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9서클
어느 날이었다.
늘 그랬듯 권능을 행사하고 공동으로 돌아와 이종족을 가르쳤다.
마지막 일과로 사해에서 다가오는 검은 영혼의 접근을 관찰했다.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공동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했지만, 루터에겐 그대로였다.
그러나 변화는 불현듯 찾아왔다.
설산의 봉우리에 앉아 있던 루터가 눈을 감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그의 몸에서 보랏빛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혼돈과 무속성을 상징하는 그의 고유 마력이 사방에 분출되었다.
그와 함께 세상이 멈추었다.
루터는 멈춘 세상에서 홀로 움직였다.
풍경화와 같이 정적인 세상을 말없이 바라보는 그의 눈이 풍랑의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그에게서 흘러나와 퍼진 마나가 세상에 녹아드는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동시에 그의 몸에 노도와 같은 마력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8서클이 담아낼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다. 루터가 부르짖었다.
“드디어!”
9서클.
마도학에선 불가능이라 했으며, 마법사들은 인간이 건널 수 없는 영역이라 불렀다.
루터에겐 희망이었고 꿈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꿈이 이뤄지고 있었다.
8서클을 담은 신체가 좁은 우물이었다면 9서클은 바다가 되었다.
신체가 변하는 동안 세상의 이치가 루터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의 눈에 세상의 만물이 룬어로 보였다. 룬어는 태초의 신의 언어였다.
룬어의 이치가 녹아든 세상이 루터에게 진실을 보여주었다.
“아아아!”
전율한 루터는 깨달았다.
룬어는 마법사들만의 영역이 아니었다.
세상의 근본이자 기본이었다.
멈춘 시간이 깨지고, 루터는 다시 흘러가는 세상을 마주했다.
휘이이잉!
그의 곁으로 찬바람이 불었다.
루터는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냉기를 품은 바람에서 룬어를 보았다. 룬어는 어디에나 있었다. 하늘과 별, 그리고 대지와 어둠에도 룬어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루터는 손을 뻗었다.
그가 원하자 흘러가던 바람이 되돌아와 그의 손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루터가 미소를 짓자, 바람도 기뻐했다. 그가 중얼거렸다.
“9서클이 되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더니, 틀린 소리가 아니었군.”
전설이었고, 뜬구름 잡는 소리였는데 이제 보니 맞는 말이었다.
세상을 보는 눈에 새로운 직관이 생겼다. 깨닫게 된 그의 세상은 모든 만물이 곧 룬어였다.
9서클이 된 루터의 눈에 새로운 진리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육체가 담는 그릇이 9서클이 되면서 신체에도 변화가 일었다.
머리카락은 그의 속성처럼 보랏빛으로 일렁였고, 눈빛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신비로운 눈동자가 사해에 닿았다. 사해를 휘감은 안개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였다.
“저주로구나.”
사해는 누군가에게 인위적으로 저주받은 영역이었다.
9서클의 위력은 관찰부터 남달랐다.
만물의 진리를 깨달으니 근본을 꿰뚫었다.
8서클 때에는 조심스럽게 종일 연구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 9서클이 되니 보기만 해도 해답이 나왔다.
그리고 그 해답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풀리지 않았던 난제였다.
루터는 사해를 향해 나아갔다.
안개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손을 휘저었다.
9서클의 깨달음을 지닌 손길은 그 행위만으로도 마법이었고, 룬어였다.
안개가 걷히며 시커먼 바닷물이 푸름을 드러냈다.
루터가 전방을 바라봤다.
진리를 관통하는 눈빛이 걷힌 안개를 지나 저편에서 다가오는 검은 영혼을 마주했다.
루터는 그 검은 영혼의 실체를 향해 나아갔다.
9서클의 탄생을 만물이 알려왔다.
자연이 속삭였고, 바람이 전달했다.
그의 등장은 존재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변화의 시작이었다.
검은 영혼은 일정 거리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의도한 전진이라면 거북이보다 느렸고, 그렇지 않다면 표류하는 난파선 같았다.
