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수도
콕스는 루터의 제안에 쓴웃음만 지었다.
그리고는 맥주잔을 보고 왁자지껄한 주점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인간들은 흥미로워. 마치 꺼져가는 불빛 같아. 죽어가면서도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온갖 빛을 내뿜지.”
루터는 그 말에 단념했다.
“현재가 마음에 드나 보군.”
“똑같은 삶이 없고 결말을 모르는 인간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네. 난 그래서 지금에 만족해. 지금은 변화할 생각이 없어.”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현재가 마음에 들면 안주하기 마련이다.
현재를 즐기고 있는 콕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을 것 같다.
“자네의 생각을 존중하지.”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다.
루터는 맥주잔을 들어 올려 건배를 청했다.
“새 친구가 생긴 것으로 만족해야겠군.”
“가끔은 이렇게 만나 술친구나 하자고.”
“그것도 좋겠지.”
잔을 부딪친 둘은 술을 마시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내성으로 돌아가고 헤어질 시간이었다.
콕스가 루터에게 조언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게 좋아.”
“욕심?”
“그래. 마왕과 적대해서 좋을 게 없어. 인간은 그의 영역이다. 가끔은 지배받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지.”
“충고 고맙군.”
“표정을 보아하니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라는 것 같군. 왜 사서 고생하려고 하지? 지금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아니. 어쩌면 편한 일이지. 우린 자네가 말하는 그 굴레에 완전히 벗어나 있어. 마음만 먹으면 편하게 살 수 있단 말일세. 그런데 왜 굳이 마왕을 적대하려는 건가?”
콕스는 궁금했다.
어차피 세상은 항상 누군가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마왕의 지배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진실을 감추고 교단을 이용하여 재물을 받을 뿐, 그 이상으로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일이 없다.
루터가 말했다.
“일부러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나는 일부러 마왕과 적대 할 생각이 없다.”
“그런데?”
“나는 지난 과거에 지긋지긋하게 누군가의 간섭을 받으며 원치 않는 일을 너무 많이 벌여왔다. 이제 남이 시킨 일을 하고 싶지 않아.”
콕스가 웃었다.
“어느 누구도 지배받고 싶어 하지 않지. 하지만 우리들은 예외야.”
“과연 그럴까? 콕스. 힘을 가진 자는 언젠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적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나는 그 사실을 알기에 준비할 생각이다.”
“흥미로운 이론이군. 그래서 맞서 싸울 자신은 있나?”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를 짐작하기는 불가능하지만,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난 이미 운명을 거스른 존재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릴까.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는지 인상 쓰는 콕스에게 루터가 작별을 전했다.
“또 보자.”
루터가 몸을 돌려 제 갈 길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콕스가 턱을 쓸었다.
“정말 흥미로운 친구로군.”
인간이란 늘 그렇듯 결말을 알 수 없고 궁금하게 만들지만 루터의 미래는 정말로 흥미진진했다.
“뭔가 일을 낼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목적이건 간에 신념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기 마련이다.
콕스는 과연 루터가 어떤 미래를 펼쳐갈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내성의 아네스 지부 신전이 시끌벅적해졌다.
그토록 기다리던 라피드 대사제가 당도한 것이다.
테베 사제의 배려로 성기사가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루터의 별채에 방문했다.
헌데 성기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뭔가 일이 발생한 모양이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테베 사제님의 대사제 승급이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저런.”
애써 안타까운 척을 한 루터가 재차 물었다.
“라피드 대사제께서 말씀하셨나?”
“예. 무척이나 상심하셔 하시더군요.”
“그렇군. 알겠네.”
“지금 바로 신전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러지.”
“알겠습니다.”
나갈 채비를 갖춘 루터는 곧장 신전으로 향했다.
그런데 신전의 분위기는 예상대로였다.
루터가 나타나자 견습 사제들이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이다.
사정을 알고 있던 루터가 견습 사제 하나를 붙잡고 모른 척 물었다.
“신전 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테베 사제님의 대사제 승급이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이유가 뭔가?”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래서 분위기가 뒤숭숭합니다.”
그토록 자신하던 테베 사제가 어째서 대사제가 되지 못한 걸까.
의아했지만 그도 잠시였다.
“대사제께선 어디 계신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견습 사제는 곧장 기도실로 루터를 안내했다.
대사제가 나타났으니 신도가 몰렸다.
루터는 기도문을 외우는 대사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테베 사제 못지않게 늙수그레한 인물이었다. 온화한 얼굴로 기도를 마친 대사제가 신도들에게 축복을 진행했다.
루터가 견습 사제에게 물었다.
“테베 사제께선?”
“피곤하다 하셔서 쉬고 계십니다만…….”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대사제 승급 취소 소식에 충격을 받아 두문불출하는 모양이다.
루터는 할 수 없이 직접 대사제를 대면했다.
축복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대사제를 가로막은 루터가 인사를 건넸다.
“대사제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네는 누군가?”
“저는 징벌 사제라고 합니다. 신분상 이름을 밝힐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징벌 사제?”
순간 대사제의 눈이 빛났다.
매의 시선으로 루터를 보던 대사제가 그에게 손짓했다.
“따라오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루터는 잠자코 그를 뒤따랐다.
허락이 없으면 접견이 불가능한 대사제와의 독대가 이뤄졌다.
아무도 없는 밀실에서 마주 앉은 라피드 대사제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무척 젊군.”
징벌 사제의 권한은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치기 어린 젊은 사제들보다 경험이 많고 연륜이 깊은 노회한 사제가 대다수다.
대사제의 눈에는 특별한 사례처럼 보였다.
루터는 담담히 말했다.
