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자신감2
어둠을 가로지른 불화살은 매복한 적의 동료들을 불러들이는 데 한몫했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저마다의 병장기를 거머쥐고 다가오는 적들을 숨어 지켜보던 엘레나가 케인에게 상태창을 통해 속삭였다.
[적이 더 나타났어.]
[숫자는?]
[서른.]
[엘레나. 자리를 지켜라. 우리가 처리할 테니 혹시나 도망가는 자가 있으면 제거해.]
[알겠어.]
어둠 속에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도 상태창을 이용해 대화를 계속 나눈다.
케인은 동료들에게 상황을 전달받으며 지속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작전은 그대로였지만 좀 더 은밀했다.
[자크. 근거리로 조용히 제압해라.]
[돌켄. 은밀하게 제압해라. 놈들의 수준이 낮다. 기습을 눈치챈다면 도망갈 테니 사냥하기가 더 까다로워진다.]
케인은 굳이 사냥이란 표현을 썼다. 그만큼 적들이 약하다는 반증이었다.
숲에 녹아든 일행이 나타난 적을 조용히 처리했다.
시작은 엘레나였다.
어느새 나무 위에 오른 그녀가 컴컴한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는 적을 주시했다.
적이 바로 아래를 지나치자 엘레나가 뛰어내렸다.
정확히 어깨에 내려앉은 엘레나.
“뭐…….컥!”
놀라는 적의 목에 단검을 박고 입을 막았다.
부릅뜬 눈에 당황, 충격 등의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지만 그뿐이다.
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
적을 처리한 엘레나가 일행에게 알렸다.
[한 명 처리했어.]
[잘했다. 이대로 진행하자.]
엘레나는 시체를 내려다봤다.
죽은 적이 볼썽사납긴 했지만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엘레나는 다시 어둠에 녹아들었다.
움직이는 그녀의 얼굴에 어느새 가벼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기척이 점점 사라진다.
지원군을 끌고 온 데릭은 뭔가 수상함을 눈치챘다.
그가 조심스럽게 부하의 이름을 불렀다.
“앱손! 앱손!”
부하는 대답이 없었다.
데릭은 그제야 깨달았다.
‘함정이다!’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전진하던 그들이다.
이름을 부르면 당연히 들린다.
그런데 대답은커녕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릴 노리고 있었어.’
등골이 서늘하고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데릭은 후퇴하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괜히 주목받아 표적이 된다.
혼자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방향을 틀고 왔던 길로 가려는데 갑자기 전신이 긴장감으로 쭈뼛거렸다.
그의 앞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허리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나아가던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전방의 사내를 노려봤다.
돌켄이 빙글거리며 물었다.
“어디 가게?”
“어떻게 알았지?”
“처음부터.”
“그냥 보내주면 안 되겠나? 살려주면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기억에서 지우겠다.”
돌켄이 혀를 찼다.
“죽이겠다고 온 놈을 그대로 돌려보내라고? 내가 성자인 줄 아느냐?”
“우린 세력이 커. 이 일이 알려지면 너희 모두 죽는다.”
데릭의 경고에 뒤에서 수풀이 흔들리며 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호를 쏘아 움직일 정도면 체계가 잡혔다는 얘긴데. 무슨 조직이지?”
“우린 붉은 어금니다.”
“붉은 어금니? 그게 뭔데?”
“그게 우리 조직의 이름이다.”
나무 위에서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켄이 우스꽝스럽게 몸을 떨었다.
“정말 무서운 조직의 이름이군. 듣기만 해도 오줌을 지리겠어. 그런 멋진 이름은 누가 지었지?”
데릭은 비웃음에 착 가라앉은 눈으로 대답했다.
“우린 목표를 그냥 죽이지 않는다. 산 채로 잡아먹지. 너희들은 곱게 죽지 않을 것이다.”
가슴 서늘한 경고에도 웃음기는 여전했다.
“잡아먹는다고? 그래서? 우리가 두려워하길 바라나?”
“한 번 정한 목표는 절대 놓치지 않아. 너희들이 어딜 가든 우리가 반드시 쫓을 것이다. 평생 추적당하느니 이쯤에서 그만두고 서로를 위해 물러나자.”
데릭의 제안에 누구 하나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케인이 말했다.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니 아직도 여유가 있는 모양이군.”
“긴말 할 것 없다.”
홀연히 나타난 자크가 데릭의 정수리에 화살촉을 박았다.