루터는 저주의 안개를 끊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콰아아앙!
가로지르는 그의 몸이 빛살보다 빠르다.
8서클 때에도 의지가 곧 발현이었다. 9서클이 되자 숨 쉬는 것처럼 마법의 발현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의 마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느리다.”
검은 영혼의 거리는 멀었다.
텔레포트를 쓰자니 저주 안개가 가로막고 있었다.
루터는 마력탄을 발사했다.
콰아아앙!
보랏빛 마나가 일직선으로 전방을 향해 뻗었다.
성긴 안개를 찢어발기고 검은 영혼의 지근거리에서 멈췄다.
루터는 줄처럼 팽팽하진 마력탄을 회수했다.
그의 몸이 중력에 의해 당겨지는 것처럼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순식간에 나아간 그가 도착했을 때에는 권능의 관찰로만 보였던 검은 영혼의 존재감을 발견했다.
루터는 주변의 뿌연 안개를 제거하며 앞으로 걸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 평평한 바다의 표면을 걸어가던 그가 마침내 검은 영혼의 정체를 확인했다.
“음.”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나타난 검은 형체의 외관은 거대한 섬이었다.
허나 진짜 섬은 아니었다.
끼아아악!
섬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검은 영혼들이 쉴 새 없이 울부짖는다. 영혼은 섬의 근간이었다.
움직이는 악령의 섬.
루터가 발견한 검은 영혼의 정체였다. 섬 자체가 악령으로 이루어졌다.
“이게 대체 뭐지?”
루터는 섬이 흘러 온 방향을 바라보다 흠칫했다.
섬이 지나온 자리에 검은 연기가 불처럼 피어올랐다.
검은 연기는 악령이었다.
섬에서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악령들이 지나온 자리에 똬리를 틀고 영역을 늘린다.
루터가 이런 것을 생전 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관찰이 길어졌다.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섬이 루터의 등장에 들썩이더니 이내 공중에 악령들이 모여 형체를 이루었다.
형체는 거대한 눈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에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동공이 나타났다.
루터는 거대한 눈동자와 눈을 맞췄다.
눈동자가 말했다.
[부서진 세계의 권능자로구나.]
루터는 인상을 찌푸렸다.
음성이 지옥의 호곡성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권능의 냄새가 난다. 못 보던 권능자인데, 너는 누구냐?]
“그러는 넌 누구냐?”
[나는 악령의 권능자다. 충돌은 원치 않으니, 방해하지 마라.]
눈동자가 위협적으로 붉은 빛을 발산했다.
루터는 눈 하나 깜빡 안 했다.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뭉친 악령들로 이루어진 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들이 자신을 위협할 거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루터는 그의 요구를 무시하고 질문을 던졌다.
“부서진 세계라는 게 무슨 소리냐?”
[너희들의 세계를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그래? 그럼 넌 어디에서 왔지?”
[질문이 많구나.]
붉은 눈동자는 친절하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악령이 달려들었다.
“그깟 걸로 날 위협할 수 없지.”
코웃음을 친 루터가 바닥을 찼다.
그의 주변으로 보호막처럼 새하얀 빛이 일렁였다.
일렁인 빛은 점점 환해졌고, 곧 악령을 향해 나아갔다.
빛과 부딪힌 악령이 소멸했다.
루터는 텔레포트를 했다.
눈동자의 코앞에 선 루터가 나직이 말했다.
“네놈의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정확히 내가 거처하고 있는 설산으로 다가오고 있었어. 네놈은 그 이유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놔야 할 것이다.”
눈동자는 루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널 악령으로 만들겠다.]
돌연 섬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악령들이 뭉치고 하나가 되었다.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악령은 마치 악마와 같았다.
전신이 붉게 일렁였고, 거대한 쇠뿔을 자랑했다. 양쪽에 다섯 개씩 달린 팔에는 악령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검이 들렸다.
사람으로 치면 배꼽에 달린 외눈이 빛을 발했다.
[나의 새로운 먹이가 되어라.]
