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서클 영주님-76화 (76/185)

#76화 진실2

마왕의 설명은 단순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부서진 세계는 낙사노르와 세상을 공유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영향을 받는 다는 얘기지. 인간 세계에 전쟁이 끊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낙사노르에서 흘러나오는 어둠의 파장이 부서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영향을 최대한 줄이려 바다에 장막을 펼쳐놨지만 완벽하진 않더군. 마물이 종종 사해를 건너기도 하니까.”

루터는 그제야 사해의 비밀을 깨달았다.

“사해를 만든 장본인이 당신이군요.”

“결과적으론 그렇게 되었지. 장막은 일종의 어둠의 저주니까 바다가 오염될 수밖에 없다.”

알고 보니 사해는 현 세계를 낙사노르에게서 막는 일종의 방어막이었다.

듣던 루터가 의문을 제기했다.

“건너온 마물을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면 어째서 드래곤은 내버려 둔 겁니까? 이번에 건너온 마물이 말하길, 드래곤은 원래 낙사노르의 마물이라고 하던데.”

“놈들은 방어 수단이 있다.”

“그들이 당신에게 비견될 정도의 방어 수단이 있습니까?”

“그래. 방금 네가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지.”

루터는 즉각 눈치 챘다.

“소환이로군요.”

“그래. 너와는 비교도 안 될 대상을 소환 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마왕이 혀를 찼다.

“다 같이 죽자는 식이니까 어쩔 수 없더군. 하는 수 없이 서쪽을 내주었다. 칼날 산맥 너머는 그들의 영역이야.”

“그들에 의해 이종족들이 피해를 본 것은 알고 있습니까?”

“모를 리가 있나. 하지만 별 방법이 없다. 내가 움직이면 놈들은 낙사노르의 마물을 소환할 거야. 그러니 손을 댈 수가 없어.”

“그래서 협상을 할 생각이었군요.”

“어떻게 알았나?”

“아네스 덕분에 상황을 유추했죠. 당신은 드래곤과 협상할 의향이 있었습니까?”

“맞아. 그들을 설득해서 낙사노르의 마물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겁쟁이야.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루터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듣던 것과 너무 다르군.’

악령, 정령왕. 그리고 드래곤 콕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본 결과 두 가지 진실을 알아내었다.

하나는 드래곤은 이 세계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들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왕이 듣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

‘이거 상황이 묘하게 흐르는군.’

수확이 있었지만 짐도 생겼다.

드래곤이 적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지만 반대로 마왕의 심계에 걸려든 기분이다.

대승적 차원에서 일을 시행하려는 마왕이 어째서 자신을 걸고넘어지려는 것인지도 이해가 갔다.

루터가 마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날 이용해서 드래곤을 제거할 속셈이로군요.”

예리한 지적에 마왕이 끌끌 웃었다.

“눈치 하난 빠르구나.”

“드래곤이 어지간히 말을 듣지 않는가 보군요. 감히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라면.”

“겁쟁인데, 자존심만 세지. 아집으로 똘똘 뭉친 것들이라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들어먹질 않아. 설득이 안 되면 겁박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죽자 사자 나오는 바람에 나 역시 난처하긴 매한가지야. 사실, 나는 이 세계에 꽤나 애착이 있거든.”

“믿지 못하겠습니다. 당신에 대해 말하길, 인간 종교의 신 행세 하는 자들에게 권능을 대가로 죽음을 공물로 받는다고 하던데. 아닙니까?”

“콕스가 그랬나?”

루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르는 게 없군요.”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과거에는 그랬지. 사정이 급했으니까.”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뭐가 다릅니까?”

“이제 인간의 죽음은 필요 없다. 나는 일정 상태에 돌입했기 때문이지.”

“일정 상태?”

“그래. 굳이 따지자면 신의 경지와 비슷하다.”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본 그의 능력은 무시무시했다.

그러니 스스로 신의 반열에 올랐다고 자부해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전투력 측정이 불가능한 존재이니 이상한 건 아니겠지.’

오해가 풀렸지만 그 뿐이다.