짚단처럼 힘없이 쓰러지는 데릭의 죽음을 확인한 자크가 일행에게 알렸다.
“모두 죽었다.”
돌켄이 죽은 데릭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붉은 어금니? 애들 장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루터와의 여정으로 심장이 강해진 일행이었다.
그런 그들이 데릭의 경고를 깊게 새겨들을 리가 없었다.
돌아온 일행은 알아서 경과를 보고 했다. 가만히 듣던 루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처리했으니 끝이다.
루터는 관심을 끊었지만 바르코즈는 달랐다.
“매복한 자들이 누구던가?”
“붉은 어금니라는 자들인데, 혹시 아시오?”
“알다마다. 아주 악랄한 산적들이지. 한 번 습격하면 절대 생존자를 남겨두지 않네. 심지어 가축처럼 잡아먹는 일도 있다고 하더군. 악명이 자자해서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선 그들의 영역 근처에 얼씬도 않는다고 하더니 여기까지 나타난 것을 보니 영역을 확장한 모양이군.”
불안정한 치안 덕에 산적이 활개를 치는 모양이다.
루터가 관심을 보였다.
“사람을 먹는다고?”
“예. 일종의 의식이라더군요. 자신들의 용맹함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죠.”
칼루아가 진저리를 쳤다.
“정말 끔찍한 자들이네요.”
단순히 자랑하기 위해서 같은 사람을 먹는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설마하니 위협일 줄로만 알았던 돌켄 등도 기가 막혔다.
“정말 사람을 먹는 놈들이었어?”
“곱게 죽이는 게 아니었는데.”
알고 보니 미치광이들이다.
모두가 분분한 가운데 바르코즈가 걱정을 드러냈다.
“붉은 어금니는 빚지면 못사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이 당한 것을 반드시 되갚으려 할 겁니다.”
“고작 산적이 아닌가?”
“그렇게 볼 게 아닙니다. 놈들은 산적이되 조직을 갖춘 세력입니다. 거대 상단과 이어졌고, 그 밖에 귀족, 정보 길드와도 인연이 있지요.”
붉은 어금니와 연결된 세력이 한, 둘이 아니다.
경쟁 상단을 제거하기 위해 붉은 어금니와 결탁한 상단이 있고, 타 영지를 습격하기 위해 귀족들과 계약을 맺기도 한다.
암살 의뢰도 받는 정보 길드와도 인연이 이어져 있다.
“산적도 세력이 커지면 이용하는 곳이 많습니다. 붉은 어금니가 그중 하나지요.”
알고 봤더니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세력이었다.
루터가 물었다.
“후환이 걱정된다는 거냐?”
“설마요. 그들 전부가 달라붙어도 어찌 못할 분이 계시는데 걱정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대로라면 놈들이 저희를 발견하고 공격할 겁니다.”
쉽게 말해 성가신 일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루터가 혀를 찼다.
“버러지들이 살아남으려고 별짓을 다하는군.”
루터가 보기는 산적이라고 개죽음당하기 싫어 여기저기 손 벌려 애걸복걸하는 꼴로 보였다.
케인이 안타까워했다.
“한 놈은 살려둘 걸 그랬습니다.”
본거지를 알아내 일망타진을 했어야 했다.
케인의 안타까움은 금세 꺼졌다.
“지금이라도 알아내면 되지.”
가볍게 말한 루터가 자리에 일어섰다.
“가자.”
“어디로 말입니까?”
“시체들이 있는 곳. 그리고 놈들의 본거지로 간다.”
루터가 품에서 목함을 꺼냈다.
열린 목함에서 시커먼 안개가 피어올랐다.
악령이 물었다.
[내가 할 일이 생겼나보군.]
“그래. 시체를 작업해 줘야겠다.”
루터는 악령의 능력을 알았다.
악령은 영혼을 삼킨다.
놈의 재주를 이용해 후환을 미리 제거할 생각이었다.
루터는 죽은 데릭의 시체를 가리켰다.
“이 녀석이다.”
[물론이다. 먹어도 되나?]
“그래.”
[흐흐. 오랜만이로군.]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영혼이 아직 남아 있었다.
검은 연기가 데릭의 시체를 덮었다.
잠시 후, 희끗하고 뿌연 유령체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생김새가 죽은 데릭과 꼭 닮아 있었다.
‘끄아아악! 살려줘!’
악령에 흡수되어 가는 데릭의 절규가 요란하다.
