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이종족
설산의 공동으로 돌아온 루터는 가축들을 사방에 풀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물을 키아라가 쫓아다닌다.
일행은 얼떨떨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떠날 때만 하더라도 풀포기 하나 없던 바닥에 녹지가 피어났다.
사람 발목 높이의 목초가 땅을 뒤덮었다. 군데군데 누런 밀도 자랐으며, 리넨 옷감의 원재료인 아마 풀도 눈에 띄었다.
루터가 씨앗을 뿌리는 것을 보긴 했으나,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자랄 줄은 몰랐다.
며칠 사이에 식물이 성장한 것은 바로 바닥의 흙 때문이었다.
순수한 땅 속성의 마나석이 배합된 토지의 영양분이 식물의 성장을 도왔다.
드넓은 공동의 바닥이 들판 같다.
푸름에 젖으니 절로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기뻐하는 일행들과 달리 루터는 자신이 만든 조경이 영 탐탁지 않았다.
‘너무 평평해.’
황무지에 풀잎이 덩그러니 자란 것 같은 이질감이라 굴곡이 필요했다.
동산과 능선을 만들고 그 외에 여러 지형을 꾸밀 생각이다.
루터는 자신이 만든 세상이 좀 더 현실적이길 바랐다. 그러자면 여전히 아쉬운 부분을 채워야 한다.
하지만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밖에 다녀오마.”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일행이 루터를 쳐다봤다.
“어디에 가시는 겁니까?”
“몬스터 영역.”
무심히 몸을 돌리려던 루터가 돌연 멈칫하더니 다시 일행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물었다.
“키아라와 같은 존재가 늘어나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몬스터가 외관이 변하고 자아를 형성된다면, 그래도 몬스터라 하겠느냐?”
루터의 물음에 일행의 눈이 흔들렸다.
자크가 물었다.
“키아라와 같은 존재가 또 생길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언젠가 너희들에게 오염된 마력석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지. 키아라만 특별한 게 아니다. 다른 몬스터도 키아라처럼 될 수 있다.”
“음.”
부동의 자크가 신음을 흘렸다.
그의 반응은 대수롭지 않게 보일 정도로 일행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엘레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키, 키아라만 가능한 게 아니었나요?”
“오염된 마력석이 정화된다면 어느 몬스터라도 가능해. 그래서 묻는 거다. 만약 몬스터가 키아라와 같이 변한다면 너희들은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일행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루터가 추궁하듯 물었다.
“다시 묻자. 그동안 키아라를 어떻게 생각했나? 몬스터라 봤나?”
“아니요. 절대로요. 키아라는 마치 사람 같아요. 절대 몬스터가 아니에요.”
“그래서. 키아라를 사람으로 여겼나?”
“그건…….”
키아라는 알게 모르게 일행과 거리감을 느꼈다고 했다.
괜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게 아니다. 일행은 은연중에 키아라에게 선입견을 드러냈다.
그러니 키아라가 외로움을 탔던 것이다. 루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들에게 과제를 주었다.
“오랫동안 가져온 선입관을 깨기란 쉽지 않지. 하지만 명심해라. 바람은 정체되지 않듯이 곧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너희들은 그동안 박혀왔던 생각을 바꿔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적응하지 못한다면, 떠날 수밖에.”
화두를 안겨준 루터가 몸을 돌렸다. 그가 가는 방향에는 토끼를 안은 채, 환히 웃고 있는 키아라가 있었다.
“키아라. 가자.”
“어디로?”
“언젠가 말했었지. 너희 종족을 정화하겠다고. 지금이 그때다.”
멈칫한 키아라가 토끼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물었다.
“그럼 나와 같은 종족들이 생겨나는 거야?”
묻던 키아라가 눈을 빛냈다.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어.”
“그래.”
루터는 키아라와 나란히 마법진 위에 섰다.
그리고 빛과 함께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몬스터 영역에 도착한 루터와 키아라를 반긴 것은 잿더미가 된 숲이었다.
탄 시체들이 널브러졌는데, 몬스터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루터는 키아라를 안고 하늘로 솟구쳤다.