인간을 지배하느니 신이니 해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루터는 마왕의 제안에 고민했다.

“드래곤을 꼭 제거해야 합니까?”

“밖으로 나가려면 내부 정리는 필수적이지. 그리고 드래곤만 제거해도 반은 끝이다.”

“나머지 반은?”

“누구일 것 같나?”

“설마 당신의 부하들을 말하는 겁니까?”

“맞다. 그들은 내 통제에 벗어났다. 누군가 제압을 해야 해.”

“당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들은 나에 의해 소환되고 계약을 맺은 존재들이다. 너 역시 낙사노르의 마물을 소환했으니 그 법칙에 대해 알고 있겠지.”

소환에 응한 마물과 소환자는 서로 간에 힘의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루터는 설마하니 마왕도 소환의 법칙을 무시하지 못할 줄은 몰랐다.

“당신조차 그 법칙을 못 깨트리는 겁니까?”

“그 법칙을 깨트리면 신이 된 것이나 다를 바 없지. 그리고 아쉽게도 난 아직 신이 아니다.”

불가능한게 있을 줄은 몰랐다.

루터는 마왕과의 대화에서 대부분의 궁금증을 풀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가 남았다.

루터가 물었다.

“드래곤을 처치하고 내부 단속을 하려고 하는 건 알겠는데, 왜 하필 접니까?”

“네가 적임자다.”

“저는 모르겠군요. 조금 전의 아네스만 하더라도 대단한 실력잡니다. 그녀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습니까?”

자신보다는 마왕에게 충성하는 아네스가 그의 계획을 실행하기에 적합해 보였다.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안돼. 솔직히 말하자면 너 외엔 누구도 실현 불가능하다.”

“이유가 뭡니까?”

“부서진 세계가 고립되면서 이미 알 만한 자들은 서로 다 알고 있어. 정체가 노출되었다는 뜻이지. 게다가 아네스를 접해봐서 알겠지만 내 부하들은 고집스럽고 우직해. 목표를 가리키면 우직하게 한 곳만 바라본단 말이야.”

“고지식하다는 말이로군요.”

“맞아. 유도리가 없고, 재치가 부족해. 상대를 속여 먹는 간계가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 능동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는데, 믿음직스러운 내 부하들은 그게 없어.”

마왕이 루터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요 근래 관찰한 자네는 아주 만족스럽더군. 상황과 때에 따라서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며 상대를 속여 먹더군. 솔직히 말해서 감동이었어. 내 부하들은 마물이면서 전혀 마물답지 않거든. 그런데 자네는 마물보다 더 하지 않은가.”

루터는 마왕의 칭찬이 달갑지 않았다.

마치 부려먹기 좋은 소를 고른 농부를 보는 것 같았다.

루터는 단칼에 거절했다.

“안합니다.”

마왕이 빙그레 웃었다.

“일단, 제안부터 듣지 그러나.”

“당신의 계획에 따르면 조르주와 같이 통제에서 벗어난 부하들을 제거해야 하고, 드래곤도 제거하라는 것 아닙니까. 목숨을 담보로 모험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신이 될 방법을 알려주겠다.”

쿵!

루터는 자신의 머리 위에 망치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흔들리는 눈으로 마왕을 쳐다봤다.

“신? 신이 될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처음엔 몰랐다. 그러다 시행착오를 겪고 몇 번 헤매다 보니 길이 보이더군. 그 길을 네게도 전수해주마.”

“음.”

루터의 눈에 깊은 고민이 서렸다.

마왕이 웃었다.

“이 녀석아. 뭘 망설여? 신이 될 방법을 알려주겠다니까.”

“누구나 추구하는 게 다를 뿐입니다.”

“그래. 하지만 언젠가 죽게 되겠지. 네가 바라는 것들이 결국 없어진다는 얘기이다.”

“내 수명은 무한합니다.”

“9서클의 마나 신체를 기반으로 자신만만해 하는데, 그도 잘 해봤자 몇 천 년이 끝이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낙사노르의 마물이 방문할 것이다. 너는 그들에 대항해 맞서 싸울 자신이 있느냐?”