“운이 좋아 성하께서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징벌 사제는 교단의 성하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 루터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고 그래서 언급했다.
대사제가 깊이 물었다.
“출신은 어디고 어떻게 징벌 사제로 선택되었으며 이제까지 축출한 명단은 누군가?”
루터는 대사제의 질문에서 그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었다.
“절 의심하십니까?”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있네.”
루터는 대답 대신 라피드 대사제와 눈을 마주했다.
시선이 마주치고 루터의 시선이 깊어졌다.
대사제의 눈에 의문이 들어섰다.
“왜 대답을 못 하나?”
말은 않고 쳐다보기만 한다.
의심이 깊어지려는 찰나 루터가 대사제 주변의 룬어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콕스가 사용한 수법이었는데, 주변의 룬어에 영향을 주면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행동이 발생하게 된다.
콕스는 젤라딘의 움직임을 통제했지만, 자신은 정신을 건드렸다.
신뢰를 주는 정신계 룬어를 작용시켰다. 그와 함께 루터가 말했다.
“고아로 태어나 신전에 맡겨졌습니다. 그 이후에는…….”
거짓으로 점철된 일대기가 펼쳐졌다. 잠시 후, 대사제의 눈에 믿음이 떠올랐다.
“그랬군. 그랬어.”
별 것 없는 얘기인데, 허황되지 않고 진실 되게 들려온다.
루터의 말을 철썩 같이 믿던 대사제가 용건을 꺼냈다.
“나를 도와주어야겠어.”
대사제가 처음 본 사람에게, 그것도 징벌 사제에게 도움을 청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허나 그는 루터에 의해 믿음을 형성하고 제 사람이라고 여겼다.
대사제는 스스로도 모르게 루터에 대한 신뢰를 이미 형성한 상태였다.
그래서 부탁했다.
루터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나를 추출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있어. 그들을 제거해줄 수 있겠나?”
“누굽니까?”
“데르번 대사제와 그 일당들일세. 놈들이 내 약점을 잡았고 조만간 대회의에서 그 약점을 거론하게 될 거야. 놈들이 발설하지 못하게 막아주게.”
약점을 잡혔고 세력도 밀린다.
그 때문에 곧 대사제가 될 예정이었던 테베를 끌어 올리지 못했다.
라피드 대사제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위협을 느꼈고 그래서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그런데 마침 믿음직스러운 징벌 사제가 눈앞에 있다.
그는 루터를 이용해 자신을 위협하는 정적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루터는 선선히 받아들였지만 공짜는 아니었다.
“좋습니다. 다만 필요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
“중앙 신전의 내부를 자유로이 드나들기 위해서 라피드 대사제님의 권한이 있는 출입증이 필요합니다.”
대사제의 사정을 듣자니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원래는 그의 신분을 탈취해 행세하고 다닐 생각이었는데 대사제는 보는 눈이 많다.
그러니 지금의 위치에서 중앙 신전을 완전히 탐색할 수 있는 출입증만 얻으면 자신에게 오히려 이득이다.
대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적을 제거할 수 있으면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은 다 사용하게.”
말을 하면서 그가 자신의 반지를 내밀었다.
“대리자에게 주어지는 반지일세. 현재는 공석이니 자네가 마음껏 사용하여 돌려주게.”
대리자의 반지는 루터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뜻밖의 수확물을 얻자 루터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알겠습니다.”
“자네를 믿네.”
라피드 대사제는 루터의 계략을 꿈에도 모르고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었다.
허나 루터는 그의 믿음을 저버릴 생각이었다.
그는 대사제가 부탁하는 일보다 중앙 신전의 내부를 마음껏 들여다보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돌아온 루터를 맞이한 것은 콕스였다.
“어딜 자꾸 돌아다니나? 무척 바쁜 모양이야?”
“그러는 자네는 한가한 모양이군.”
“한가한 게 아니라 불벼락을 피해 왔네. 콜론 후작이 보기에는 넉넉해 보여도 한 번 꼭지 돌면 걷잡을 수 없거든.”
“드래곤이 인간의 눈치를 보나?”
“지금은 행세를 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래야지. 졸지에 그 마물 친구가 고생이야. 콜론 후작이 제 자식을 제자로 삼아달라고 엉겨 붙느라 골치깨나 썩고 있어.”
낄낄거리던 그가 흥미로운 눈으로 물었다.
“이제 뭘 할 생각인가?”
“떠나야지.”
“뭐? 떠난다고? 갑자기?”
“목적을 달성했어. 이제 중앙 신전에 갈 생각이다.”
“흠. 뭔지는 몰라도 일 처리가 빠르군. 지금 바로 떠날 생각인가?”
“그래야지.”
“정들자마자 이별이군.”
아쉬워하는 그에게 루터가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어떻게 내 정체를 파악한 거지?”
“드래곤은 룬어를 통해 상대를 조종하지. 하지만 자네에겐 그게 불가능해. 그래서 알아봤지.”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루터에게 콕스가 통신구를 꺼내었다.
“종종 연락하게.”
“그러지.”
루터는 콕스와 손을 맞잡았다.
드래곤 콕스와의 첫 번째 만남은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출발 채비를 알리고 준비를 시작했다. 칼루아 등은 외성 구경을 톡톡히 했는지 제법 후련한 모습이었고 악령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콕스의 말대로 콜론 후작에게 시달려서 제법 불쾌했나 보다.
준비를 마친 바르코즈까지 당도하니 떠날 준비를 마쳤다.
콜론 후작은 떠난다는 오스틴을 붙잡지 못했다.
황명이 내려왔다고 하니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루터 일행은 콜론 후작 령을 떠나 수도로 이동했다.
#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