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이것은 마법이다.”

그의 대꾸에 질문한 자가 소처럼 눈을 깜빡였다.

루터는 그의 반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멀었다.’

사람들은 지성이 낮으니 뭐만 하면 기적이니 신의 가호니 떠든다.

하지만 그 모습도 이제 곧 끝이다.

곧 도시에 변화의 바람이 분다.

그 시작은 바로 오늘이었다.

어둠을 뚫고 해적선이 해안에 하나 둘씩 정박했다.

내려온 해적들이 살벌한 무기를 꼬나 쥐고는 마르테를 바라봤다.

마르테가 기름 먹인 횃불을 들어 올리며 사납게 웃었다.

“오늘 밤. 사냥을 시작하겠노라.”

그의 서슬퍼런 미소에 해적들이 사납게 웃었다.

이제 곧 도시가 불살라지고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으리라.

선두에 선 마르테는 곧장 해적을 이끌고 진격하려 했다.

그런데 그들의 앞을 누군가 가로 막았다.

“응?”

마르테는 자신을 바라보는 추녀를 쳐다봤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배웅 나온 사람 같았다.

마르테가 인상을 찡그렸다.

“웬 계집년이냐?”

그의 물음에 키아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뽑았는데, 그를 본 마르테가 대소를 터트렸다.

“으하하하! 계집이 검을 뽑고 설치는 구나. 보아하니, 더럽게 생긴 몰골 때문에 도망간 남편 쫓아 온 게냐? 아서라. 여기에 네 낯짝 보고 달아난 남편 놈은 없다.”

“크하하하!”

마르테의 농에 해적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키아라는 일행의 권유에 외양을 변형한 상태라 원래의 미모가 가려져 있었다.

헌데, 그 것도 모르고 마르테가 못생긴다 놀린다.

루터는 몰랐지만 키아라는 자신의 외모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죽여도 시원찮을 침입자가 자신의 얼굴을 놀렸다.

키아라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무심한 시선이 잠시 후에 일어날 참혹함을 예견하는 듯 했다.

#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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