듣던 루터의 얼굴에 짜증이 치밀었다.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산 넘어 산이로군.’

아직도 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마왕이 웃었다.

“이미 마음에는 결심이 섰을 텐데. 너의 길은 결국 정해져 있어.”

루터도 알았다.

투쟁. 그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운명이었다.

루터는 그에게서 신이 될 방법을 얻기 전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받았다.

“일단 내부 정리가 우선이다. 골치를 썩이는 내 부하를 정리해주게.”

“모두 몇 명입니까?”

“최소 스물이다.”

“많군요.”

“앞으로 더 늘어날지도 몰라.”

일감이 증가하는 건 누구도 원하는 일이 아니다.

루터가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어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몇몇 이들이 선동을 하고 있어. 요컨대 배신의 바람이 불고 있는 셈이지.”

“부하 관리가 엉망이군요.”

통렬한 지적에 마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하잘 것 없는 것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야. 어차피 사라져도 아쉬울 것 없었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부하들을 대하니 당연히 배신하는 겁니다. 포용력이 부족하군요.”

“한참 어린 게 지적 질이구나.”

“맞는 말 아닙니까?”

“틀린 말이다.”

“고집이 세군요.”

“너만 할까.”

루터는 그와의 입씨름을 포기했다.

말대꾸를 해도 불쾌한 내색 없이 싱글벙글이다.

‘나와 말장난 하는 게 재미있나 보군.’

루터는 그의 재미를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본론에 들어갔다.

“명단을 주세요.”

“나도 몰라.”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아네스가 알고 있어. 그녀에게 달라 하게.”

“아네스는 절 싫어합니다.”

“이 참에 친하게 지내.”

루터는 기가 찬 눈으로 마왕을 바라봤다.

그가 비꼬듯 말했다.

“이 상황이 재밌나 봅니다.”

“그래. 날아다니는 기분이다.”

“이유라도 들어 봅시다.”

“널 얻었거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유능한 부하는 상관의 기분을 만족시키는 법이지.”

“내가 언제부터 당신 부하가 되었습니까?”

“부하가 별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부하지.”

부아가 치민 루터는 순간 시간을 되돌려 먼 과거로 돌아갈까 깊게 고민했다.

그 정도로 마왕이 얄미웠다.

루터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 참에 확실하게 말해두죠. 나는 당신의 부하가 아니고, 협조하는 것뿐입니다.”

“마왕의 부하가 되는 게 싫은가?”

“누구 밑에 있기 싫을 뿐입니다.”

“드래곤 로드도 그 소릴 하더군.”

“왜 그랬는지 알겠군요.”

대화가 겉도는 기분이다.

생각해보니 마왕은 딱히 내부 정리를 강조하면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루터는 그가 왜 그러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까와는 태도가 다릅니다.”

“말했잖아. 너 때문이라고.”

마왕이 루터가 바라는 대로 심각하게 말했다.

“너는 네 생각보다 훨씬 유능하다.”

루터의 존재로 몇 천 년 동안 골치를 썩어왔던 일이 단번에 해소되게 생겼다.

오랫동안 루터와 같은 역할을 해줄 이를 드디어 찾았으니 자연 기분이 고무적이다.

루터가 있으니 손 댈 수 없던 부하를 처리하고 드래곤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세운 구상에 드러난 구멍이 메꿔지게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터는 마왕을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상대하다간 혈압만 오르게 생겼다.’

대화를 안하느니만 못하다.

루터는 마왕과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는 것을 포기했다.

차라리 아네스가 백 번 나았다.

루터가 물었다.

“이제 알려 주시죠.”

“뭘?”

“강해지는 방법. 그리고 신이 될 방법을 말입니다.”

“그 질문을 기다렸다. 지금 네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

“문제? 내게 문제가 있습니까?”

“그래. 너는 지금 이 룬어의 세계에서 9서클을 이룩했다. 헌데 문제는 본질이 인간이라는 사실이야. 신체를 마나로 변환했다 하더라도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마력을 감당 못한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신체가 붕괴하여 폭발할 거다.”

마왕의 지적에 루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붕괴하고 폭발한다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린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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