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서클 영주님-36화 (36/185)

#36화 불바다3

시작은 텁석부리 장한이었다.

그는 대뜸 일행을 가로막더니, 키아라를 가리켰다.

“여자를 내놔라.”

당당한 요구에 모두 기가 찼다.

돌켄이 인상을 그렸다.

“갑자기 웬 미친놈이야?”

장한이 씩 웃었다.

“주둥이는 함부로 나불대는 게 아니지. 여자는 갖고 네놈의 머리는 반으로 쪼개주마.”

차림새는 경장 갑옷의 기사 같았는데, 말하는 모양새는 도적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일행은 도저히 장한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루터는 알았다.

힘이 있으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법 위에 군림할 수 있었고, 원한다면 살인 같은 것을 저질러도 어물쩍 넘어갈 수 있다.

힘이 곧 정의고 법이다.

그러니 눈앞의 장한처럼 제 힘 믿고 까부는 자들이 많다.

장한은 말뿐이 아니라는 듯이 움직이려 했다.

“응?”

그런데 언제 와 있었는지, 미녀의 일행 중 하나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장한이 얼굴을 찡그렸다.

익스퍼트 상급의 감각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예리하다.

그런 그가 지근거리에 있는 자의 기척을 놓쳤다.

보통내기가 아니란 생각과 동시에 위기의식이 들었다.

거리는 함부로 주어선 안 된다.

특히나 지금처럼 동행한 일행을 죽이겠다고 선언한 지금은 더욱더 그랬다.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루터가 나직이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주둥이는 함부로 놀려선 안 되지.”

서늘한 목소리에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장한이 다급하게 움직이려 할 때, 이미 루터의 손바닥이 그의 머리를 때렸다.

팡!

정수리를 가격당해 쓰러지는 장한의 표정이 멍해졌다. 얼굴은 풀리고 입에선 침이 흘렀다.

한순간에 멀쩡한 사람을 백치로 만들어버린 루터가 다가오는 자들을 노려봤다.

장한을 한순간에 쓰러트린 솜씨가 보통이 아닌 듯하자 다가오던 사람들이 흠칫했다.

시선으로 경고를 준 루터가 일행에게 손짓했다.

“서두르자.”

아무래도 키아라의 얼굴 때문에 문제가 생길 것 같다.

엘레나가 키아라의 얼굴을 후드로 가렸다. 일행은 빠른 속도로 거리를 지나쳤다.

걸음을 재촉하는 그들을 아쉬운 얼굴로 보던 한 남자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발걸음을 돌렸다.

눈이 번뜩일 만한 미녀가 나타났다. 그리고 미녀라면 환장할 인물들을 알고 있었다.

곧 좋아할 그들을 떠올리며 남자는 서둘러 어딘가로 향했다.

마차와 수레를 구입하고 건량을 사들였다. 바로 출발하려는데, 상인이 붙잡았다.

“이 시간엔 성문이 닫혀 있으니, 여기서 하룻밤을 묵어야 합니다.”

“상관없다.”

성문이야 넘어가면 그만이다.

루터는 상인의 의견은 묵살했으나 키아라는 넘어가지 못했다.

후각이 좋은 키아라가 여관 앞에 서서 우물쭈물한다.

엘레나가 물었다.

“키아라. 왜 그러니?”

“냄새…….”

중얼거린 키아라가 여관 앞에 서서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음식 냄새가 도저히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하는 모양이다.

침이 흐를 것처럼 입 벌리는 키아라의 모습을 보며 엘레나가 루터를 쳐다봤다.

“키아라가 많이 배고픈가 봐요.”

그러고 보니 태어나고 난 이후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던 키아라였다.

대부분 건량에 마른 빵이었다.

루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해결하고 떠나자.”

일부러 한산한 여관을 찾은 일행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즐겼다.

따듯한 수프와 잘 구운 오리와 양고기에 부드러운 빵이 나왔다.

시원한 맥주까지 곁들이니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

근래 건량으로 허기 때우기에 급급했던 일행은 오랜만에 따듯한 음식을 즐겼다.

