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정착하다2
진동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다.
눈사태가 가라앉으면서 사방에 하얀 안개가 펼쳐졌다. 루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개를 헤치며 설산 구멍을 향해 나아갔다.
입구에 도착한 일행은 내부를 확인했다. 그가 펼친 에어 스핀 마법은 회전력이 강하다.
바람이 회전하며 입구보다 내부를 더 확장시켰다.
넓은 내부를 둘러보던 돌켄은 저도 모르게 팔을 비볐다.
뚫린 구멍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으슬으슬하다.
게다가 고지대라 숨쉬기도 어렵다.
‘영 시원찮은데…….’
자고로 살 곳이라 하면 몸과 마음이 편히 쉴 수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불편하기만 하다.
돌켄의 그런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루터가 대답을 말했다.
“오늘은 임시로 묵는다.”
케인이 물었다.
“여기서 눌러 사는 게 아닙니까?”
“아니다. 우리가 살 곳은 저 아래가 될 거다.”
루터가 바닥을 가리켰다.
일행의 눈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가 알기 쉽게 풀어 설명했다.
“산 전체를 거처로 만들 생각이다.”
“예? 산 전체를요?”
“그래. 앞으로 이곳 내부의 일부를 허물 생각이다.”
과격한 계획에 일행이 입을 떡 벌렸다.
아연실색한 돌켄이 물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우린 몬스터 영역의 서쪽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사해를 가까이 두고 있어. 사해는 몬스터 영역보다 더 미지의 영역으로 알려진 곳이지. 갑자기 어느 순간 자연 재해가 닥쳐올 수 있고, 감당하기 힘든 몬스터나 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하려면 산 전체를 요새화해 방비해야 한다.”
몬스터 영역의 서쪽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루터는 미지의 영역에 오면 일단 경계를 한 뒤, 방비책을 세운다.
그래서 설산을 선택했다.
고지대라 주변을 관찰하기에도 좋고, 위협이 닥쳐올 때 방파제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얼떨떨하게 듣던 일행의 생각이 깊어졌다.
확실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몬스터 영역의 서쪽은 사막 너머만큼이나 알려진 게 없었다.
서쪽의 자연은 몬스터보다 더 가혹하다. 그들은 루터 덕분에 그 자연을 뚫고 최서단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살 곳을 생각해놓을 만큼 오랫동안 눌러 앉을 예정이지만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최소한의 안전구역은 만들어놔야 하는데, 설산 요새화는 실행이 어렵지 듣기에는 안전하게 느껴졌다.
합리적인 논리에 설득당한 일행이 한마디씩 했다.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이곳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루터는 동의하는 일행에게 말했다.
“이곳을 잘 봐두어라. 지금은 단지 구멍을 만들어놨을 뿐이지만, 조만간 이 산 전체를 우리의 요새로 만들 것이다.”
다른 이가 그 소리를 했다면 헛소리 한다며 코웃음 쳤을 것이다.
하지만 루터가 장담한 일이다.
일행은 그가 선언했으니 곧 그대로 이뤄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음날 아침.
루터가 산 내부를 허물 동안 가만히 있을 수 없던 일행은 자처해서 밖으로 가 있기로 했다.
어차피 옆에 있어봤자 방해만 될 뿐이다. 조금이라도 수련을 해 실력을 쌓아놔야 나중에 발목 잡을 일이 안 생긴다.
사해가 보이는 언덕에서 수련을 하던 일행이 간간히 동작을 멈추고 설산을 바라봤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대지가 흔들리며 집채만 한 바위들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간다.
어제 만든 구멍은 알고 보니 부순 내부의 잔해를 버리는 용도였다.
지켜보던 돌켄이 낄낄거렸다.
마치 설산이 재채기를 해서 바위를 뱉는 것 같았다.
돌연 그가 기침하는 시늉을 했다.
“우에취! 에취! 아이고, 나는 설산인데 감기가 걸렸네. 우에취! 으하하하!”
