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자신감
응접실로 돌아가는 동안 칼루아가 상태창을 통해 물었다.
[마스터. 어떻게 그리 감쪽같이 연기하실 수가 있나요?]
너무 능수능란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루터가 여상히 대답했다.
[잘 아니까.]
루터는 대륙의 교단 대부분을 알았다.
전장에서 마법사만큼 많이 보는 게 사제들이었다.
그리고 사제를 제압하지 않으면 전장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들을 눈여겨 보고 관찰했다.
그 과정에서 사제들의 사회에 대해서 연구한 적도 있었다.
교단은 하나의 공동체였다.
그리고 폐쇄성이 강해 외부의 개입이 어렵지만 반대로 말하면 한 번 파고들면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칼루아가 빙그레 웃었다.
알고 있어도 하기는 쉽지 않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적당히 을러대다가 신분증을 얻어야지.]
교단의 사제가 보증하는 신분증이라면 검문소든 불시 검문이든 문제 될 일이 없었다.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사제가 뒤따라왔다.
표정은 죽상이었고 동작은 굼떴다.
마치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의 죄수의 모습 같다.
식은 찻잔 세트를 치우기 위해 뒤따르는 견습 사제의 표정이 묘했다.
평소와 많이 달랐다.
늘 팔자걸음에 거만함이 하늘을 찔렀고, 호통 한 번에 신전이 발칵 뒤집을 정도로 권력이 강했다.
그런데 징벌 사제란 말 한마디에 비루한 노새마냥 빌빌거린다.
견습 사제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루터를 바라봤다.
알고 보니 높은 신분이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구나.’
감탄하는 견습 사제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찻잔을 치우는 동안 루터는 소파에 앉아 뒤따라온 레일리에게 턱짓했다.
“앉게.”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데, 하대에도 레일리는 군말이 없었다.
말 한마디에 굼뜬 몸이 날쌘 비조 같았다. 잽싸게 앉는 그를 루터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레일리는 변명할 처지도, 말을 할 처지도 되지 못했다.
조금 전 그는 루터를 향해 호통을 쳤다. 단순히 응시하는 시선이지만 공포가 밀려왔다.
좌불안석인 레일리는 루터가 말을 하길 기다렸지만 그는 침묵했다.
단지 쳐다보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자리가 무겁다.
그 사이 차를 데워온 견습 사제가 나타났다.
찻잔을 들어 올린 루터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왔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겠지.”
일부러 직접적인 용건을 꺼내지 않았다. 납작하게 짓눌러줘야 반항을 못 한다.
레일리는 한 신전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켕기는 게 많았다.
뇌물, 여자, 행실.
사제였지만 모범적이진 않았다.
찔리는 일이 많으니 변명 하나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징벌 사제가 괜히 나타날 리가 없었다.
분명 전후 사정을 알고 있으리라.
멋대로 짐작한 레일리의 얼굴이 점점 무거워졌다.
굳게 닫힌 입술은 열리지 않았고 대신 어깨는 외축되고 고개는 점점 바닥을 내려다봤다.
루터는 그가 하는 양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넘겨짚는 말에도 위축되는 것을 보면 그간 찔리는 일이 많다는 얘기다.
이제 카드는 전부 그가 쥐고 있다.
남은 일은 얼어붙은 레일리를 쥐락펴락하는 일 뿐이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루터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레일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네 놈의 행실이 오죽했으면 내 귀에까지 들려왔겠나. 레일리. 징벌 사제가 어떤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겁먹은 레일리가 더듬거렸다.
“아, 알고 있습니다.”
너무 잘 알았다.
징벌 사제는 내부 규율을 엄격히 다스리는 자들이다.
교단의 사제로서 행실에 어긋나거나 부정한 행위를 했다면 여지없이 징벌 사제가 처리한다.
그리고 그들의 처리 방식은 매우 가혹했다. 루터는 얼어붙은 레일리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잘 알고 있으면 얘기가 쉽겠군. 자, 이제 내가 자네를 어떻게 할 것 같나?”
하늘과 같은 권력을 지닌 징벌 사제는 지부 신전 책임자를 주저앉히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레일리가 다급히 애원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눈이 멀어 어리석었습니다. 다시는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그가 침묵하는 루터에게 재차 애걸복걸했다.
