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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클 영주님-87화 (87/185)

#87화 에네르2

치료를 받은 환자는 곧 떠나기 마련이지만, 살 길이 막막한 환자는 도시에 남았다.

루터는 에네르의 발현을 통해 검은 속셈을 가진 자들은 치료도 없이 단호히 내쫓았고, 반발하는 자는 키아라의 무심한 검에 달아나거나 목숨을 잃었다.

로엘 자작이 죽었다.

그 소문은 곧장 동부와 중부 사이의 영지에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평소 로엘 자작과 친분을 맺고 있던 지방 영주들이 크게 분개했다.

아무리 황제를 치료했기로서니, 귀족을 죽이는 것은 귀족을 모독하고 불경시 한 행위나 다를 바 없다.

지방 영주와 귀족들의 항의 서한이 담긴 서신이 황궁에 빗발쳤으나 악령이 모두 무마시켰다.

이때 즈음에 황제는 악령을 곁에 두고 총애하는 와중이었다.

예전에는 딱딱하고 형식적이었으나, 지금은 악령의 간계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있으니 황제가 악령을 가까이 두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로엘 자작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파문은 미미했고, 단순 해프닝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 사이 루터의 명성은 꺾일 줄 모르고 나날이 치솟았다.

어찌나 유명한지 국경을 넘어 인근 국가에 파다하게 퍼질 정도였다.

허나 소문이 좋은 말만 나오는 건 아니었다.

로엘 자작이 죽었고, 치료받지 못한 환자들도 종종 나왔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진실 역시 사방에 알려졌는데, 악랄하고 잔혹하다는 말이었다.

황제까지 치료한 기적의 마법사라는 칭호를 달고 있지만,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니 루터는 어느새 괴팍한 마법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루터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소문에 대한 진실은 하나면 충분했다.

무료로 환자를 말끔히 치료한다.

이 얘기 하나면 구름 같이 사람이 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져 하루가 멀다고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이제는 할 수 있는 인원이 모두 검문을 거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루터는 치료를 통해 에네르를 지속적으로 접하면서 마왕의 부하들, 정확히는 아네스가 자신을 꼼짝 못하게 하는 정체모를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베일에 싸인 힘이었지만, 에네르와 관련이 깊다 여겼다.

주변의 룬어는 그대로인데, 정체 모를 힘이 자신을 묶었다.

세계의 근간을 거부하는 힘이기에 루터는 그 영향에는 에네르가 끼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치료를 계속하니 환자들의 에네르가 점점 쌓여갔다.

이제 그의 에네르는 마왕처럼 우주의 별처럼 반짝이는 정도는 아니지만 작은 점이 생겨난 수준은 되었다.

에네르가 늘어나니 자연스레 의욕도 생긴다.

의욕이 앞선 루터는 홀린 듯이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가 심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고, 결국 삼일 내내 치료에만 몰두했다.

모두가 걱정했고, 심지어 다 죽어가는 환자들조차 루터를 염려했다.

루터는 주변의 걱정을 뒤로하고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모두가 잠든 꼭두새벽에도 침상에 누운 환자들을 무아지경으로 치료하던 루터가 돌연 몸을 꼿꼿이 세우고 그대로 멈춰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신체에 탈각 현상이 일어났는데, 애벌레가 허물을 벗듯 피부가 갈라지고 벗겨졌다.

루터는 변화를 받아들였다.

거부조차 할 수 없었다.

마음이 시켰고 몸이 따랐다.

가만히 있는 그의 피부가 벗겨지면서 윤택한 피부를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내부 정신에서 폭발하는 느낌을 받았다.

탈피를 멈추고 몸을 움직인 그가 눈을 떴다.

예전에는 심연의 바다처럼 깊고 잔잔했는데, 지금은 봄바람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내부의 변화는 곧 힘의 발현으로 이어졌다.

루터는 평상시 세상을 룬어로 바라봤다. 헌데 그런 룬어를 가로지르는 힘을 느꼈다.

에네르.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에네르가 느껴진다.

