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불바다2
전장에서 대화는 무의미하다.
마주친 바스코 전투 부대와 할루인 왕실 기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납게 충돌했다.
피와 비명이 흐르는 가운데, 루터는 패밀리어를 회수하고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이동하다 멈춘 그가 갑자기 마법진을 그린다.
엘레나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전방에 전투가 일어났다.”
“전투요? 몬스터 사냥인가요?”
“곧 알게 될 거다.”
그는 설산에서 그랬듯이 일행을 띄웠다. 허공에 둥둥 뜬 그들이 울창한 숲을 벗어난다.
지상을 내려다보던 일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이는 숲 곳곳에 기사와 마법사 등이 어우러져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저길 봐!”
돌켄이 전방을 가리켰다.
가리킨 방향을 쫓은 그들이 신음을 흘렸다.
말빈 방향의 황무지에 대규모 군대가 어우러져 있었다.
각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개미 떼처럼 가득한 군대가 험악한 병장기를 주고받는다.
불길에 휩싸인 말빈이 검은 연기를 내뿜는다.
“전쟁이 벌어졌군.”
“저거 바스코 제국 깃발 아냐?”
“할루인 공국도 있어!”
“엘버린 왕국도 있다.”
할루인, 바스코에 이어 다른 국가의 깃발도 나부끼고 있다.
“대체 이게 무슨…….”
놀라는 일행들 사이로 루터가 나직이 말했다.
“말빈은 포기한다. 다른 도시로 가자.”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말빈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
일행은 마법진을 타고 이동하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 바로 위를 지나가는데, 누구 하나 낌새를 알아차리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어쩌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왜 우리를 보지 못하지?”
루터가 엘레나의 중얼거림을 받았다.
“은신 마법이다.”
“은신 마법이요? 그래서 저희를 못 보는 건가요?”
“그래.”
돌켄은 얼떨떨했다.
“마법은 정말 대단하네요.”
전투에 휩쓸리면 죽기 전까지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루터의 마법 덕분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전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루터는 바스코 제국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올슨은 끝났다.’
영토 중에 가장 깊숙한 말빈으로 타국의 군대를 끌어들였다.
국토 전역이 전화에 휩싸인 것이나 다름없으니 거래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루터가 굳이 서쪽에서 터전을 잘 마련하다 밖으로 나온 것은 생필품 때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식량이 가장 중요했다.
씨앗 등을 포함한 작물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밀이나 야채, 과일 등이었다.
자급자족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언제까지고 풀만 먹고 살 순 없다.
육류가 필요하니, 아예 가축을 들일 생각이다.
이번 외출은 그래서 중요했다.
어쩌면, 필요에 의한 루터의 외출은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루터의 마나는 무한하지 않다.
회복이 빠르긴 하나, 그렇다고 쓸데없이 마력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전쟁터에서 멀어지고 인적이 드문 숲에 온 루터는 지상에 착지해 마법을 풀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야숙을 해야 한다. 루터는 환영 마법진으로 일행의 모습을 감췄다.
작업하는 사이 케인이 물었다.
“혹시 바스코 제국으로 가시는 겁니까?”
말빈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가면 바스코 국경이 나오는데, 루터가 이동한 방향과 일치했다.
“그래. 전쟁 중인 올슨에서 거래를 하는 게 쉽지 않을 거다.”
돌켄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루터 님. 그런데 저희들은 바스코 제국의 신분증이 없습니다.”
돌켄을 포함하여 이들은 말빈 소속의 용병들이었다.
용병의 신분증이 어딜 가나 통용된다는 건 실력을 가진 자들 이야기다.
만약 이대로 국경 검문을 받게 된다면 통과하기는커녕 감옥에 끌려갈 수 있었다.
돌켄의 걱정은 케인이 풀었다.
“걱정 마라. 검문을 통과하는 건 아무 문제 없을 테니.”
케인은 일전에 루터의 매혹 마법을 본 적이 있었다.
루터의 매혹 마법은 모르는 사람도 절친한 사이로 만든다.
그 마법이 있다면 국경 검문 따윈 우습게 통과할 것이다.