루터가 보는 것을 일행은 보지 못했다. 돌켄 등은 시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어!”
“시체가 움직인다!”
말 그대로였다.
악령의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자 시체가 경련을 일으키듯 부들부들 떨었다.
영혼을 강제로 빨아들이면서 일어나는 과정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칼루아가 궁금한 눈으로 물었다.
“마스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악령이 영혼을 강제로 빨아들이면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그게 가능한가요?”
“나도 얼마 전까지 그런 게 가능한 줄 몰랐다. 악령의 고유 능력이니 그러려니 하고 있다.”
이 세계는 루터가 모르는 일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악령의 재주였다.
루터는 악령이 하는 양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조만간 영계에 관한 연구를 시작해야겠다.’
영혼과 관련된 능력은 깜깜했다.
큰 범주로는 흑마법에 속하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네크로맨서와 관련이 깊다.
예전에는 다룬 이도 없었고, 저급한 학문이라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허나 지금은 달랐다.
악령이 하는 양을 보자니 네크로맨서에 대해 흥미로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사이 데릭의 영혼이 악령에게 온전히 빨려 들어갔다.
악령은 데릭의 영혼을 삼키면서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흐흐흐흐. 욕망하는 영혼은 언제 먹어도 달콤하지.]
“그의 기억을 읽었나?”
[그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모두 알려주지.]
“이 놈이 소속된 본거지를 알려 달라.”
[머지않은 곳에 있다. 그 전에 요청할 게 있다.]
루터가 눈을 찌푸렸다.
“요청? 누가 너보고 요청하라 허락했지? 시키면 군말 없이 따르기나 해라.”
지금은 이용하고 있지만 신뢰하진 않았다. 악령이 조금이라도 기어오를 생각을 하면 그대로 소멸시킬 생각이었다.
악령이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이봐. 나는 널 돕고 있어. 그러니 최소한의 대가는 주어야 하지 않겠나?]
“대가? 요구하는 게 뭐냐?”
[근처에 영혼들이 많군. 내가 먹어도 되나?]
데릭의 죽은 동료를 말하는 듯했다.
루터는 악령의 꿍꿍이를 알았다.
‘이놈이 힘을 키워 내게서 벗어나려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악령은 상태창이 없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강해지고 있는지 모른다.
‘대륙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다 빨아 먹어 보아라. 그래도 날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루터는 악령의 의도를 알았지만 굳이 좌절시켜 주지 않았다.
희망이 있어야 의욕도 있는 법이다. 헛된 생각을 모른 척하며 루터가 받아들였다.
“서둘러라.”
[고맙군.]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인 악령이 쏜살같이 사라졌다.
바르코즈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사라지는 검은 연기를 바라봤다.
보기만 해도 닭살이 돋고 간담이 서늘했다.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바르코즈는 자신이 호기심을 억눌렀기에 지금까지 루터와 동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악령이 돌아오고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이다.]
“가지.”
일행은 악령의 안내에 따라 붉은 어금니의 본거지를 향해 나아갔다.
붉은 어금니의 본거지는 산 중턱에 있는 동굴이었다.
입 벌린 듯한 동굴 안은 불빛으로 일렁였고, 입구는 산적들이 지키고 있었다.
입구를 지키는 두 산적이 연신 하품을 했다.
그들은 자꾸만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며 뒤를 돌아봤다.
동굴 안쪽에서 신음과 비명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산적이 쩝쩝 거리며 말했다.
“하필 오늘 경계라니, 재수가 옴 붙었군.”
“조금만 참아. 곧 교대니 우리도 구경하다 기회나 얻자고.”
“흐흐. 오늘은 물이 좋던데.”
“생각만 해도 끝내주는군.”
그들의 수상쩍은 대화는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가벼운 도약으로 산자락을 내려와 동굴 아래로 내려온 키아라가 두 산적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콰득!
목뼈가 부러지며 경계를 선 산적이 죽었다.
뒤따라온 일행은 곧장 동굴로 진입하려다 멈칫했다.
“아아아아!”
동굴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신음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엘레나가 얼굴을 붉히고 루터는 어리둥절했다.
루터가 바르코즈를 쳐다봤다.
“산적이 살롱을 운영하나?”
“살롱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에 귀족을 비롯해서 능력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수작들이지?”
산적들의 은신처에 귀족이 있는 것도 모자라 여자들과 엉켜있다.
돌아가는 모양새가 영 수상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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