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자신감3
입구로 가기 전, 루터는 일행에게 미리 알렸다.
“별로 좋은 광경은 아닐 거다.”
엘레나가 인상을 그렸다.
입구 안쪽에서 들려오는 신음만으로도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갔다.
칼루아가 어깨를 걷어붙였다.
“마스터. 저도 싸울래요.”
키아라 역시 이미 검을 뽑은 상태였다. 루터가 말했다.
“보고 놀라지 마라.”
루터는 이미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약에 취한 벌거벗은 여인들을 성 노리개로 삼고 있었다.
루터가 키아라를 쳐다봤다.
“좋은 공부가 될 거다.”
“공부?”
“동굴 안에 있는 능력자 중에 소드 마스터도 있다.”
키아라가 눈을 빛냈다.
“잘됐네.”
“그래. 이참에 네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다.”
같은 수준의 능력자를 처음 접하는 키아라에게 자신의 실력을 검증하는 길이 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키아라가 먼저 움직였다. 칼루아와 케인 등이 뒤따랐다.
은밀히, 그러나 재촉하여 가는 그들과 다르게 루터와 바르코즈는 천천히 움직였다.
굳이 급할 필요가 없었다.
키아라가 있고 칼루아가 있다.
둘이 힘을 합치면 동굴 안쪽의 이들이 전부 합세해도 어림없다.
루터는 상황을 낙관적으로 봤다.
‘꼼짝없이 당하겠지.’
쾌락에 빠져 정신없는 가운데였다.
비슷한 수준의 강자들 사이에서는 잠깐의 방심은 죽음이다.
그 사이 소란이 일어났다.
“적이다!”
“끄아아악!”
싸움이 시작되고 병장기가 부딪히기 시작했다. 비명 소리를 들으며 루터가 중얼거렸다.
“성질 급하군.”
최소한의 작전이라도 세울 줄 알았더니, 입구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전투다.
루터는 바르코즈와 대화를 나눴다.
“산적들이 이런 일도 하나 보지?”
약탈뿐만 아니라 매춘도 겸했다.
바르코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있으니 가게를 차리는 법이지요. 그런데 이런 곳에서 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쾌락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안 가린다지만 하필이면 붉은 어금니와 작당을 하다니. 정말 인간의 욕망은 무시무시합니다.”
귀족들 입장에선 사회에 혼란을 끼치는 산적들은 토벌 대상이다.
당장 죽여도 시원찮을 판이다.
헌데 그들이 제공하는 은밀한 매춘에 어울리고 있었다.
입구에서 죽은 산적들의 영혼을 삼키고 찾아온 악령이 말했다.
[인간은 하나같이 욕망의 덩어리군.]
“마음에 드나?”
[물론이지. 앞으로 식량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겠어.]
영혼이 없으면 말라 죽는 악령이었다.
그런데 욕망으로 점철된 인간의 영혼을 거듭 삼키자 절로 기분이 좋았다.
동굴 통로를 지나는 와중에 마침내 넓은 공동에 직면했다.
설산의 공동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법 컸다.
마른 흙바닥에 알몸의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죽고 있다.
보자니 우스꽝스럽다.
헌데 웃을 일이 아니었다.
“음.”
바르코즈는 참담한 광경에 신음을 흘렸다.
성 노리개로 이용당한 여자들의 상태가 심각했다.
모두 잔인한 고문에 당한 듯했다.
불에 타거나 신체 일부분이 훼손되었다.
심지어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여인도 있었다.
귀족들은 대부분 성도착증이었다.
공동 내의 여자들은 그들의 괴이하고 악랄한 성벽의 희생양이었다.
바르코즈는 유연하고 이성적이다.
그런 그가 참담한 공동 내의 상황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끔찍하군요.”
“어쩐지 싸움이 일찍 열리더라니.”
일행이 이 꼴을 보고 가만히 참을 리가 없었다.
루터는 전투 현장을 훑었다.
상황은 예상보다 팽팽했다.
아무리 방심했어도 무기는 지참했다. 숫자도 훨씬 많았다.
여자들을 제외하면 산적까지 포함하여 근 백여 명은 되었다.
걔 중에는 소드 마스터도 있었다.
루터는 과거의 소드 마스터를 모두 알았다.
키아라와 부딪히는 자는 바스코 제국의 황실근위대장인 오스틴 후작이었다.
루터는 의외의 장소에서 오스틴 후작을 맞닥뜨리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놀랍군.’
오스틴 후작의 존재는 의외였다.
그는 자신의 손에 죽은 블록스, 밀러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황실의 근위대장인 만큼, 모범적이고 기사도의 표상으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성도착증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옷을 미처 챙겨 입지 못하고 아랫도리를 덜렁거리며 싸우는 폼이 한심하다.
