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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클 영주님-84화 (84/185)

#84화 백작 영주

루터는 9서클이 되면서 인간 이상의 존재들을 접촉해 왔다.

그리고 그들을 마주하면서 배운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모든 존재는 욕망이 있다.’

마왕이 그랬고, 드래곤도 마찬가지다.

어느 존재건 부족함을 느끼고, 갈망한다.

아네스도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바스코 제국을 움직여 전쟁을 꿈꿨다. 제국의 영토가 넓어질수록 아네스 교단도 성세를 누린다.

그런데 루터에 의해 발목이 잡혔다. 화가 난 것은 이해 못 할 상황이 아니었다.

루터는 아네스와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충실한 마왕의 부하였고, 자신은 마왕과 협력하는 관계다.

당연히 그녀와 마찰을 빚어 좋을 게 하나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서는 모양새를 보이면 아네스가 주도권을 잡게 된다.

적당이 을러대며 타일러야 한다.

루터가 말했다.

“피차 싸워 득 될 건 없다.”

“그래서 황제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놨어?”

“고칠 거다.”

“그러니까 왜 병 주고 약주고 있는 거냐고? 대체 네 목적이 뭐야?”

“황제를 치료한 뒤, 그 공로로 작위를 받고 조용히 영지를 꾸려 지낼 생각이다. 방해하지 마.”

일방적인 통지에 아네스가 눈썹을 치켜떴다.

살얼음판을 걷는 시선 속에 그녀의 경고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정말 나와 끝을 보고 싶어?”

“천만에. 나는 네가 무엇을 하든 방해하지 않을 거다. 그렇지만 현재 내가 깔아 놓은 판에 끼어들면 나 역시 가만히 있지 않겠다.”

아네스는 기가 막혔다.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레 큰 소리였다.

“지금 협박하는 거야?”

“어떻게 듣던 상관없다. 기왕이면 협조 요청이라고 순화해서 말해주지. 나는 목적이 있고, 네게 전혀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진행 될 예정이다. 물론 지금은 예외지만.”

아네스는 처음부터 루터가 달갑지 않았던 이유를 상기했다.

역시나 건방지고 무례했다.

그녀의 서슬 퍼렇게 경고했다.

“내 심기를 건드렸으니 넌 무사하지 않을 거야.”

“왜 화를 내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마워? 황제를 저 꼴로 만들어 놓고 내 계획을 망쳤으면서 고마워해야 한다고? 내가 왜?”

“내가 바스코 제국에 남는 게 다행 아닌가. 만약 올슨이나 다른 국가에 자리를 잡는다면 네게 손해다.”

단호한 말에 아네스가 흠칫했다.

인간 세상에 직접 개입이 불가능한 아네스와 달리 루터는 활동에 제약이 없었다.

루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아네스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바스코 제국 하나 불태우는 건 내게 일도 아니다.”

마왕이 아무리 평가절하해도 그는 9서클 마법사였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바스코 제국 뿐 만 아니라 인간 세상을 모두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수 있다.

아네스가 인상을 그렸다.

“진심이야?”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게 중요하지 않아.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대처할 거란 얘기다. 날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럴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반대면 얘기가 다르겠지.”

“신께서 분노 하실 거야.”

그녀가 말하는 신이란 마왕이다.

루터는 냉소를 띠었다.

“아마 날 막지 않을 거다.”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세우지마.”

“그는 날 막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난 할 수 있으니까. 아네스. 신경전은 여기서 끝내자.”

잔뜩 을러댔으니 이제 타이를 차례다.

“네게 도움을 주겠다.”

“도움?”

“그래. 영지를 잡고 안정을 찾으면 네 적들을 제거해주마.”

“적? 다른 교단을 말하는 거야?”

“그래. 너 역시 신의 길을 걷고 있을 테니 잘 알 거야. 교단의 세력을 불리면 에네르가 늘어나 그만큼 신의 길에 가까워지겠지.”

어차피 마왕과 약속한 일이지만 생색을 내도 좋았다.

마왕은 거치적거리는 존재지만, 아네스에겐 앙숙이며 경쟁상대다.

아네스가 다른 마왕의 부하들을 곱게 보지 않을 터이니, 이쯤에서 당근을 제시하는 것도 좋았다.

위협과 제안을 번갈아 사용하자 효과를 보았다. 아네스의 찌푸린 얼굴이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고민은 이미 끝났다.

루터의 제안은 효과적이었다.

단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협력을 해야 하나 하는 사사로운 감정이 시간을 끌고 있을 뿐이다.

루터가 못을 박았다.

