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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클 영주님-30화 (30/185)

#30화 변화2

더 이상 알몸으로 활보하고 다닐 수 없다. 엘레나는 수레에 실은 자신의 여벌옷을 키아라에게 입혔다.

일행은 키아라를 어색하게 바라봤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기 같았던 키아라가 하루아침에 성숙하게 변화하니 낯설기 짝이 없다.

그들은 당황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키아라는 태연했다.

권능은 신체 변화뿐만 아니라 자아에도 개입한다.

겉모습에 혹할 일이 아니었다.

루터의 사고력과 통찰력. 그리고 성격까지 영향을 받은 키아라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덤덤히 받아들였다.

키아라의 차분한 모습에 어색하게 바라보던 일행이 루터를 쳐다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의문투성이의 눈빛이다.

루터는 키아라의 외양 변화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키아라의 변화는 오염된 마력석과 관련이 있다.”

오염된 마력석을 정화하고 자신의 권능 마법으로 개입한 것까지 알려주었다.

어차피 앞으로 함께할 그들이다.

언젠가 직면할 위협의 근원에 대한 진실을 이들도 알 자격이 있었다.

설명을 듣던 일행이 입을 떡 벌렸다.

놀란 엘레나가 더듬거렸다.

“저, 정말 드래곤의 짓인가요?”

“단정 지을 순 없지. 하지만 강한 존재의 영향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니 언젠가 그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반목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맙소사.”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신음을 연신 흘리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헌데 그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표정은 태연하다.

그녀가 물었다.

“왜 그렇게 태평해? 방금 루터 님이 한 말 듣기는 한 거야?”

몬스터를 변화시킨 것도 모자라 권능을 지닌 그 이상의 존재와 맞서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놀라움의 연속인데, 자신을 제외한 일행은 담담했다.

돌켄이 머리를 긁적였다.

“놀라운 걸 하도 많이 봐서 그런가. 별로 충격적이진 않아.”

기상천외한 마법을 구사하고, 자크에게 몬스터의 눈을 달아주었다.

심지어 오우거였던 키아라의 외양을 사람처럼 변화시켰다.

하도 놀라다 보니 이제 면역이 되었다. 돌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루터 님 말씀은 우리에게 적이 있다는 거잖아. 그러면 싸워서 이기면 되는 거 아냐?”

시종일관 침묵하던 자크가 한마디 했다.

“루터 님의 적은 내 적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떤 존재든 상관없다.”

케인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저희를 거둬주셨으니 밥값은 해야죠.”

도움이 되지 못할까 오히려 걱정이다. 엘레나는 당황하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어마어마한 적과 싸우게 되었는데, 나만 놀랍나 보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믿지 않았을 텐데.”

심지어 드래곤일 수도 있었다.

드래곤은 신화 속 존재다.

존재의 유무조차 장담할 수 없는 드래곤과 싸우게 되었는데, 동료들은 그러려니 하고 있다.

엘레나는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돌켄의 말이 틀린 소리도 아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루터는 항상 기적을 넘어 충격적인 결과를 보여 주었다.

그런 그가 드래곤이나 그에 필적하는 존재와 싸울 예정이다.

그간의 행적을 떠올려보면,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루터는 자크에게 와이번의 눈을 이식했다.

원래의 기능을 살리되, 형태에 맞게 축소하고 능력을 대폭 살렸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눈과 이질감을 없애 시각을 맞췄다.

작업을 마친 루터가 말했다.

“됐다. 확인해봐라.”

묵묵히 이식을 받던 자크가 몸을 일으켜 전방을 바라봤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풀벌레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칼날 산맥의 어느 둥지에 와이번이 자신의 날개를 고르고 있는 것도 보인다.

“어떠냐?”

“모든 게 눈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언젠가 네 눈에 담긴 대상을 거리에 관계없이 맞힐 날이 올 것이다.”

