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악령2
악령은 흡족해했다.
[기꺼이 받아들이지.]
오스틴의 상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껍데기일지라도 육신이면 된다.
신체가 있어야 능력과 행동의 제약이 사라진다.
루터는 키아라에게 손짓했다.
“키아라. 이제 그만하자.”
멀리 있어도 못 들을 리 없는 키아라였다. 쥐 잡듯이 버서커 오스틴을 몰아붙이던 키아라가 행동을 멈췄다.
“크르르릉!”
그러자 오스틴이 흉성을 드러냈다.
지금껏 내내 맞기만 했던 것이 억울한지 두 눈에 분노가 가득했다.
루터가 악령에게 턱짓했다.
“가라.”
[흐흐. 드디어 육체를 얻는구나.]
악령이 기뻐하며 오스틴을 에워쌌다. 투지를 끌어 올려 분노를 터트리려던 오스틴이 멈칫했다.
“크아아악!”
악령이 오스틴을 감싸자 돌연 비명성이 터졌다.
그와 함께 오스틴의 두 눈이 시커멓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타오른 눈을 통해 검은 연기가 스며들었다.
공동 내의 모든 이들이 숨도 못 쉬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오스틴의 신변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옷 한 벌 없는 실오라기 몸 위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악령이 두 눈을 떴다. 동공 없는 시커먼 눈이 주위를 쓸었다.
양팔을 들어 손을 쥐락펴락하던 악령이 깊게 숨을 내쉬더니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정말 좋군.”
내쉬는 목소리가 전과 달리 쇳소리처럼 갈라져 있었다.
돌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놈은 이제 오스틴이 아니다.”
짧게 대답한 루터가 오스틴의 껍질을 쓴 악령에게 말했다.
“이제 일 할 시간이다.”
만끽하던 악령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서슬 퍼런 미소가 떠올랐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돌연 악령의 몸이 바닥에 꺼지더니 순식간에 루터의 근처에 나타났다.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악령이 물었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루터는 바닥에 꿇은 채, 벌벌 떠는 산적과 귀족들을 가리켰다.
“내 동료들이 저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어 한다.”
고문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악령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악령은 영혼을 삼킨다.
삼켜진 영혼은 악령에게 귀속되어 영원히 고통받는다.
루터가 말하는 악령의 할 일이란, 자신을 대신하여 적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었다.
악령이 말했다.
“나 좋은 일인데, 얼마든지 하지.”
그가 인질들 앞에 섰다.
모두가 벌벌 떨었다.
루터는 몰랐지만, 수없이 영혼을 잡아먹은 악령은 존재 자체가 공포였다.
본능적으로 이는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으아아악!”
견디지 못한 산적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박찼다.
악령이 웃었다.
“흐흐. 어디 가나.”
그가 혀를 내밀었다.
채찍처럼 뻗어 나간 혓바닥이 산적을 옭아맸다.
그 기이한 모습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으아아악!”
“저게 뭐야!”
“맙소사!”
충격과 경악이 울려 퍼진다.
어느새 루터의 옆에 다가온 키아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길어진 붉은 혓바닥이 밧줄처럼 산척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당기기 시작했는데, 산적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저리 가! 저리 가!”
비명을 지르는 순식간에 악령의 근처에 다다랐다.
길어진 혓바닥도 놀라웠는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악령이 입을 벌리자 뱀처럼 턱이 늘어졌다.
그리고는 산채로 산적으로 삼키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주변이 비명성이다.
루터가 얼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
“뭐 하는 거냐?”
“웁웁웁!”
먹느라 악령의 말이 묻혔다.
잠시 후, 꿀꺽 삼킨 그가 웃었다.
“뭐하긴. 일 하는 중이지.”
“굳이 그렇게 혐오스럽게 해야 하나?”
“나는 공포를 먹고 산다. 영혼이 내지르는 절규와 고통이 내게는 힘의 원천이지.”
상대가 공포를 느끼면 느낄수록 영혼의 힘을 더욱더 앗아갈 수 있다.
루터가 물었다.
“그래서. 잡아먹은 대상은 어떻게 되는 거냐?”
“보여주지.”
악령이 자신의 배를 문질렀다.
환영이 나타나면서 산적의 모습이 드러났다.
가시가 박힌 식물 줄기에 엉켜 있었는데, 산적의 몸에 있는 구멍이라는 구멍에는 전부 박혀 있었다.