“이미 어느 쪽이 더 이로운지 스스로 잘 알고 있을 테니, 시간 낭비는 여기까지 하자. 황제를 살려야 한다.”

아네스는 못 마땅한 눈으로 루터를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앞으로 지켜 보겠어.”

돌아가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시선을 바꿔 재상에게 닿았다.

재상이 문을 가리켰다.

걸음을 옮긴 두 사람은 나란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약 향이 코를 찔렀다.

사제들의 기도문이 끊이지 않았고, 치료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끄아아악!”

중앙의 침대에서 우렁찬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명과 동시에 다발적으로 뒤섞인 목소리가 터졌다.

“어떻게 좀 해봐!”

“여기서 더 어떻게 하란 말이오! 최선을 다 하고 있소!”

“호흡이 떨어진다! 어서 신성력을 쏟아!”

다급한 외침을 들으며 재상이 루터를 쳐다봤다.

“보다시피 사정이 급하네.”

“한 번 살펴봅시다.”

두 사람은 침대 가까이에 다가갔다. 안 본 새에 황제는 미라가 되있었다.

루터가 손짓했다.

“모두 치료를 멈추고 비키시오.”

주변의 인물들이 루터를 쳐다봤다.

재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물러나시게.”

한 사제가 루터를 쳐다봤다.

“그는 누굽니까?”

“기적의 마법사다.”

“기적의 마법사?”

어리둥절하던 사제가 마법사란 말에 경멸의 시선을 띠었다.

“무능한 마법사가 어찌 기적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달고 있습니까?”

마법사는 치료사보다 치유 능력이 떨어진다.

루터는 사제를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지켜보면 알 일이겠지.”

사제는 입을 열려다 재상의 시선을 받고 이내 물러났다.

루터는 황제의 앞에 섰다.

자신이 벌인 일이었으니 그는 황제의 상태를 잘 알았다.

‘원래대로라면 해제만 하면 되는데, 보는 눈이 있으니 화려하게 해야겠지.’

“치료를 시작하겠소.”

말고 함께 양 손을 들어 올렸다.

손에서 새하얀 기운이 맴돌았다.

모두가 흥미롭게 바라봤다.

그는 일부러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마나를 운용했다.

새하얀 빛을 머금은 마나가 곡예 하듯 허공을 몇 바퀴 돌더니 황제의 몸에 스며들더니 그대로 전신을 뒤덮었다.

“와!”

“저게 무슨 치료 방법이지?”

새하얀 마나가 전신을 뒤덮자,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루터는 그와 동시에 황제의 몸을 슬쩍 건드려 몸에 걸린 역순환 창조 룬어를 해제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고 황제의 표정이 안정을 되찾았다.

재상이 눈을 부릅떴다.

대륙의 내로라하는 사제와 치료사들이 종일 붙잡고도 바꾸지 못했던 황제의 상태가 확연히 차도를 보이고 있었다.

“설마 치료가 된 건가?”

“그렇소.”

“허!”

재상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치료사들과 반신반의하던 사제들도 황제의 달라진 모습에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맙소사!”

“피가 멎었습니다.”

“호흡도 고르고 안정 상태입니다.”

재상이 다그치듯 물었다.

“대체 어떻게 치료한 건가?”

일반적인 마법은 아니었다.

루터가 담담히 말했다.

“학파에서 대대로 전승되던 치료법이오.”

“놀랍군. 지금 자네는 황제 폐하를 치료했어. 대단하이. 대단해.”

재상의 연이은 감탄사를 무표정하게 듣던 루터가 손을 휘저었다.

“피곤하니 쉬고 싶소.”

“그러게. 폐하께서 깨어나시면 자네의 공로를 알리겠네.”

루터는 몸을 돌렸다.

‘이제 시작이다.’

황제가 깨어나면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킬 생각이다.

이제 곧 영주가 된다.

앞으로 할 일이 많다 생각하며 루터는 원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황제가 깨어났으며 차도를 보인다는 소식에 물밑으로 치열하게 오갔던 황자에 대한 줄서기가 흐지부지해졌다.

잠을 잊고 상대를 제거하거나 실각시킬 방법을 골몰히 궁리하던 황자들은 허무해했고, 새로운 권력을 귀족들은 아쉬움을 달랬다.

루터는 호화로운 귀빈실에 머무르며 재상의 부름을 기다렸다.

귀빈실에는 루터 외에 악령도 있었다.

과일을 으적거리던 악령이 천장에 걸린 황금 샹들리에를 향해 씨앗을 뱉었다.

악령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영주가 되려 한다. 네 역할이 크다.”