소드 마스터가 있듯이 궁사에게도 보우 마스터가 있다. 새로운 날개를 장착한 지금의 자크라면 그 경지에 충분히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깨어난 키아라는 깊은 생각에 빠져 줄곧 말이 없다.

걱정된 엘레나가 다가갔다.

“키아라. 괜찮니?”

“응. 엘레나.”

엘레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예쁜 키아라는 목소리도 고왔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뀐 모습은 어때?”

“괜찮아.”

엘레나는 짧게 답하는 키아라에게 살짝 서운함을 느꼈다.

명랑하고 쾌활한 모습을 기대했는데, 조용하고 얌전했다.

“혹시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물어도 될까?”

“고민하고 있었어.”

엘레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고민? 무슨 고민?”

“엘레나. 나는 루터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속 깊은 말에 엘레나는 적잖이 놀랐다.

‘겉모습만 변한 게 아니구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는 건 사소한 변화였다.

태도를 비롯하여 생각의 깊이가 달라졌다. 단지 사물을 분별하는 것에 호기심을 품고 즐거워하던 예전의 모습과 딴판이다.

엘레나가 물었다.

“그래서? 방법을 찾았니?”

“응. 생각해보면 별것 아니야.”

일어선 키아라의 눈동자에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거 알아?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내가 무엇을 원하든지 이루어 질 거야. 내 고민은 어떻게 하면 루터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어. 그리고 나는 해답을 찾았어.”

자신 있게 말한 키아라가 몸을 돌려 루터에게 다가갔다. 엘레나는 그런 키아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단순히 조용하고 얌전해진 게 아니었다.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키아라는 수레에 기댄 채, 상념에 젖은 루터의 옆에 앉더니 품속에 얼굴을 묻었다.

“찾았어.”

나직이 말하는 그녀에게 루터가 물었다.

“무엇을?”

“내가 루터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

루터의 눈이 의문에 휩싸였다.

“뭐?”

“강해질 거야. 그래서 루터를 지켜줄 거야.”

고개를 들은 키아라가 루터의 얼굴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루터. 나의 루터. 내가 지킬 거야. 누구도 루터를 건드릴 수 없어.”

흠뻑 빠진 목소리에 루터의 눈빛에 의문이 휩싸였다.

‘얘가 왜 이러지?’

그러고 보니 권능이 개입된 대상이 주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알지 못했다.

루터는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어떤 의지를 개입했더라.’

권능의 개입에는 의지가 수반되어야 한다. 드렉시아가 강조한 부분이었고, 루터 역시 무심결에 키아라에게 자신의 의지를 심어 넣었다.

그리고 키아라에게 주입한 루터의 의지는 자유였다.

스스로 선택하게 했는데, 이것이 키아라에게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이게 키아라의 본심인가?’

자신을 지키고 사랑받겠다는 것은 키아라 본인이 스스로 원하는 일인 게 분명하다.

‘강해지겠다…….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자신에 대한 집착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강해지겠다고 하니 호기심이 생겼다.

루터는 과연 키아라가 얼마나 발전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다음날 아침.

루터는 일행을 불러놓고 목적지를 말했다.

“서쪽으로 간다.”

명확한 위치가 아니라 방향만 정했다. 일행은 의아했다.

케인이 물었다.

“일부러 서쪽으로 가시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서쪽은 누구도 찾지 않으니까.”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

그곳에서 기반을 잡은 뒤,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생각이다.

일행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서쪽은 잡기 쉬운 고블린이나 값나가는 트롤과 같은 서식지에서 동떨어졌는데, 지형은 험하기 짝이 없어 누구도 찾지 않았다.

방향을 정했으니 출발이다.

어젯밤, 루터가 강력한 적을 예고한 후 일행의 수련에 불이 붙었다.

눈을 뜨고 잠에 들기까지 검술에 매달렸고, 마나 연공을 멈추지 않았다.

키아라는 여정 내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떠가는 구름과 날아가는 새를 관찰했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유심히 바라봤으며,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관심의 대상이었다.