부릅뜬 산적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루터가 물었다.
“언제까지 이어지지?”
악령이 으쓱였다.
“내가 소멸할 때까지.”
“죽지 않는 이상 영원하다는 말이로군.”
“말하지 않았는데, 나는 불멸의 존재다.”
악령은 울부짖는 산적의 영혼을 보여주며 루터의 흥미를 이끌었다.
“어떤가? 만족하나?”
“그래. 너는 쓸모 있구나.”
“그대의 마음에 들었다니 영광이로군. 그렇다면 앞으로 잘 모시도록 하지.”
태도와 달리 대답은 극진했다.
‘주제 파악은 할 줄 아는군.’
혹여나 성가시게 굴면 경고를 해줄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굽힌다.
눈치가 있으니 걱정 없다.
루터가 인질들을 가리켰다.
“처리해라.”
“그러지.”
악령이 움직였다.
목청껏 비명 지르던 인질들이 다가오는 악령에 달아나기 시작했다.
돌켄 등은 굳이 잡지 않았다.
이들은 아직도 산적을 잡아먹은 악령의 모습에 몸이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루터에게 짓눌려도 전투력은 키아라보다 나았다.
그런 악령에게 도망갈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악령의 몸이 변형했다.
이번에는 팔, 다리가 쭉 길어졌다.
악령이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이리 오려무나.”
긴 혀를 날름거리며 거미처럼 움직이니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귀족 등의 몸에서 똥, 오줌이 흘러나왔다.
공포에 젖은 그들을 악령이 차례차례 잡아먹기 시작했다.
“우웩!”
창백해진 엘레나가 구토를 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모두가 못 볼 꼴 봤다는 반응이다.
바르코즈가 루터에게 다가오더니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제가 실수를 저지르거든 꼭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뜻이냐?”
“저는 저들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울부짖으며 악령에게 잡아먹히는 귀족이 있었다.
바르코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터가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너는 잘하고 있다. 그리고 설령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저런 꼴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안심한 바르코즈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작업이 끝나고 기절하듯 잠든 여자들을 수습했다.
칼루아가 물었다.
“마스터. 이 여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엿 본 기억대로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 주어야지.”
“돌아갈 곳이 없는 여자들은 어떻게 하죠?”
“바르코즈에게 맡기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세상 물정 잘 아는 바르코즈라면 여자들을 잘 챙겨 줄 것이다.
산적의 본거지에는 제법 귀금속 등이 많았다. 전부 챙기고 돌아가는 동안 루터가 악령에게 지시했다.
“앞으로 그 육신의 역할을 해주어야겠다.”
“오스틴 말이군.”
원래 육신의 영혼을 삼켰으니 기억과 정체성을 파악한 악령이다.
“그래. 앞으로 쓸모가 많을 거다.”
“이 녀석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나흘 후에 콜론 후작의 작위 승계식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콜론 후작?”
루터는 콜론 후작을 몰랐다.
그가 바르코즈를 쳐다봤다.
바르코즈가 설명했다.
“여기서 이틀 거리에 있는 영지입니다. 원래 작위를 유지하던 후작이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가 작위를 이어받는다고 합니다.”
“유명한 잔가?”
“황제가 총애하는 귀족들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겁니다. 신분도 높고 권력도 막강합니다.”
“그래?”
고민하던 루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들렀다 가자.”
“알겠습니다.”
권력이 높은 귀족의 승계식이니 많은 유명 인사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중에는 대사제도 있겠지.’
권력이 높은 귀족의 승계식이니 만큼 교단에서도 신경을 써 대사제를 보낼 것이다.
루터는 대사제와 마주하여 이용하거나 오스틴에게 그랬던 것처럼 죽여 없앤 뒤, 행세를 할 생각이었다.
수레에 탄 여자들은 귀족들이 벗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남자 옷이었지만 마땅한 게 없다.
여자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지만 그래도 처음 맞닥뜨렸을 때와는 달랐다.
루터는 그들의 기억을 조작했다.
산적에 납치당한 것까지는 사실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자신들이 구한 것으로 바꾸었다.
시간이 흐르자 여자들의 표정이 많이 좋아졌다.
엘레나나 칼루아가 위로해주니 간간히 웃음도 피어 나왔다.
악령은 구출한 여자들을 한 차례 쳐다보다 루터에게 말했다.
“이유가 뭐지?”
“뭐가?”