자크는 좋은 눈을 이용해 스스로 정찰을 자처했다.
숲을 살피고 온 자크가 보고했다.
“곳곳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 하는 자들이냐?”
“행색으로 보건대 말빈에서 온 헌터와 상인들 같았습니다.”
듣던 루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전쟁은 피하는 게 현명하지.”
괜히 어슬렁거리다 횡액을 면치 못하느니, 차라리 도망가는 게 낫다.
자크가 남은 보고를 이었다.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일전에 거래했던 뒷골목 상인을 숲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여기서 다 만나는군.”
인연이 참 질기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루터가 지시를 내렸다.
“그를 데려와라.”
“예.”
사라지는 자크를 보며 루터가 생각했다.
‘아무래도 단골이 낫지.’
바스코의 상인과 입씨름하느니 이미 거래를 튼 뒷골목 상인과 거래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자크가 상인을 데려온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타난 상인은 루터를 적잖이 반가워했다.
“흐흐흐.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용케도 살았군.”
“항상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 다행히 몸을 피할 수 있었지요.”
돌켄이 급히 물었다.
“오늘 보니 말빈에 전쟁이 일어났던데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아시오?”
“오! 몰랐나? 모르셨습니까?”
상인이 돌켄과 루터를 번갈아봤다.
고개를 끄덕이자 상인이 웃었다.
“흐흐흐. 그러셨군요.”
엉큼하게 웃는 것이 속이 다 들여다보인다. 루터가 혀를 찼다.
“혹여나 정보료를 받을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설마요.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저 좀 데려가 주시지요.”
“좋다. 이제 묻지. 어떻게 된 일이냐?”
“일왕자와 바스코 제국이 결탁했습니다.”
“일왕자가?”
반문한 루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군.’
일왕자가 왕이 되리라 짐작했는데, 어째서 바스코와 손을 잡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이유는 뭐냐?”
“가만히 있다가는 이왕자에게 잡아먹힐 것 같으니 최악의 선택을 한 셈이지요.”
“이왕자의 기세가 그렇게 좋았나?”
“이미 말빈을 점거했을 때부터 결정 났습니다. 다급하니 불가침 조약을 깨트렸죠. 그리고 보다시피 이왕자 측에서도 다른 국가를 끌어들였고요. 이대로 두고 보다간 몬스터 영역을 바스코에 모조리 내주게 생겼으니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왕자에게 붙었습니다.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랬군.”
이제야 사정을 알겠다.
바스코 제국이 일왕자를 앞세워 몬스터 영역을 독식하면 대륙을 삼키는 것도 시간 문제리라.
서로가 필사적이니 상인의 말대로 전쟁은 쉽게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루터가 혀를 찼다.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그나마 피할 곳으로 바스코가 가장 적당하겠구나.”
“바로 보셨습니다. 그나마 여력이 가장 좋은 곳이니까요. 한동안 숨죽여 상황을 지켜볼 생각입니다.”
“바스코가 받아줄 것 같으냐?”
“상인은 늘 한쪽 발을 다른 곳에 걸치고 있죠. 그래야 무슨 일이 생기면 피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교활하지만 현명하다. 좋아. 너는 쓸모가 있으니 동행시켜주겠다. 단, 바스코에 도착하면 우선적으로 나와의 거래를 진행해라.”
“찾으시는 게 무엇입니까?”
“생필품. 그리고 가축이다.”
루터가 중급 마나석을 꺼내들었다.
“이거라면 충분히 교환할 수 있을 거다.”
“호! 중급 마나석이군요. 당연히 제가 남는 장사니, 최대한 성심껏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상인은 감탄했지만 역시나 묻지 않았다. 루터는 그의 태도와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날이 으슥해지자 곳곳에서 모닥불을 피우는지 반딧불처럼 빛이 나타났다.
루터의 옆에 잠을 청하려던 키아라가 문득 물었다.
“왜 사람들은 서로 싸우는 거야?”
“욕심 때문이다.”
“욕심으로 같은 사람을 죽여?”
“그래.”
“으음.”
키아라는 혼란스러웠다.