말빈 방향의 초입은 불타올랐지만, 그 외엔 아직 건재했다.
루터의 시선이 말빈으로 향했다.
먼저 봤던 광경과 크게 다른 점이라면 각 국가의 진영이 막사를 구축한 것 외에는 충돌이 없다는 것이다. 숨 고르기에 들어갔는지 조용한 광경에 루터는 잘됐다 싶었다.
이제 누구의 방해도 없이 자신의 목적을 수행할 일만 남았다.
루터는 키아라와 함께 몬스터를 찾아 움직였다.
한 오우거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오염된 마력석의 근간은 분노와 광기다.
끊임없이 살육이 충동을 일으켜 정신을 지배한다.
몬스터는 쉬고 있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몸속에 있는 오염된 마력석은 파괴를 갈망한다.
피처럼 붉은 눈을 번뜩이며 사방을 어슬렁거리던 오우거가 마주보는 방향에서 나란히 오는 두 형체를 발견했다.
“크아아악!”
분노한 오우거의 함성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키아라의 눈이 급격히 흔들렸다.
“저게 나와 같은 오우거야?”
“아니. 저건 오우거가 아니라 몬스터다.”
루터는 오우거와 몬스터를 엄연히 다른 종족으로 구분했다.
“본디 원래의 오우거는 저런 형태가 아니다. 먼저도 말했지만, 어느 존재의 권능에 지배당하여 변형되었다. 지금의 너를 보거라. 너는 내 권능을 받았다. 그런 네가 어딜 봐서 저 몬스터와 같다는 것이냐?”
루터는 엄중한 눈으로 말했다.
“세상은 오우거를 몬스터로 분류했지만 내 세상에선 아니다. 나는 새로운 이종족을 만들 것이다.”
루터의 새로운 목표였다.
그래야 9서클의 업적을 이룬다.
개인의 욕심이기도 했지만, 키아라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키아라의 눈이 흔들렸다.
그사이 성난 오우거가 달려왔다.
“크아아악!”
루터는 비명 같은 괴성을 지르는 오우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법 홀드.
보이지 않는 밧줄에 묶인 듯, 옴짝달싹 못 하는 오우거에게 마지막으로 슬립 마법을 걸어 잠재웠다.
쿵!
바닥에 허물어진 오우거가 정신을 잃었다. 다가온 키아라의 시선이 궁금증으로 차올랐다.
“이제 정화하면 되는 거야?”
“그래.”
“얼마나 걸릴까?”
“장담할 순 없다. 너의 변화는 급격하고 빨랐지만 항상 같은 경우만 벌어지란 법은 없으니까.”
성체 몬스터를 정화하고 권능을 주입하는 것은 첫 사례니,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과연 어떻게 될까.
그의 행보는 막힘이 없지만, 과정은 모르는 일투성이다.
그러나 모른다고 망설일 그가 아니다. 루터는 쓰러진 오우거의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고 정화 작업을 시작했다.
은은히 비치는 새하얀 빛이 성체 오우거를 감싸 안았다.
키아라는 초조하게 지켜봤다.
면밀히 살피던 루터는 몬스터를 차지하던 오염된 검은 마력이 모조리 사라지자 자신의 권능을 주입했다.
변화가 시작되었다.
투두두둑!
쓰러진 오우거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부피가 줄어들었다.
커다란 몸이 금세 아기처럼 작아졌다. 작아진 몸은 다시 커지지 않았다.
루터는 권능의 관찰을 일으켰다.
시야가 일그러지며 자신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터는 세상을 둘러봤다.
허공에 둥둥 뜬 검은 구슬들 가운데 유난히 밝고 환한 것이 있었다.
키아라의 영혼이었는데, 전에는 없던 작은 구슬이 옆에 있었다.
루터는 그 구슬에 다가갔다.
작지만 키아라처럼 밝았다.
‘새로운 권속이군.’
물로 씻어낸 듯이 깨끗해진 영혼은 더없이 투명했다.
관찰을 끝낸 루터는 다시 마법진 위에 나타난 오우거를 살폈다.