스스로의 유머에 감탄했는지, 박장대소하는 돌켄.
그러자 조용히 수련을 하던 키아라가 돌켄을 물끄러미 보더니 가까이 다가갔다.
“돌켄. 나 좀 도와줘.”
설산에 집중하던 돌켄이 옆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설산의 봉우리와 같은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며 청초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돌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키아라의 아름다운 미모와 분위기는 남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랜만에 키아라가 말을 건넸다.
기쁜 마음에 돌켄이 활짝 웃었다.
“물론이지, 키아라. 뭘 도와줄까? 응? 말만 해.”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려는지 돌켄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키아라가 목검을 들어 올렸다.
자크가 만들었고, 루터의 인챈트가 들어간 키아라의 전용 목검이었다.
“나랑 대련해줘.”
대련이라는 말에 돌켄이 당황했다.
“대, 대련? 나하고 대련을 하자고?”
수련에 매진하던 일행이 그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둘이 대련을 하겠다고?”
구슬땀을 흘리던 케인이 다가왔다.
엘레나가 의아한 눈으로 키아라에게 물었다.
“키아라. 갑자기 웬 대련이야?”
궁금해 하는 그들에게 키아라가 담담히 말했다.
“내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궁금해서.”
“그래? 그런데 왜 하필 돌켄이야?”
“돌켄이 제일 한가해 보여서 부탁했어.”
“한가하다고?”
세 사람이 그를 쳐다봤다.
당황하던 돌켄이 앓는 소릴 냈다.
“아니야. 나 바빠.”
케인이 권했다.
“한번 해보지 그래?”
“그건 곤란하지. 루터 님이 키아라 아끼는 거 알잖아?”
키아라가 다치면 난리가 난다.
돌켄은 키아라를 죽이려고 한 사제가 얼마나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케인이 그런 돌켄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수련의 일환이니 당연히 이해해 주실 거다.”
자크도 바람을 넣었다.
“키아라가 모처럼 부탁했는데 한번 해봐라.”
“너까지 왜 그러냐?”
그의 앓는 소리에 엘레나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설마 질까 봐 무서워서 빼려는 건 아니겠지?”
“뭐라고?”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돌켄이 씩씩거렸다. 그래도 일행 중에선 실력이 가장 낫다고 자부하던 차였다.
돌켄이 언성을 높였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키아라가 다칠까 봐 일부러 안 하는 거라고.”
“글쎄? 과연 그럴까? 키아라는 루터 님도 인정한 천재라고.”
“아무리 천재라 해도 이제 걸음마 단계잖아? 게다가 상대는 나라고. 경험 많은 내가 설마 키아라에게 지겠어?”
자신만만함에 엘레나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럼 마침 잘됐네. 이참에 키아라에게 한 수 지도를 해줘봐.”
대련은 찝찝했으나, 가르치라는 말에는 내심 혹한다.
“어쩔 수 없지.”
미끼를 문 돌켄이 무기를 챙긴 뒤,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충고했다.
“키아라. 설령 진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지 마. 인생에 패배는 수없이 많은 법이니까 좌절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벌써부터 승리를 자신한 돌켄.
키아라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대련이 시작되고 두 사람을 제외한 남은 이들이 거리를 벌렸다.
엘레나가 속삭였다.
“누가 이길까?”
케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돌켄에게 닿았다.
가끔 실없어 보이긴 했지만, 돌켄의 실력은 진짜배기다.
“돌켄이 이기겠지.”
키아라는 목검을 쥔 지 겨우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반면, 돌켄은 A급 용병인 데다 경험이 많으니 아무리 키아라가 천재라 할지라도 버거운 상대였다.
돌켄이 근엄한 얼굴로 배틀액스를 까닥였다.
“선공은 양보하마.”
키아라는 거절하지 않았다.
자리를 박찬 키아라가 돌켄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더니 검을 내질렀다.
돌켄이 호기롭게 외쳤다.