루터는 그 에네르와 자신이 연결 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죽음을 알리는 환자들의 핏빛 에네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스치듯 그의 에네르가 사람들의 몸속을 투과했다.

잠시 후, 거친 호흡을 뱉던 사람들의 몸이 안정을 되찾았다.

루터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교환된 에네르가 마음이 아닌 자신의 힘에 의해 발현되고 있었다.

그의 눈에 성취에 대한 기쁨이 떠올랐다.

드디어 에네르의 활용 방법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룬어로 이루어진 세계를 무시하고 가로지르는 에네르의 힘은 효용성이 무척이나 뛰어났다.

원리는 간단하면서도 위력적이다.

그는 먼발치에 떨어져 있는 꽃병을 바라봤다.

‘가져 오고 싶다.’

에네르의 의지는 곧 실현이다.

잠시 후, 꽃병이 둥실 떠오르더니 루터의 손에 다가왔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드래곤처럼 룬어를 변형하는 용언도 아니었다.

의지가 곧 발현이다.

루터는 둥실둥실 떠오른 채, 다가오는 꽃병을 받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았다.”

아네스가 어째서 자신의 몸을 꼼짝 못하게 하는지 깨달았다.

바로 에네르의 힘이었다.

에네르의 활용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존재를 멈추고 있으면 멈추라고 하면 되었고, 치료를 하고 싶으면 치료를 하면 되었다.

그러나 전제 조건이 뒤따랐다.

에네르를 사용하면 체력이 무척이나 지쳤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체력이 지칠 리가 없다.

당연히 정신력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에네르와 정신력은 같으면서도 밀접하기 때문에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아네스가 번번이 쓰질 않았던 거로군.’

체력이 급속도로 빠져 나가니 사용하기가 쉬울 리가 없었다.

그래서 에네르를 더 모으는 것이다.

결과에 만족하던 루터가 몸을 돌렸다. 어느새 나타난 마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가 나타날 때, 눈치 채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루터가 말했다.

“왜 인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나 했더니 에네르를 통해서였군요.”

짓궂게 놀래키려던 마왕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설마 벌써 깨달은 것이냐?”

루터가 말했다.

“에네르를 사용하면 마음먹은 대로 인기척을 감출 수 있고,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죠.”

“정말 대단하군.”

마왕은 어지간히 감탄하지 않는다.

그는 단 시간에 에네르의 힘을 간파한 루터의 재능에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말했다.

“놀랍구나. 설마하니 스스로 깨우칠 줄은 몰랐다.”

“시작합시다.”

“뭘?”

“대련해야죠.”

“흐흐. 그래. 자세한 얘기는 그 뒤에 하자꾸나.”

마왕이 공간을 열었다.

그의 뒤를 쫓으며 루터는 과연 에네르를 섞은 힘이 어느 정도 일지 궁금해졌다.

마른 황무지에 선 마왕과 루터.

“각오는 되어 있느냐?”

마왕의 질문에 루터는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합시다.”

“하기에 앞서 어느 기준에 맞춰줄까?”

“기준?”

“네가 상대하려는 존재들 말이다. 낙사노르의 마물들이냐. 아니면 내 변질된 부하들이냐. 원하는 수준으로 맞춰주마.”

“일단 제일 먼저 당신의 부하들로 가 보죠.”

“좋다. 그럼 간다.”

간다는 말과 함께 마왕이 희끗하며 사라졌다.

루터는 당장 눈앞에서 벌어진 변화를 믿지 않았다.

‘에네르군.’

단순한 은신이 아니었다.

에네르는 룬어를 거스르는 의지의 발현이다.

숨겠다고 마음먹으면 결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루터도 가만있지 않았다.

에네르는 마왕만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역시 모습을 감추었다.

정적은 잠시였다.

콰아아아앙!

공중에서 대폭발이 일어나고 마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망할 녀석 같으니라고. 어떻게 알아 차렸느냐?”

중얼거리는 그의 뒤로 루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맞춰 보시죠.”

말하는 루터의 손에 마력이 응집해 있었다.