“희한하게 생겼군.”
루터의 감상은 그게 끝이었다.
그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협조하지 않겠다면 상관없다. 강제로 불게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부서진 세계니, 권능자니 떠드는 걸로 봐선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게다가 악령을 부리는 걸 봐선 사념은 충분했다.
그리고 사념을 가지고 놀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9서클이 되었으니 정성껏 상대해주마.”
내려트린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바다의 표면에서 기포가 일더니, 갑자기 해일처럼 높게 솟구쳤다.
콰르르르!
루터는 거대한 해일에게 명령을 내리듯 악령의 외눈을 가리켰다.
해일이 앞으로 밀려 나갔다.
외눈의 눈이 가늘어졌다.
열 개의 손바닥이 전방에 닿았다.
악령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방패가 해일만큼 거대했다.
시커먼 해일이 갑자기 변환을 일으켰다. 짓쳐들어오는 물살이 아니라 용암으로 변질했다.
물로 구성된 해일이 아니라, 용암이었다.
대처할 시간도 없었다.
쿠르르릉!
거대한 용암이 외눈을 덮쳤다.
루터는 하늘을 향해 손을 벌렸다.
벌린 손 위로 거대한 번개 창이 나타났다.
루터는 그 번개 창을 다시 전방에 날렸다.
거대한 일직선의 번개는 다시 쪼개져 수백, 수천 다발이 되었다.
지그재그로 나아가던 번개가 다시 외눈을 강타했다.
루터의 공격은 겨우 시작이었다.
그는 대규모 마법을 원 없이 써보겠다는 듯, 마음껏 활용했다.
광범위 독 구름을 끼얹었고, 송곳 같은 바람을 무더기로 투영시켰다.
하늘에선 번개가 쏟아졌고 바닥은 용암으로 펄펄 끓었다.
마법에 형식이 없었다.
모두 루터가 룬어를 재구성해 창안한 마법들이었다.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전투의 무대가 된 바다가 증발하고 얼어붙기를 반복했다.
한 번 발현한 마법의 의지는 계속 유지되었다.
9서클이 된 그의 신체는 끊임없이 마력을 순환한다.
게다가 기반이 우주의 마나를 끌어 모은다. 루터는 운용 가능한 마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끊임없이 전방을 향해 마법을 난사했다.
악령의 권능자는 악령을 기반으로 하여 스스로를 형성했다.
당연히 공격과 방어도 악령을 통한다. 난사하는 마법에 무수히 많던 악령이 끊임없이 비명을 질러가며 소멸했다.
외눈이 호소했다.
[그만! 그만해라!]
루터는 차갑게 응수했다.
“시작은 네가 했지만, 끝은 내가 정한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끝은 저 건방진 외눈에게 누가 위에 있는지 똑똑히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한참을 몰아붙이고 나서야 전투는 끝이 났다.
루터가 멈춘 이유는 하나였다.
휘몰아치는 구름처럼 거대했던 악령이 손바닥만큼 줄어들었다.
악령은 도망가려 했다.
허나 근원을 보는 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콰드득!
[끄으으윽!]
신음을 흘리는 외눈에게 루터가 서릿발 같은 시선을 보냈다.
“이제 내 질문에 성의껏 대답할 준비가 되었나?”
[무, 물론이다. 내가 졌다. 졌으니 소멸시키지 말아다오.]
애원하는 외눈을 물끄러미 보던 루터가 돌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저건 또 뭐야?”
설산 위로 새하얀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봉우리가 항상 구름으로 뒤덮여 있는 곳인데, 갑자기 말끔하게 걷히고 빛이 들어선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본질을 꿰뚫는 육안이 빛의 정체를 파악했다.
빛은 그의 손에 붙잡힌 악령과 비슷한 존재였다.
루터가 혀를 찼다.
“9서클이 되니, 별 시답잖은 것들이 찾아오는군.”
성가시고 짜증이 난다.
루터는 악령을 쥔 채, 텔레포트를 써서 설산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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