“저희 신전의 실적을 보면 아시겠지만 신도도 점점 늘어나고 기부도 많은 편입니다. 제 공로를 봐주시고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흐음. 어떻게 한다…….”
루터는 일부러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는 레일리를 조치할 생각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레일리를 몰아붙이고 압박하는 것뿐이다.
서늘한 응접실에 혼자만 더운지 땀을 뻘뻘 흘리는 레일리를 물끄러미 보던 루터가 한마디 했다.
“좋다. 기회를 주겠다.”
말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레일리 사제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저, 정말입니까?”
징벌 사제는 가혹하기로 유명하다.
자비 없는 그들에게 눈에 띄는 것 자체가 재앙일 지언데 용서를 바라는 건 꿈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다.
그런데 꿈이 이뤄졌다.
삽시간에 밝아진 레일리를 향해 루터가 엄포를 놓았다.
“그대에게 경고만 내리는 건, 말대로 그간의 실적이 있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번뿐이다. 행동거지에 신중을 기하고 늘 조심해야 한다. 자네도 알겠지만 신전의 책임자를 대체할 인력은 얼마든지 있어. 누군가 자네를 끌어 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등골이 오싹해진다.
레일리 사제가 마른침을 삼켰다.
“명심하겠습니다.”
“오다가 전투가 있었다. 의복, 신분증 등을 내 일행의 인원수만큼 가져오게.”
새하얀 로브였지만, 교단의 의복은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은 루터의 지시에 레일리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누가 쫓는 것처럼 부리나케 사라지는 사제의 뒷모습을 보던 칼루아가 루터에게 물었다.
[들키지 않을까요?]
[징벌 사제는 특수한 위치에 있다. 설령 마주한다 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언급은 금기 사항이야. 물을 수도 없고, 따질 수도 없지. 만약 이번 일이 알려졌다고 하더라도 정체를 알지는 못할 것이다.]
폐쇄성이 워낙 강해서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니 징벌 사제 노릇을 했다.
그리고 이 일이 문제 되는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아네스 교단을 상징하는 의복을 걸치니 진정한 사제 같았다.
신분증도 남달랐다.
황금으로 만들었고, 교단의 교리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름은 루터가 직접 새겼다.
아네스 교단의 신분증이라면 복잡하고 까다로운 검문도 문제없다.
마차와 수레를 준비하고 떠날 채비를 갖췄다.
용병을 고용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 돌켄 등만 하더라도 익스퍼트 중급으로 이루어졌다. 키아라는 소드마스터였고, 칼루아는 5서클이었다.
전력은 차고 넘쳤으니 인원 그대로 출발했다.
검문은 삽시간에 통과였다.
칼루아의 기존 신분증이라면 마차와 수레를 수색했겠지만, 칼루아 등이 내민 신분증은 교단의 귀한 손님에게만 주어졌다.
게다가 사제복을 착용한 루터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남들은 삼엄한 시선 속에서 엄포를 받아가며 꼼꼼히 검사를 받는 동안 일행은 스쳐 지나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순식간에 끝났다.
도시를 빠져나가며 일행이 루터를 쳐다봤다.
혹시나 텔레포트로 단번에 수도로 주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루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번 외출의 목적은 숨은 뜻이 있었다.
돌켄 등의 자신감을 살려주고 키아라와 칼루아에게 많은 것들을 경험을 시켜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출발 전, 지시를 내렸다.
“나는 이번 여정에 손 하나 까딱 안 할 생각이다.”
이제껏 혼자서 다 해결했던 루터였다. 그래서 별반 다를 것 없는 여정일 줄 알았는데 의외의 말이 나왔다.
돌켄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너희들이 행동해야지. 언제까지 내 뒤에 있을 셈이냐?”
루터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이제까지 배운 것들을 묵혀두지 마라.”
진의를 파악한 케인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알겠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케인은 루터의 의도를 그제야 알아차렸다.
들러리였던 자신들을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뜻이었다.
루터는 그들을 깨닫게 한 뒤, 칼루아가 간단히 지시했다.
“많은 것을 보아라.”
“네. 마스터.”
칼루아가 보고 겪는 것 모두가 신목에게 전달된다.
그 전달되는 정보는 모두 유산이 되어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루터가 굳이 편한 방법을 놔두고 수고를 자처하는 이유기도 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치안은 낮아진다.