“좋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배틀액스를 눕힌 뒤, 앞으로 내밀었다.
직선형 공격은 날의 면이 넓은 배틀액스의 방어에 막히기 쉽다.
배틀액스가 워낙 험악한 무기다 보니 돌켄은 방어 위주로 키아라를 지치게 할 생각이었다.
헌데,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다.
부딪히기 일보 직전, 돌연 키아라가 몸을 살짝 흔들었다.
다리에서 시작한 반동은 회전이 되었고 무릎, 허벅지, 허리를 거치고 마침내 손에 쥔 목검까지 닿았다.
돌켄은 마나를 끌어 올리지 않은 것을 후회해야 했다.
쾅!
목검과 부딪힌 배틀액스가 팽그르르 돌더니 돌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졌다.
“헉!”
신음을 뱉은 돌켄이 손바닥을 쳐다봤다. 순간, 배틀액스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해 손바닥의 살갗이 벗겨져 버렸다.
그사이 키아라가 차가운 눈빛과 함께 목검을 내리쳤다.
퍼어억!
“컥!”
비명과 함께 돌켄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놀랍군.”
과정을 면밀히 주시하던 자크가 감탄사를 뱉었다.
루터 님이 어째서 키아라에게 천재라는 칭호를 붙였는지 알 것 같았다.
용병은 죽어서도 무기를 떨어트리지 않는다. 대부분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그들에게 무기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돌켄이 자신의 생명줄을 눈 뜬 채로 날려 보냈다.
힘이 예측한 범위를 상회했다는 뜻이고, 반격의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는 의미기도 하다.
‘키아라를 괜히 유레인에 빗댄 게 아니었군.’
크게 반동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최소의 힘으로 최대의 회전을 실어 넣었다.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그런 재간을 발휘하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자크가 감탄하는 동안 케인은 기절한 돌켄을 향해 중얼거렸다.
“당분간 고개를 못 들고 다니겠군.”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다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창피하고 자존심도 적잖이 상했을 것이다.
엘레나는 당장의 결과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요즘에 성취가 있었다고 여유 부렸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야.”
말하던 그녀가 묘한 눈으로 키아라를 바라봤다.
돌켄의 해이해진 모습이 거슬렸던 걸까. 엘레나는 키아라가 대전 상대로 돌켄을 지목한 것은 의도적이라고 확신했다.
‘정말 많이 변했어.’
달라진 키아라는 어째선지 다가가기 힘들어졌다. 속내를 잘 비추지도 않고, 자크 못지않게 조용했다.
‘닮았어.’
외관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행동이나 분위기는 꼭 그분을 닮았다.
그런 키아라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한 달이 흘렀고,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돌켄의 변화가 가장 컸다.
키아라에게 패한 이후로, 매일같이 귀신같은 얼굴로 수련에 몰입했다.
아무리 천재라도 겨우 하루밖에 목검을 다루지 않은 키아라에게 한방에 나가 떨어졌다.
자존심이 짓이겨진 그는 어떻게 해서든 명예회복을 위해 번번이 키아라에게 도전했지만, 한 번을 이기는 법이 없었다.
일행은 돌켄을 교훈 삼아 수련에 힘썼고, 그사이 루터는 자신의 계획을 일부나마 달성했다.
설산에 들어서는 일행의 얼굴에 감탄이 떠올랐다.
한 달 전에 만들어놨던 구멍은 매끈한 통로가 되어 안쪽으로 이어졌다.
한참을 내려가니 공동이 펼쳐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과 평원을 연상케 하는 드넓은 바닥까지.
내부를 둘러보던 케인이 탄식했다.
“이게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인가?”
늘 그랬듯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기적을 보여주었던 루터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루터는 전율하는 일행을 뒤로하고 평평한 바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기에는 밀을 심고, 저쪽에는 사과나무를 심어야겠다.’
산 내부에 경악할 정도로 거대한 공동을 만든 루터의 첫 번째 목표는 바로 농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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