루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게 아니다.
싸움이 왜 길어지나 했더니, 칼루아 때문이었다.
전투보다 치료에 집중했다.
공격을 하지 않으니 대상이 돌켄 등에게 몰렸고, 그들은 다수를 한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수준 차이는 분명했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익스퍼트 중급을 상대할 능력자는 오스틴 후작 외엔 아무도 없었다.
몰리던 전황에 반전이 나타났다.
칼루아가 하는 양을 보던 알몸의 늙은 노인이 돌연 늘어진 여자를 들어 올려 뒤를 점했다.
“물러나지 않으면 이년은 죽는다!”
노인의 경고성에 엘레나가 주춤했다.
전황이 소강상태로 돌아갔다.
오스틴 후작도 상황을 보더니 조금 전까지 자신의 성 노리개였던 여자를 들어 올렸다.
여자의 상태는 참혹했다.
팔이 잘렸고, 사타구니는 피로 범벅이었다.
그가 근엄히 말했다.
“물러나라
키아라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당장에라도 오스틴 후작을 끝장내고 싶었지만 그는 영악했다.
키아라의 손속이 멈추었다.
잠깐의 부딪힘에 공동의 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악령이 군침을 삼켰다.
사방이 먹을 것 천지였다.
노인. 팔레인 백작이 소리쳤다.
“네 놈은 어디서 나타난 누구냐! 우리들이 누군지 아느냐? 감히 미치지 않고서야 우릴 건드려? 죽고 싶은 게냐?”
여자를 방패막이 삼은 처지였지만, 신분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있었다.
일행은 씨근덕거리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쳐 돌켄조차 웃음기가 싹 가셔 있었다.
일행을 관찰하던 오스틴 후작이 루터를 발견했다.
그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루터의 의복은 아네스 사제의 것이었다.
제국은 아네스 교단과 대대로 긴밀한 관계였다.
그가 루터를 향해 말했다.
“사제. 도와주시오.”
처음엔 누굴 말하나 싶었다.
루터는 자신을 쳐다보는 오스틴의 시선에 코웃음을 쳤다.
“나를 보고 말하는 것이냐?”
“그렇소. 아마도 날 노리는 것을 보아 제국의 적인 듯하오.”
제국의 적은 아네스 교단의 적이기도 하다.
오스틴 후작의 넘겨짚는 짐작은 무의미했다.
애당초 루터는 사제가 아니다.
루터가 다가가 키아라의 옆에 섰다.
그가 조언했다.
“인질이 있다 하더라도 공격을 멈춰선 안 된다. 오히려 더 강하게 압박해라. 그러면 인질을 이용해 상황을 모면하려 할 것이다. 구하려면 차라리 그 방법이 낫다.”
루터는 키아라의 마음을 알았다.
하지만 진정으로 상대를 구하려면 오히려 인질을 잡은 적을 더욱더 압박해야 한다.
그래야 여유가 사라져 수작을 부리지 못한다.
루터는 경청하는 키아라에게 모범을 보였다.
“예를 들면 이렇게 하는 거다.”
루터는 오스틴 후작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손에서 뾰족한 고드름이 나타나 오스틴의 눈을 노렸다.
놀란 오스틴이 인질을 앞세우다 안 되겠다 싶어 자리를 피했다.
고드름은 인질이 된 여자의 앞에서 멈추었다.
루터가 오스틴을 가리켰다.
“여유를 주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인질이 있다는 것은 일면 유리해 보여도 운신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제 목숨 아까운 줄 알면 인질 잡을 생각을 안 한다.”
상대에게 불리하다 싶을 때에 가장 좋은 방법은 도망치는 것이다.
인질을 잡으면 시간은 끌어도 목숨은 장담할 수 없다.
“승기를 잡아도 절대 방심하지 마라. 방금처럼 늘어지는 상황이 오면 곤란하다. 전투는 가능하면 빠르게 끝내는 게 좋다.”
키아라는 루터의 조언을 가슴에 새겼다.
“명심할게.”
“너희들도 새겨들어라.”
루터는 돌켄 등에게도 말했다.
그의 목소리를 못 들을 리가 없었던 일행은 스스로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들은 곧장 아쉬움을 드러냈다.
“저희가 너무 급했습니다.”
“침착하게 싸웠어야 했는데.”
최소한 여자들을 구 할 생각이었다면 전투에서 거리를 벌려 두었어야 했다. 여자들을 치료하던 칼루아가 다가왔다.
“마스터. 상태가 심각해요.”
루터는 대답 대신 칼루아의 생각을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느냐?”
“치료해 주세요.”
“알았다.”