물자를 모으고 외부로 병력을 보내기 시작하니 부족해진 물품으로 인해 물가가 상승하고 삶은 더욱 궁핍해진다.
지방 영주들은 영지민을 쥐어짜고 때에 따라서 범죄도 서슴지 않는다.
궁핍한 삶에서 탈출하려는 자들은 무기를 들고 산적이나 도적이 된다.
전쟁 준비로 시작된 바스코 제국의 현주소였다.
마차에 앉은 루터는 명상에 잠겼다. 9서클이 되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한계였던 8서클을 넘으니 마나가 꾸준히 모여들었다.
루터는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9서클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어.’
한계가 없으니 당연히 끝이 아니다.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인간 중 누구도 밟아 본 적 없다는 9서클에 다다랐는데 다시 시작이다.
최초에게 주어진 숙명은 불투명한 미래였다.
9서클 너머는 무엇인가.
루터는 고민을 삼켰다.
‘생각만 해선 되는 일이 아니다. 이제 흐름에 기대어 벌어질 일을 기대하자.’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으니, 현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편안한 루터와 달리 여정은 사건을 예견하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고 야영을 준비했다.
불을 피우는데, 돌연 인기척이 느껴졌다.
굽이진 숲길에 매복이 있다.
루터는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다.
마침 잘 된 상황이었다.
그들은 용병을 앞세워 안전을 도모하는 일반 상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적이 온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상황이었다.
키아라가 루터를 쳐다봤다.
매복된 적을 간파한 눈치였다.
루터가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있으란 뜻이었다.
정찰을 다녀온 자크가 일행에게 적의 출현을 알렸다.
“적이 다가온다.”
자크의 시야는 남달랐다.
아무리 숨죽이며 다가와도 미세한 움직임까진 숨을 수 없었다.
매복을 간파한 자크의 알림에 일행이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케인은 루터의 의도를 알았다.
그래서 체계를 갖췄고, 자신이 일행의 대장으로 나섰다.
전투력이 유독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몬스터 영역의 길잡이 노릇을 했었다.
관찰력이 뛰어났고 또한 신중했다.
케인이 지시를 내렸다.
“발 빠른 엘레나가 후방을 잡고 나와 돌켄이 좌우에 포진한다. 자크. 네가 적들을 압박해라.”
“그러지.”
“알겠어.”
네 사람이 흩어지고 잠시 후, 자크가 시위를 당겼다.
미스릴로 제작한 활과 시위였다.
강철로 만든 화살을 적에게 겨눈 자크가 시위를 놓았다.
슈아아앙!
바람을 찢으며 날아간 화살이 바위를 뚫고 몸을 숨긴 적의 머리를 관통했다.
쾅!
바위가 부서지며 난 소리가 신호탄이었다.
“눈치챘다!”
“죽여라!”
놀란 적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자크의 손놀림이 분주해졌다.
루터는 일찌감치 자크의 재능을 궁수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재능이 발현되고 있다.
등에 맨 화살 통에서 화살을 꺼내어 시위에 거는 동작이 부드럽다.
허나 결과는 참혹했다.
시위를 놓은 화살이 적을 꿰뚫었다.
이마에 구멍이 난 동료들이 늘어난다.
적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자 즉각 퇴각 성이 울려 퍼졌다.
“후퇴! 후퇴해!”
“모두 도망쳐!”
숙련된 궁사의 사정권에 들면 전멸을 면치 못한다.
게다가 자크의 화살은 엄폐물도 꿰뚫는다.
달아난 산적은 몰랐지만 이미 포위 당한 상태였다.
좌우엔 케인과 돌켄이. 그리고 후방엔 엘레나가 단단히 적을 에워싼 상태였다.
산적이 익스퍼트 중급과 싸우는 것은 자살 행위다.
“끄아아악!”
“살려줘!”
비명은 금세 멎고 전투는 끝났다.
그런데 누군가 쏜 불화살이 하늘을 수놓았다.
어둠 속에서 불화살은 유독 선명했다. 구원을 요청하는 신호였는지, 인기척이 금세 늘어났다.
심심한 키아라가 루터에게 물었다.
“나도 가도 돼?”
칼루아도 끼어들었다.
“저도요.”
“안 돼.”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쓸 수 없는 노릇이다.
루터가 실망하는 둘에게 한 마디 더했다.
“곧 솜씨를 발휘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발휘할 날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