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진실
전투력 2천만의 마물은 아직도 몸을 빼내지 못했다.
전체의 삼분지 일정도 몸을 드러냈는데, 그 크기만 하더라도 육중한 드래곤에 비견 되었다.
마물의 외눈이 주변을 쓸어 보더니 날개를 펼쳤다.
수 백, 수 천 만의 촉수가 꿈틀거리며 하나로 합쳐졌다.
펼친 날개는 아네스가 펼친 공간을 집어 삼킬 것 같이 거대했고 육중한 몸은 거대한 기둥 같았다.
노인의 모습을 한 마왕은 공중에 계단이라도 있는 것처럼 성큼성큼 올라 마물의 외눈의 맞은편에 섰다.
마왕이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외눈의 눈빛이 마왕에게 닿았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마물은 마왕을 알아보았다.
외관이 아닌, 마물들만이 감지 할 수 있는 어둠의 기운의 특징 때문이었다.
마물의 음성이 은은히 울려 퍼졌다.
[믿을 수 없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의 등장에 마물은 화들짝 놀랐다.
마왕이 혀를 찼다.
“소환에 응해서는 안 되었어. 이곳은 내가 이미 자리를 폈거든.”
[아, 알았다. 계약을 취소하고 물러나마.]
“허허. 날 보고도 돌아가겠다고? 그래. 가서 일러바칠 것이냐?”
[아니다. 모른 척 하겠다. 절대 어디서도 발설하지 않겠어.]
당황한 마물을 보며 마왕의 시선이 착 가라앉았다.
“마물은 서로를 믿지 않아. 이건 상식 아니던가. 날 본 이상 곱게 보내줄 수 없지.”
마왕이 움직였다.
탁!
바닥이 있는 것처럼 가볍게 땅을 때리자 마물을 토하기 위해 공간을 확장하던 소환진이 갑자기 수축되기 시작했다.
[끄윽! 살려다오!]
마물의 애원은 통하지 않았다.
소환진이 압축되자 현 공간에 드러낸 상반신이 부풀어 올랐다.
[크악! 안돼!]
사정없이 흔들리던 외눈이 다급한 심정으로 자신의 주력 능력을 토했다.
전신에 뚫린 구멍들 사이로 촉수들이 마왕에게 향했다.
마왕은 귀찮다는 얼굴로 거치적거린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촉수들이 공중에서 폭발했다.
동시에 마물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무형의 기운이 마물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워하는 마물을 보며 루터가 눈을 부릅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루터의 눈에는 마왕이 그저 손을 휘저었을 뿐이다. 그런데 마물의 촉수가 터져 나갔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그 사이 마물이 최후를 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그 사이 응축된 마물의 몸이 터지면서 육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방어막을 펼쳐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파편을 피한 루터가 긴장된 눈으로 마왕을 바라봤다.
아네스가 폴짝 뛰어 올라 마왕에게 다가가 루터를 가리켰다.
“드래곤 로드의 심부름꾼입니다.”
“그래?”
전투력 2천만의 마물을 끝장낸 마왕이 루터를 위아래로 훑었다.
루터는 그의 시선에서 호기심을 읽었다.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적대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그래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네스는 마왕에게 루터를 가리키며 반감을 드러냈다.
“예의가 매우 없고 건방집니다. 제 경고를 무시하고 마물을 소환했습니다. 놈을 없애야 해요.”
마물까지 소환한 이상 도저히 봐줄 수 없다.
아네스의 적의에 긴장감이 조여 온다. 노인의 모습을 한 마왕은 손 사레를 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되었다. 너는 이만 물러가거라. 그와 단 둘이 할 얘기가 있어.”
아네스가 의문을 드러냈다.
“소멸 시키지 않으실 건가요?”
“그래. 궁금한 게 있다.”
마왕의 결정이 못마땅한지, 아네스가 씨근덕거렸다.
그녀가 재차 강조했다.
“저 놈은 위험해요.”
“알았다.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마왕이 가라는 듯 손짓하자, 아네스가 루터를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운이 따르지 않을 거야.”
경고한 아네스가 쌀쌀맞게 몸을 돌리더니 모습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둘만 남게 되자 루터는 마왕을 바라봤다. 마왕의 시선이 묘하다.
“인간이 9서클이 되다니 놀랍군.”
역시나 한눈에 정체를 간파했다.
루터가 물었다.
“마왕이 맞습니까?”
전투 측정이 불가능한 강력한 상대이다 보니 언행이 조심스러워졌다.
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때, 마왕으로 불렸지.”
“지금은?”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본질은 그대로이니 마왕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그가 지상으로 내려가며 손짓했다.
“따라 오너라.”
루터는 하강하는 마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내게 선택지 따위 없지.’
맞서 싸운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시간을 되돌리는 것 또한 지금 당장은 불필요해 보였다.
루터는 마왕을 만나고 싶었고 지금이 적기였다.
뒤따르며 바닥에 안착한 루터는 그를 뒤따랐다.
앞서 걷는 마왕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들어 까닥였다.
“가까이 오라. 긴히 할 얘기가 있다.”
옆으로 나란히 서자 마왕이 말했다.
“조르주 때문에 날 찾은 것이냐?”
루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에게 권능을 준 자가 당신입니까?”
“그렇다.”
“그런데 어째서 조르주는 스스로를 신이라 칭한 겁니까? 당신과 같이 강력한 자가 있는데도 조르주가 무엇을 믿고 스스로를 신이라 칭했는지 알 수 없군요.”
“조르주는 독립하려 했어. 그러자면 힘이 필요했고 때마침 네가 나타났지. 그래서 널 거느리려 한 것이다.”
“왜 당신에게서 독립하려 한 겁니까?”
“욕심 때문이지. 강해지고자 했으니까.”