양고기를 먹은 키아라가 입을 벌렸다.

“이거 뭐야?”

“훈제한 오리 고기다.”

“맛있어.”

신난 키아라가 불편한 후드를 벗고는 게 눈 감추듯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일행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골골대던 시절이 생각나 잘 먹는 키아라가 보기 좋았다.

상인이 앞으로의 일정을 꺼냈다.

“관문을 통과하면 얼마 안 가 엘피스라는 도시가 나옵니다. 그곳은 올슨의 칸델 같은 곳이지요. 상회가 많아 거래하기 편리하니 거기서 원하시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을 겁니다.”

“알았다.”

엘피스에서 용무를 마치면 곧장 이동 마법진으로 몬스터 영역으로 간다.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던 루터가 돌연 밖을 쳐다봤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몰려오고 있었다.

루터는 혀를 찼다.

‘살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군.’

예전 같았으면 몸을 피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괜히 시비 걸러 오는 게 아닐 터이다.

키아라를 보고 흑심을 품은 것들이다. 좋게 넘어갈 수 없었다.

루터는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마법진을 깔았다.

마법진은 여관을 넘어 거미의 그물처럼 촘촘히 뻗어 나갔다.

이제 도시는 그의 영역이었다.

그사이 여관 문이 열리며 두 장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막히게 아름다운 미녀가 있다 해서 구경하러 왔다!”

호탕하게 외친 노인이 성큼성큼 걸었고, 그 뒤를 말쑥한 중년인이 뒤따랐다.

루터도 아는 얼굴들이었다.

소드마스터 블록스와 밀러였다.

마법사들은 경계 대상 1순위에 소드마스터를 올려놓는다. 용모를 파기했고 인상착의를 외워두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저들과 자신은 활약했던 시대가 달랐다. 그래서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 다 만났다.

‘외워두길 잘했군.’

블록스는 초로의 노인이었고, 밀러는 말쑥한 중년인이었다.

둘 다 신사적으로 보였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역대 소드 마스터 가운데 가장 여자를 밝힌 이들을 나열하라면 아마 상위권에 저 둘을 올려놔도 좋았다.

그래서 저들을 유난히 기억했다.

‘가진 첩만 백 명이 넘는다지.’

소드 마스터니 힘이 넘칠 테고, 그래서 여자가 많았다.

첩실을 그렇게 늘리고도 모자라서 유흥을 즐겼다 하니 대단하다면 대단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여관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키아라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넋을 잃었다.

부하의 호언장담은 허언이 아니었다.

둘은 눈이 높았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황궁의 공주를 정실로 두었고, 바스코에서 유명한 미녀들을 첩실로 두었다.

그런데 키아라와 같은 미녀를 본 적이 없었다. 청초한 분위기를 넘어 심지어 고결해 보이기까지 하다.

두 사람의 눈빛에 음심이 떠올랐다. 이미 머릿속에는 각종 방법으로 키아라를 더럽힐 방법이 떠올랐다.

다가온 그들이 의자를 당겨 멋대로 일행의 자리에 착석했다.

난입한 그들의 뒤로 부하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여관은 금세 인파로 가득 찼다.

블록스가 눈을 빛냈다.

“내 평생 너 같은 계집을 본 적이 없다. 앞으로 마음껏 어여뻐 해주마.”

이미 키아라는 그의 첩이었다.

블록스의 장밋빛 구상에 밀러가 제동을 걸었다.

“누구 마음대로. 내가 먼저 점찍었으니 블록스 공은 양보하시오.”

“이 녀석이, 양보할 줄을 몰라. 어른이 먼저인 것 모르냐?”

“늙어 이 닳은 주제에 손녀 뻘 되는 여자를 밝히는 게 부끄럽지도 않소. 낄 데 안 낄 데를 구분 못 하니 늙어 치매가 다 온 모양이군.”

“흐흐. 듣자니 어린 여자아이를 첩으로 들였다며? 차라리 아예 그쪽으로 취향을 타지 그러냐.”

“곧 부인 될 사람에게 못 하는 소리가 없군. 말조심하시오.”