상대는 마왕이고, 약점 따윈 없다.

당연히 속성 마법은 소용없으니, 자신의 마력을 그대로 구현하는 게 낫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처럼 마력탄이 손바닥에서 튀어나왔다.

부메랑 모양의 마력탄이 나아가자 마왕이 웃었다.

“마력 따위론 날 어쩌지…….억!”

웃던 그가 복부에 마력탄을 맞자 신음을 삼켰다.

마력탄은 불순물이었고 그 정체는 에네르였다.

에네르를 발현하게 되는 방법을 알았으니 사용법도 다양해졌다.

마력에 에네르를 간섭하면 마왕도 타격을 받는다.

주춤주춤 물러난 마왕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기준을 끌어 올리시죠.”

“그래야 될 것 같다. 내 부하들은 널 감당할 수 없겠어.”

마왕의 변질된 부하들은 권능을 받았다. 그리고 그 권능은 에네르였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스스로 깨우쳐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과 달리 권능에만 의지한 채, 싸운다.

당연히 루터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마왕이 얄밉게 웃었다.

“이번 기준은 낙사노르의 마물이다.”

“얼마나 강합니까?”

“직접 깨달아 봐.”

웃는 마왕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전신에 음울한 기운이 흘러 들었고 기세도 흉폭했다.

루터가 먼저 선공에 나섰다.

가만있다간 아무 것도 못하고 무력하게 당할 것 같았다.

손바닥에서 발출된 쐐기 모양의 마력탄이 마왕의 전신을 두들겼다.

콰가가가강!

폭음이 울려 퍼지고 대지가 폭삭 주저앉았다.

루터의 몸이 흐릿해졌다.

에네르로 다시 숨바꼭질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의도를 이미 간파한 마왕이었다.

“어딜 가느냐?”

마왕의 손이 루터의 어깨를 잡아당기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리 꽂았다.

콰아아앙!

추락한 루터의 몸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갔다.

“쿨럭!”

피를 토한 루터가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렸다. 어둠의 기운이 사라지지 않고 팔을 에워쌌는데, 마비 된 것처럼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사라져라.’

의지를 발현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느새 옆에 선 마왕이 말했다.

“어둠은 존재 그 자체이니 또 다른 성질의 에네르다. 아직은 네가 모르는 세계이지.”

루터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졌습니다.”

“잠깐 안 본 새에 많이 성장했구나. 축하한다.”

마왕의 축하가 달갑지 않았다.

일어선 루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둠이 또 다른 에네르라고 했습니까?”

“아니. 어둠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것 모두를 말이다. 그러니 에네르 역시 그 범주 안에 포함되어 있지.”

“대체 어둠이 뭡니까?”

“처음이자 끝이다.”

마왕이 몸을 돌렸다.

“더 어울리고 싶지만 바쁜 일이 있어 이만 가봐야겠다.”

“언제는 한가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시선은 언제나 낙사노르에 닿아 있어. 그 곳에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이라도 관찰을 해야만 해.”

떠나기 전, 루터가 재차 물었다.

“드래곤과 절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아는 대답을 묻는 군. 뻔하지 않나?”

대답한 마왕이 홀연히 사라지고 루터는 현실로 돌아왔다.

루터는 그의 대답을 곰곰이 되새김질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의 상대는 정체 모를 낙사노르의 마물들이었다.

치료는 단순해졌다.

이제는 상대의 에네르를 꿰뚫었고, 의지만 있으면 치유가 가능했다.

순서를 차례대로 지킬 필요가 없었고, 불순한 의도를 품은 에네르를 지닌 사람들을 일부러 치료하여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의 에네르를 꿰뚫고 있다는 건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선하거나 순수한 자들은 받아들이고 악한 자들은 과감히 내쫓았다.

그는 성자가 아니었고 아무나 치료하지 않았다.

며칠 사이에 도시가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 이제는 어지간한 대도시 수준이 되었다.

칼루아의 체계적인 통제 하에 도시가 원활하게 될 즈음, 바다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바로 해적의 출몰이었다.

#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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