“부하가 배신하는데 가만 놔두는 건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그들은 부하가 아니다.”
“그럼 권능은 왜 준 겁니까?”
“강해지려면 힘이 필요했으니까.”
루터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는군요.”
당최 무슨 소릴 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종속된 존재들도 아닌데 권능을 하사했고, 또 권능을 받았다고 충성하지도 않았다.
교단의 신을 자체하는 주체들과 마왕의 관계가 의문투성이였다.
마왕이 웃었다.
“전후 사정을 모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
“들어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이 이야기의 어원은 낙사노르부터 시작한다.”
마왕이 턱짓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순간 황무지 같던 빈 공간에 그림이 채워지듯 환영이 나타났다.
루터는 마왕이 일으킨 환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검은 유황이 피어오르는 붉은 대지에 수많은 괴물들이 괴성을 지르며 치고 박고 싸운다.
마왕이 소개했다.
“여기가 낙사노르다.”
“생각보다 단출하군요.”
“낙사노르의 세계는 마물이 전부야. 지금 보고 있는 대지와 하늘. 그리고 들끓는 유황 모두 쌓인 마물의 시체를 통해 만들어졌다. 원래는 완벽한 어둠이었어. 그 어둠 속에서 태어난 마물들이 서로를 먹어 치우면서 생겨난 것이지.”
루터는 묘한 눈으로 환영을 바라봤다. 그는 지금 마왕에게서 낙사노르의 어원을 보고 있었다.
“당신도 어둠에서 태어난 겁니까?”
“나 뿐만 아니라 이 세계 또한 마찬가지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의 태초는 바로 어둠에서 시작 되었다.”
루터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천지창조는 모두 어둠이 기원이라는 겁니까?”
“내 생각은 그래. 마물의 시체로 인해 땅이 생기고 바다가 나타났으며 그리고 하늘과 태양을 만들었다고 여기고 있다.”
“놀라운 이론이로군요.”
“이론이라고? 이 녀석아. 이게 가장 진실에 가까워.”
“이 세계는 룬어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부서진 세계에서만 국한 된 것이지. 다른 세계는 전혀 다른 종류의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가 구한 정령계가 룬어로 구성 되어 있더냐? 그리고 낙사노르 역시 룬어는 없지.”
지나친 말에 걸림돌이 있었다.
흠칫한 루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정령계와 접촉한 것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지켜보고 있었다.”
루터는 혀를 찼다.
“마왕이 아니라 숫제 신이었군. 그래서 모두 지켜봤습니까?”
“그래. 흥미로웠다. 네가 만든 이종족들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만들더군. 어설프지만 궁극은 같아. 결국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가 아니던가.”
칭찬이 영 달갑지 않았다.
루터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감시당하고 있었군.”
무력감이 밀려왔다.
‘9서클이 되면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 여겼건만.’
인간 중에 최고가 된다고 하여 그 외 존재들보다 낫다는 법은 없었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자신은 약하지 않았다.
드래곤에게 권속이 걸린 몬스터를 해방시켰으며, 에고가 깃든 생명체를 만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미증유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고 인간 전체와 싸우라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 했던가.
조금 전 소환한 마물은 물론이거니와 눈앞의 마왕을 보자니 자신이 얼마나 티끌 만 한 존재인지 새삼 깨달았다.
마왕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루터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관심 받는 걸 좋아하지 않나 보지?”
“허무해서 그렇습니다. 허무해서.”
“허무하다니, 무슨 소린가?”
“죽을힘을 다해 악착같이 내게 씌워진 굴레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이제 와 보니 여전히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군요.”
“음. 말 못할 사정이 있나보군.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괜찮다면 이야기를 마저 해도 될까?”
“당신은 나보다 더 강하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반응이 시원찮군. 앞으로 싸울 적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좌절해선 곤란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터가 묘한 계획이 떠올렸다.
‘그냥 과거로 돌아가 모든 걸 잊고 지낼까?’
원치 않는 싸움은 죽기보다 싫었다. 원래 마왕을 만나려는 동기도 그가 자신을 적대하는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 그는 자신에게 적의는커녕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혈전을 권유하고 있었다.
뭐가 되었건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질색이다.
루터의 머릿속에 갈등이 떠올랐다.
시간을 돌려 과거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현재를 순응하느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루터는 자신이 돌아가면 그 동안 이뤄왔던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키아라, 칼루아. 그리고 이종족과 정령들.
모두 인연이 깊었고, 무책임하게 저버릴 순 없는 노릇이다.
결국 결론은 하나다.
마왕과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루터가 물었다.
“앞으로 싸울 적들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뻔하지 않나. 당연히 낙사노르지.”
“낙사노르?”
루터는 마왕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려 한다 생각했다.
“마왕인 당신조차 낙사노르에서 벗어났는데, 어째서 다시 낙사노르의 마물들과 싸우려 하는 겁니까?”
“낙사노르를 없애지 않으면 이 세계의 평화는 절대 찾아오지 않으니까.”
루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왕의 입에서 평화가 나오다니 이해 못 할 일이다.
콕스가 말하길, 교단을 통해 전쟁을 일으켜 시체들을 재물 삼아 힘을 키운다고 했다.
힘을 키우려면 전쟁이 필요하니 평화와는 거리가 먼 얘기다.
그런데 어째서 그의 입에서 평화란 말이 나오는 걸까?
어리둥절해 하는 루터에게 마왕이 씩 웃어 보였다.
“지금부터 잘 새겨 듣게나. 내가 어째서 낙사노르를 소멸 시키려 하는지, 그리고 그러려면 왜 자네가 필요한지 말이야.”
마왕의 입에서 낙사노르에 대한 진실에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루터는 그가 하는 말을 자세히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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