“저년은 내가 먼저 찍었으니 양보해라.”

“그러면 이렇게 하지. 먼저 살을 맞대고 누가 맞는지 봅시다.”

“그럼 내가 먼저 하지.”

“의견을 제시한 사람이 순서를 정해야 하지 않겠소?”

옥신각신하는 둘을 보며 일행이 아연실색했다.

키아라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거침이 없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게다가 보이는 일행의 구성원도 얕잡아 보기 충분했다.

볼 것 없는 용병 차림새니 무시해도 좋은 모양이다.

돌켄은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 때문이 아니다.

일행은 루터가 화난 모습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와이번 둥지로 가고 있을 때였는데, 당시의 루터는 무시무시한 몬스터를 비롯해 그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당시 루터가 화난 이유는 모두가 짐작하고 있듯이 아픈 키아라 때문이었다.

고치지 못하니 루터가 분노했다.

그래서 일행은 키아라에게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키아라를 무척이나 아끼니 자칫 잘못하다간 루터의 분노를 산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이들이 루터를 앞에 두고 키아라에 대해서 온갖 음담패설을 늘어놓는다.

돌켄의 당황한 시선이 케인에게 닿았다. 케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때, 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다.

‘죽었군.’

기세등등하게 나타나고 살벌한 부하들을 대동시켰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무표정한 루터를 보니 앞으로의 일은 불 보듯 뻔했다.

돌연, 블록스가 손을 뻗었다.

“이년은 내가 먼저다.”

블록스는 키아라를 만지려 했지만, 의도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흠칫한 블록스가 갑자기 일어나는 살기에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있던 루터와 눈이 마주쳤는데, 전신이 위협을 알리고 있었다.

블록스와 눈을 맞춘 루터가 입을 열었다.

“버러지면 버러지답게 살 것이지 눈치도 없이 스스로 죽을 자리로 기어 들어왔구나.”

블록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역력한 긴장에 밀러가 심상찮음을 느꼈다.

“너는 누구냐?”

“소드 마스터니, 두 놈 중 한 놈은 살겠지. 한 놈이 죽을 동안 다른 놈은 도망치면 살 수도 있겠다. 자, 이제 네놈들이 그랬던 것처럼 순서를 정해주마. 누가 먼저 죽겠느냐.”

루터의 오만한 질문에 에워싸듯 포위한 부하들이 코웃음을 쳤다.

감히 소드 마스터에게 죽느니 사느니 떠드는 것을 보면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

그들은 웃었지만 블록스와 밀러는 웃지 않았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루터에게서 피어오른 기세가 둘을 압박하는데, 단순한 긴장감이 아니었다. 마치 전신을 칼날로 겨눈 것 같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곧 사달이 일어날 것이다.

눈치는 없는데 충성심만 강한 부하가 루터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 했다.

“이분들이 누군데 감히…….”

촤아아악!

그의 어깨를 잡으려던 부하의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졌다.

여관 내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루터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여관 내에 있던 부하들의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여관 주인이 비명을 질렀다.

블록스와 밀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순식간에 부하들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더 큰 문제는 어떤 방법을 썼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사실이다.

고즈넉한 시선으로 둘을 보던 루터가 냉혹하게 말했다.

“먼저 도망가는 놈은 살려주겠다.”

말과 달리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전의를 잃고 두려움을 안겨주려는 심계였다.

루터는 소드 마스터의 속성을 잘 알았다. 거들먹거리고 젠체하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겁쟁이들이다.

부자가 재산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가진 게 많은 소드 마스터는 제 목숨보다 중한 게 없다.

막강한 적이 나타나면 적당히 간만 보다 피하려는 놈들이 다반사다.

하지만 그런 놈들은 여지없이 루터에게 죽임을 당했다.

소드 마스터는 죽음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방만했고, 생사전에 취약했다.

표정이 사라진 둘의 얼굴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자리를 박찼다.

방향은 당연히 루터와 반대쪽이었다. 루터는 달아나는 둘을 보며 움직였다.

이제 사냥할 시간이었다.

#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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