“영주? 지방 영주를 한다 이 말이지? 그런데 황제와 재상이 놔줄까? 정체를 모르던 병을 치료했다고 황궁 내에서 소문이 자자하던데 말이야. 심지어 귀족 몇몇도 찾아왔다면서?”

루터는 현재 안팎으로 기적의 마법사로 소문이 자자했다.

순식간에 유명세를 치룬 데에는 황제를 가뿐히 치료한 일화 때문이었다.

평소 앓던 지병을 호소하는 귀족이 방문했는데, 루터는 번거로워 하지 않고 기꺼이 치료를 해주었다.

곧 보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의도를 지지해 줄 가능성이 높은 귀족들이었다.

최소한 반발이라도 억누르자는 생각에 치료를 해주자 모두가 루터에 대해 입 모아 칭송했다.

악령이 귀를 후비며 물었다.

“황제를 어떻게 떨칠 거야?”

루터는 대답 않고 창가를 바라봤다.

그가 넌지시 물었다.

“서쪽의 사해가 아닌, 동쪽의 바다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

“알다마다. 동쪽은 해적 투성이지.”

“그건 사해 외의 어느 곳을 가든 마찬가지다.”

해적은 사해를 제외하고 어디든 존재한다. 그런데 악령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가 아니야. 오스틴의 기억에 따르면 악명 높은 해적들의 본거지는 전부 동쪽 해안가 근방의 섬에 위치해 있다고 하더군. 바람은 거세고 보이지 않는 암초가 가득한데다 원인 모를 사고가 빈번해서 해적들 외에는 아무도 활동하지 않아. 동쪽 해안가는 해적들의 주 무대 라고 하는군.”

“그래?”

반문한 루터의 눈에 흥미가 감돌았다.

“동쪽 해안가가 그 정도로 심각했나 보군.”

“표정을 보아하니 동쪽 바다에 뭐가 있나 보지?”

“고대에 내려오던 전설의 이종족이 심연 깊은 곳에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찾아 볼 생각인가?”

“구전으로 내려온 전설과 신화는 모두 진실이었어. 이번에도 없으리란 법은 없지.”

“찾아서 뭐하게?”

“그건 그때 가서 판단해야지.”

“동쪽에 터를 잡을 생각이군.”

“맞아.”

“흠. 해안가를 두른 동쪽 지역이라.”

악령은 오스틴의 기억을 더듬어 남는 곳을 떠올렸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쪽 해안가에 자리를 틀 생각이라면 남는 게 땅이군. 척박해서 아무도 살지 않거든.”

“그렇다면 문제없겠군.”

“그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지. 황제에게서 어떻게 벗어날 생각이야? 내가 보기엔 황제 직속 치료사 노릇을 할 것 같은데.”

“언제나 그랬듯 속여야지.”

어차피 의도했던 목적은 이루었다.

명성을 얻었으니 동쪽에 자리를 잡기만 하면 사람들이 찾아 올 것이다.

다음날 아침.

깨어난 황제가 안정을 되찾고 루터를 찾는다는 말에 그는 복식을 차려입고 황궁으로 향했다.

좌우일렬로 늘어선 고위 귀족들과 황제가 상석에서 루터를 바라봤다.

황제의 시선이 친밀했다.

“그대가 날 구했다고.”

루터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자네 덕분에 살았군. 그대를 황궁 마법사로 초빙하고 싶네.”

악령의 예상대로였다.

루터는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제게 할 일이 있습니다.”

“할 일? 그게 뭔가?”

그때부터 루터의 이야기가 시작 되었다.

동부 해안가의 활개 치는 해적에게 부모를 잃고 고아로 지내다 스승에게 마법을 하사받으며 수행을 하다 마침내 깨우침을 얻어 세상을 나왔다는 허황된 이야기.

그러나 루터는 거짓말을 한, 두 번 해 본 것이 아니었고 마치 실제로 그러한 삶을 지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홀린 듯이 듣던 황제가 분개했다.

“부모님을 잃었으니 당연히 복수를 해야지. 내 도와줌세.”

“오랫동안 떠난 고향이지만 지리를 잘 아니 일정 구역을 제게 하사해 주시면 해적을 소탕하는데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흐음.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소?”

황제는 루터의 요청에 귀족들을 둘러봤다. 귀족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루터를 쳐다봤다.

루터가 미처 예상 못한 게 있었다.

황제를 살림으로써 새로운 권력에 대한 기대가 꺾이고 말았다.

각 황자를 지지하는 고위 귀족들은 황제가 죽지 않아 루터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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