루터가 설명했다.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아주 예쁜 돌을 갖고 있지. 다른 사람은 그 돌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돌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지. 그래서 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했을 것 같으냐?”
생각하던 키아라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했는데?”
“당연히 빼앗겠지. 심하면 죽였을 테고.”
냉정한 얘기에 키아라의 눈이 흔들렸다.
루터가 또박또박 말했다.
“인간은 욕망의 덩어리다. 끊임없이 탐하고 갈망하지. 그러니 그들을 조심해야 한다. 믿지 말고 경계해라.”
“응.”
경고를 머리에 새기며 고개를 끄덕이던 키아라가 갑자기 루터를 빤히 쳐다봤다.
“근데 루터도 인간이잖아. 엘레나도 인간이고. 전부 믿으면 안 돼?”
“그래. 나 빼고 전부 믿지 마라.”
“엘레나도?”
“예외는 없다.”
“알았어.”
이상한 잣대였지만, 키아라는 철석같이 믿었다.
야심한 시각의 바스코 제국의 관문.
삼엄한 시선으로 철통같이 성벽 앞을 지키는 기사가 눈앞의 상인을 향해 으름장을 놓는다.
“이 새끼, 첩자 아냐?”
새파랗게 질린 상인이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 첩자 노릇을 한답니까.”
“얼굴에 꿍꿍이가 가득한데, 어디서 거짓말이야?”
괜한 트집을 잡는 기사가 병사들에게 턱짓했다.
“수상한 자다. 끌고 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애원하는 상인을 병사들이 끌고 간다. 콧방귀를 뀐 기사가 다음 차례를 맞이했다.
냉엄한 시선으로 일행을 훑던 기사가 키아라와 눈이 마주치더니 뜨악했다.
태어나서 저렇게 예쁜 여자는 본 적이 없다.
얼굴이 풀린 기사의 시선이 키아라에게 꽂혀 떨어지지 않는다.
동행한 상인은 자신의 신분증과 뇌물이면 충분하다 했지만, 전쟁이 일어나니 검문이 꼼꼼해졌다.
안 되겠다 싶어 루터가 나섰다.
“나다.”
반말에 기사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
달뜬 표정이 금세 사나워졌다.
분노한 기사가 으르렁거렸다.
“너 이 새끼. 방금 뭐라고 그랬어?”
“내 눈을 봐라.”
루터의 눈이 깊어졌다.
순식간에 마법이 걸린 기사가 흠칫했다.
다시 보니 루터의 얼굴이 언젠가 마주친 귀족과 무척 닮아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몰라 뵀습니다.”
“알면 됐다. 비켜.”
루터의 고압적인 명령에 당황한 기사가 얼른 물러났다.
상인이 놀란 시선으로 루터를 보다 이내 궁금증을 숨기고 걸음을 옮겼다. 일행이 신기한 얼굴로 수근 거렸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케인 말대로 진짜 손쉽게 통과하네.”
통과한 관문 안쪽은 넓은 대로가 펼쳐진 작은 소도시였다.
검문소에서 기사가 지었던 표정을 되새김질하던 상인이 루터에게 조언했다.
“아무래도 고귀한 아가씨 덕분에 문제가 생길 듯하니 변장이 필요해 보입니다.”
상인은 키아라의 정체를 몰랐지만, 보통 신분이 아니라 짐작했다.
흔치 않은 순백의 머리카락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어딜 가나 주목 받는다. 게다가 정수리의 뿔을 가리기 위해 임시로 씌운 베일 때문인지, 고결한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상인의 주의에 루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뿔에만 신경 썼는데 이제 보니 얼굴을 가렸어야 했다.
대로를 지나던 사람들이 키아라를 보더니 걸음을 세웠다.
현재 바스코 관문은 올슨에서의 전쟁 수행을 위해 기사나 마법사와 같은 능력자들이 대기 중이다.
그런 그들이 키아라를 발견하더니 동상처럼 얼어붙고 넋을 잃었다.
아름다운 미인이 피를 부르는 것은 역사에서도 증명된 일이다.
사람들이 키아라를 향해 홀린 듯이 다가오자 루터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곧 일어날 피바람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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