루터는 여자를 치료하며 칼루아에게 조언했다.
“오늘 일을 결코 잊지 마라.”
칼루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네. 잊지 않을게요.”
칼루아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똑똑히 조우했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던 오스틴 후작이 루터를 노려보았다.
“너. 사제가 아니군.”
하는 양을 보자니 결코 사제일 수가 없었다.
루터는 오스틴이 한심했다.
“그 간의 명성을 모조리 허물어트리는구나. 스스로 부끄러운 줄은 아나?”
잠시 입술을 깨문 그가 나직이 말했다.
“이 일을 퍼트려도 내 명성에 금 가는 일은 없을 거다.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그럴 생각 없다. 어차피 죽일 테니까.”
루터는 손을 뻗었다.
“으악!”
오스틴과 마찬가지로 인질을 잡고 있던 노인이 비명을 질렀다.
공중에 떠 허우적거리던 노인이 이내 루터의 손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그가 힘을 주었다.
콰드득!
움켜쥔 손이 두개골을 부쉈다.
뇌수의 파편이 널브러지며 노인이 그대로 절명했다.
오스틴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루터는 그를 눈여겨봤다.
시선이 자꾸 입구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의를 상실했는지 도망갈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할 순 없지.’
키아라의 호적수를 그냥 보낼 리 없는 루터였다.
그가 제안했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네가 보는 출구는 내 사정권이다.”
오스틴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다고 희망을 없애진 않았다.
“살 기회를 주마.”
“무슨 뜻이냐?”
루터가 키아라를 가리켰다.
“너도 알다시피 소드 마스터다. 그리고 아직은 경험이 필요하지. 싸워 이기면 대가로 살려주마. 하지만 패하면 알다시피 죽음이다. 어찌하겠나?”
오스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날 훈련용으로 쓰겠다는 말인가?”
“그래서? 불만이면 도망가 보아라. 단언컨대, 그나마 살 기회는 여기뿐일 것이란 걸 뼈저리게 겪게 될 것이다.”
루터는 일부러 노인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한 수를 보였다.
오스틴은 마법을 쓰지도 않은 채, 노인을 죽인 루터의 수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경계심이 더더욱 일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오스틴이 요청했다.
“대련을 하려면 격식을 갖춰야지. 의복을 차려입을 시간을 달라.”
루터는 비웃었다.
“네 놈이 했던 짓을 곱씹어 보면 격식을 차릴 상황이 아니란 걸 스스로 알지 않나?”
“알몸으로 싸우긴 처음이군.”
부끄럽지만 죽는 것보단 낫다.
오스틴이 진중한 동작으로 키아라를 향해 검을 겨눴다.
루터는 돌켄 등에게 말했다.
“뭐 하고 있나? 빨리 죽여라.”
누굴 말하는지 뻔했다.
돌켄 등이 움직이고 오스틴과 키아라가 부딪혔다.
쾅! 쾅!
공동이 크게 흔들리고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질을 잡아!”
전투가 재개되자 사정의 불리함에 적들이 여자들을 잡으려 했다.
허나 헛된 시도였다.
한 번 깨달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자크가 시도하려는 이들을 노렸다.
화살이 몸을 꿰뚫자 고통에 신음하는 그들을 돌켄 등이 마무리했다.
싸움은 길지 않았다.
오스틴은 정형화된 소드 마스터였고 키아라는 자유분방했다.
형식에서 벗어난 키아라의 실력은 남달랐다.
쾅쾅쾅!
검이 부딪히며 오스틴이 점점 밀렸다.
오스틴의 표정에 당황이 스쳤다.
처음엔 기습으로 인해 밀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싸워보니 상대가 자신보다 강했다.
왼쪽을 찌르면 어느새 오른쪽 어깨살이 썩둑 잘렸다.
상대가 자신보다 빠르고 강하다.
다급한 오스틴의 선택은 하나였다.
쾅!
있는 힘껏 키아라를 밀어낸 오스틴의 몸이 쏜살같이 출구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시도는 이어지지 않았다.
“컥!”
달아나던 오스틴이 갑자기 목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그의 목을 움켜쥔 루터가 나직이 말했다.
“내가 말했잖은가. 그나마 살 기회는 대련밖에 없다고.”
루터는 경악하는 오스틴을 쳐다봤다.
“다쳤군.”
그가 회복을 내렸다.
살점이 날아간 어깨가 회복되었다.
루터가 말했다.
“다시 싸워라.”
목 쥔 오스틴을 다시 키아라의 지근거리로 내던졌다.
콰아아앙!
“크아악!”
온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충격에 오스틴이 비명을 질렀다.
루터는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
그는 키아라가 만족할 때까지 오스틴을 훈련 상대로 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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