“어째서 저런 약해빠진 것들을 살려두는 것이냐?”
전부터 그랬다.
그의 주변은 항상 약자들로 가득했다.
키아라가 악령의 물음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악령은 다른 존재의 감정을 읽는 데 도가 텄다.
그가 키아라를 향해 히죽였다.
“내 말이 기분 나쁘다면 사과하지.”
여정에 함께하다 보니 루터가 누굴 가장 아끼는지 아는 악령이었다.
그러니 알아서 주의했다.
키아라가 말했다.
“루터는 약하다고 죽이지 않아.”
“내 말에 오해가 있었군. 그런 뜻이 아니라 쓸데없는 짓을 뭐 하러 자처 하냐는 것이다.”
악령이 삼삼오오 모인 여자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들은 쓸모가 없고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약하기까지 하니 보살필 이유가 없어. 차라리 내 먹이로 주지 않겠나?”
악령의 제안에 키아라가 발끈했다.
“쓸모없다는 이유로 내버려 두지 않아. 생명을 구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아니다. 생명을 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스스로 살아남지 않으면 도태된다. 도태된 생명은 먹이가 되는 게 차라리 쓸모 있는 일이지.”
키아라는 도저히 악령의 사고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제정신이 아니구나?”
“흐흐흐. 칭찬 고맙군.”
“루터. 쟤. 마음에 안 들어.”
키아라의 노골적인 불만에 루터가 악령을 쳐다봤다.
악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해해 줄줄 알았는데, 몰라보다니 서운하군.”
“키아라. 악령은 우리와 다르다.”
변론하는 루터의 반응에 불만스러워 하던 키아라가 악령에게 경고했다.
“한 번만 더 이상한 소릴 하면 혼날 줄 알아.”
“어련히 모시지.”
“흥!”
콧방귀를 뀐 키아라가 말머리를 돌려 수레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악령이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다.
루터가 말했다.
“악령. 그녀를 자극하지 마라.”
“내가 틀린 소릴 했나?”
악령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 사이 일행은 콜론 후작가의 영지로 진입했다.
관도의 성문을 지키는 기사들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방문한 이가 다름 아닌 소드 마스터 오스틴이었다.
기사쯤 되면 소드 마스터의 용모는 다 꿰고 다닌다.
게다가 상대는 황실 근위 대장이었다. 당연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 경의가 떠오르더니 이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소드 마스터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극진한 인사에 악령이 루터를 쳐다봤다.
“혹시 이것 때문에 이 껍데기를 쓰고 다니라는 건 아니겠지?”
루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눈총을 주자 악령이 제 일을 했다.
“지나간다. 비켜라.”
“살펴 가십시오.”
기사가 자리를 비키고 일행은 어떠한 검문도 없이 곧장 통과했다.
악령이 히죽였다.
“당신은 참 알 수 없는 존재로군. 막강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제대로 사용하질 않아. 힘은 쓰라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당신과 같은 힘을 가졌다면 이 세상을 지배했을 것이다.”
“너는 내가 아니다.”
“만약에 하는 소리야. 한 가지 묻지. 대체 목적이 뭐지?”
“무슨 목적?”
“추구하는 힘에는 방향성이 있기 마련이다. 대체 무엇을 바라기에 그토록 강력한 힘을 얻고도 조용히 지내는 것이냐?”
악령은 루터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닌 힘으로만 볼 때, 자신의 원래 세계에 있던 드래곤보다 강력했다.
그런데 그 힘을 가지고 무언가를 도모하지 않았다.
얌전했고 필요 이상으로 힘을 쓰지 않았다.
“왜 이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 거지?”
그가 가진 힘이라면 이 부서진 세계는 얼마든 차지할 수 있었다.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다.
악령은 루터가 나태하다 여겼다.
“할 수 있으면 하는 게 맞다. 그러니 이 세계를 지배하자. 내가 도와주지.”
루터는 귀찮은 얼굴로 악령을 쳐다봤다. 육신을 줬더니 입이 풀렸다.
게다가 쓸데없는 소리만 나불대고 있다.
그가 일침을 가했다.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행동거지나 잘 챙겨라.”
신경질적인 반응에 악령의 입이 쏙 들어갔다. 입이 풀렸어도 정신은 풀리지 않았다.
악령은 루터를 두려워했고, 그래서 경고를 흘리지 않았다.
그가 입을 닫자 여정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콜론 후작가의 본성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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