키아라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작아졌어.”
마법진의 빛이 꺼진 이후로 모습을 드러낸 성체 오우거는 처음 루터가 조우했던 키아라와 같이 아기였다.
루터가 나직이 말했다.
“아직 끝이 아니다. 좀 더 기다려보자.”
어린 아기였던 키아라도 금세 성숙하게 자랐다. 당장은 갓난아기로 변했다 하더라도 언제 급속도로 자랄지 몰랐다.
그런데 루터의 예상은 보기 좋게 벗어났다.
“끄응. 끄응.”
성체 오우거였던 아기가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키아라가 그 모습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루터. 왜 커지지 않는 거야?”
“글쎄다.”
처음 실행한 일이니, 변수를 예상하긴 했다. 그런데 키아라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고민에 휩싸이는 사이 눈을 뜬 아기 오우거가 울음을 터트렸다.
“앙앙앙!”
아직 마법진에 두고 상태를 지켜봐야 했는데, 키아라가 불쑥 움직였다.
“괜찮아. 괜찮아.”
아기를 안아든 키아라가 본능적으로 등을 다독였다.
“끄응. 끄응.”
울음을 참은 아기 오우거와 키아라의 눈이 마주쳤다.
아기 오우거가 활짝 웃었다.
그런 아기를 신기하게 보던 키아라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루터는 숨 죽여 우는 키아라에게 물었다.
“키아라. 왜 그러냐?”
“그냥 너무 기뻐서.”
자신과 똑같은 오우거인데, 좀 전에 본 성체와 전혀 달랐다.
눈이 선명하고 예뻤다.
그런 아기가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루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질감 때문이겠지.’
비슷한 생김새였지만, 이질감을 느낀 일행들과 다르게 안고 있는 아기 오우거는 키아라와 같았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던 걸까.
키아라는 눈 맞춘 아기 오우거를 한참이나 감격스러워했다.
그녀와 달리 루터는 심각했다.
경과를 지켜봐도 아기 오우거는 자라지 않았다. 키아라와 전혀 다른 결과였다.
루터는 곰곰이 원인을 고민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새롭게 태어났다.’
좀 전에 자신을 향해 달려들었던 성체 오우거는 죽었다.
오염된 마력석은 오우거를 변질시키고 흉악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런 오염된 마력이 정화되고 자신의 권능이 주입되자 전혀 새로운 자아가 자리를 잡았다.
‘키아라와 다른 경우는 오염된 마력과 연관이 있군.’
갓 태어난 키아라는 오염된 마력의 영향이 미미했다.
그래서 자아 형성에 중점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고, 그 영향으로 신체가 성장했다.
하지만 이미 성숙한 오우거는 오염된 마력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었다.
루터의 권능은 오염된 마력으로 영향을 받은 오우거의 신체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버렸다.
이전의 권능을 깔끔하게 지우려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게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다 생각하며 루터가 키아라에게 말했다.
“앞으로 네 역할이 중요하다.”
“내 역할?”
“그래. 내가 정화하는 몬스터는 더 이상 몬스터가 아니다. 새로운 이종족으로 거듭나야지. 변화에 낯선 그들을 네가 이끌어주어라.”
경청하던 키아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들은 너처럼 순수해. 그저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도와주면 된다.”
“응. 알았어.”
키아라처럼 이들의 성정은 순수하다. 옆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 봐주기만 해도 충분했다.
이름을 정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새로운 아기 오우거는 달리기를 좋아했다.
키아라의 품에서 내려와 걷기 시작한 아기 오우거가 갑자기 소리 내어 움직였다.
“우다다다!”
벌떡 일어난 아기 오우거가 전방을 향해 힘차게 달린다.
달리다 넘어졌지만 울지 않았다.
“캬하하하!”
오히려 즐겁다고 웃는데, 왜 달리는지도 모르겠고 뭐가 좋다고 웃는지도 모르겠다.
얌전했던 키아라와 달리 활동적이고 또한 활기찼다.
루터는 이름을 지었다.
이름은 파르파. 달리는 아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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