일행은 그런 키아라의 호기심이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녀가 나뭇가지를 들어 올렸다.

길고 가는 나뭇가지를 손에 쥔 키아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포물선을 그리다가도 갑자기 정곡을 찌르듯 날카롭게 내지르기도 한다.

일행은 수련에 집중하다가도 키아라가 나뭇가지를 들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추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춤을 추는 것처럼 동작의 연결이 자연스러운 데다 묘하게 시선을 끌어 눈을 뗄 수 없었다.

“키아라가 뭘 하는 걸까?”

돌켄의 궁금증은 루터를 제외한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검술을 펼치는 것 같기도 하다.

크게 특이점이 보이지 않았는데, 보면 볼수록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엘레나가 추측했다.

“검술은 아닌 것 같아. 동작이 볼 때마다 달라. 아마도 우릴 따라하는 게 아닐까?”

케인이 제동을 걸었다.

“키아라는 우릴 잘 보지 않아.”

동의한다는 듯 자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아라의 시선은 주로 자연 풍광을 관찰하거나 아니면 루터에게 향해 있었다.

자신들이 먼저 말을 건네지 않는 이상 잘 쳐다보지 않는다.

인상을 쓰며 고민하던 자크가 머리를 긁적였다.

“도저히 모르겠네. 루터 님에게 물어볼까?”

펑!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움직이던 키아라의 나뭇가지가 갑자기 폭발했다.

부서지고 비산하는 나뭇가지 파편을 본 돌켄이 놀라 외쳤다.

“뭐야? 왜 갑자기 부서졌어?”

미처 보지 못한 엘레나가 물었다.

“키아라가 일부러 부순 거야?”

예의주시하던 자크가 말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갑자기 폭발하듯 터졌어.”

모두의 눈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의문이 떠오르면 일행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 곳으로 향한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루터가 수레 위에 앉아 있었다.

명상에서 깬 그는 깊은 눈으로 키아라를 바라보았다.

일행이 다가갔다.

“루터 님. 혹시 보셨어요?”

“봤다.”

“왜 갑자기 키아라의 나뭇가지가 폭발했을까요?”

“체내의 마나가 반응했기 때문이다.”

돌켄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나요? 키아라에게 마나가 있습니까?”

케인이 물었다.

“루터 님이 가르쳐주셨습니까?”

“아니다.”

“그, 그러면 어떻게 마나가 있는 거죠?”

키아라를 유심히 보던 루터가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유레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유레인은 대륙 역사상 최초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 천 년 전 인물이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던 최초의 검성으로 검사라면 모르는 자가 없었다.

돌켄이 말하면서 어리둥절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유레인의 스승이 누군지도 아나?”

“스승이요? 저는 모르겠는데…….너희들은 알아?”

“우리도 몰라. 그러고 보니 유레인의 스승이 누구였지?”

전무후무한 대업을 달성했지만 강렬한 인상만 남긴 채 사라져 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자크가 물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그래. 유레인의 스승은 사람이 아니었다.”

돌켄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럼 혹시 드래곤이었습니까?”

루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스승은 만물이었다.”

뜬금없는 말에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만물이라구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유레인은 천재였어.”

루터는 언젠가 발견한 고문서를 회상하며 나직이 말했다.

“천재는 굳이 남들이 만든 형식과 기준을 따라할 필요가 없지. 세상을 보고 깨달으며 새로운 형식을 창안한다. 남들이 아무리 수백, 수천 년을 매달려도 해내지 못할 것들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해버리지. 천재란 그런 존재다.”

설명에 압도당한 일행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키아라는 천잽니까?”

“마나를 익히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검술을 권한 적도 없어. 그런데 스스로 배우고 익혔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있나?”

되묻는 물음에 일행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충격의 파문이 이는 가운데 엘레나는 키아라와의 대화를 상기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키아라의 말이 떠올랐다.

키아라의 그 자신감은, 결코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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